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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연인에게 (20)화 (20/90)

제20화

격정적이던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부드러운 키스였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베어 물 듯, 강헌은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입술과 혀가 닿는 모든 곳이 달았다.

본디 단맛을 싫어하지만.

이 맛만큼은 싫지 않았다.

아까 마티니를 마셨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취하는 기분이었다.

살결과 살결이 맞닿는 것이 이런 느낌일 줄은 몰랐다.

그는 내내 더럽고 추악한 악몽 속에 갇혀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검은 꿈 속에서 강헌은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홀로 견뎌야 했다.

그런데 사빈으로 인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아주 쉽게.

타인과의 접촉을 싫어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하아…….”

반쯤은 오기로 한 키스였다.

앞으로 이 회장이 보낸 일개미들의 눈을 피하려면 반드시 치러야 할 일이었고, 또…….

그의 의식은 부정했지만 무의식은 인정했다.

사빈의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고.

……넘어가고 싶었다고.

그의 입술이 하얀 목을 타고 아래로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말 쉽게 자국이 생길까. 이 눈처럼 흰 살결은.

“이강헌 씨…….”

미약한 음성은 그를 저지하는 것인지 부추기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사빈의 하얀 손가락이 강헌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그 손길에 더욱 자극받은 그가 낮게 포효하며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과일처럼 달콤한 향기가 그녀에게서 피어올랐다.

이렇게 가까이 가야만 맡을 수 있는 향기였다.

강헌의 입술이 사빈의 심장이 뛰고 있는 부근까지 내려왔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그의 눈길을 사로잡아서 곤란하게 만들었던 말캉한 살결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걸린 민소매 원피스의 끈을 내렸다.

희고 탄력 있는 그곳을 입술로 살짝 빨아들이자 사빈이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길에 더욱 자극받은 강헌은 나머지 어깨끈도 내리며 입술을 깊이 파묻었다.

그의 머리를 헤집던 손길이 멎었다.

툭.

아래로 떨어진 사빈의 손.

강헌은 얼굴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천사빈.”

고개가 풀썩 꺾이더니 강헌의 어깨로 스르르 넘어졌다. 이윽고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

아직 흥분으로 인해 눈가가 붉은 강헌은 짧은 숨을 내뱉었다.

자신을 이런 상태로 만들어 놓고 사빈은 잠이 들었다.

비행시간이 길었던 데다가 제가 일하는 사이에 긴 해변을 걸었고, 또 주량이 약하니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잠들어 버리다니.

그녀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정말 밀당의 귀재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진한 아쉬움을 느끼는 스스로를 깨달은 강헌은 미간을 좁혔다.

더 미치겠는 것은.

사빈을 품에서 떼어 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품에 다 들어오는 여린 몸은 그녀보다 훨씬 커다란 그의 온몸을 다 데우고도 남을 정도로 따뜻했다. 게다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사빈만의 향기를 계속 맡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들쑤시는 동시에 편안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향기였다.

‘이래서 자꾸 내 냄새가 좋다고 하는 건가.’

사빈이 제게서 아빠 냄새가 난다며 자꾸만 붙어 있으려고 하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계속 이 향기에 감싸여 있고 싶었다.

“으으음.”

그때 사빈이 강헌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순간 그는 심장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후계자 교육을 받아 오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네가 모르는 것은 없어야 한다.’였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물론, 그들이 모르는 것과 절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까지 강헌은 죄다 알아야 했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라고 배웠다.

그 배움에 따르면, 강헌은 지금 수치스러워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빈은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가 알 수 없고, 또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수치라기보다는…….

그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내릴 수 없었다.

이 감정에 대해 탐구하여 답을 찾거나 이름을 붙이게 되면 영영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빠…….”

감긴 사빈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적셨다.

“보고 싶어…….”

한국에 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데 왜 저렇게 그리워하는 것일까.

이윽고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강헌의 심장은 더욱 아려 왔다.

“……나도 데려가…….”

어딜 데려가 달라는 걸까.

천문호 의원이 있는 집으로 데려가 달라는 걸까?

혹은 어린 날, 천 의원이 딸을 데리고 갈 수 없는 곳에 가느라 떼어 놓았던 적이 있던 걸까?

의문이 생겼지만 이번에도 답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강헌은 무심히 사빈의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어깨에 제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멈칫하던 강헌은 이내 사빈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빈은 잠꼬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힌 강헌은 이불을 덮어 준 후, 욕실로 향했다.

사빈과는 다르게 강헌은 별로 강하지도 않던 취기가 확 날아가 버렸다.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듯했다.

“…….”

또 기억 못 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강헌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

***

“으으으음.”

크게 뒤척이던 사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호텔이구나.

어제 마스터룸에 들어오자마자 맡았던 디퓨저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언제 온 거지?”

사빈은 어제를 떠올려 보려 애썼다.

바다를 보고 있는데 이강헌 씨가 걸어왔고.

둘이서 발리 시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몰을 보며 칵테일을 마셨지. 같이 홍보용으로 사진도 찍었는데.

“하아. 그 이후가 기억이 안 나.”

사빈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뭔가 굉장히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데…… 뭐지? 뭘까.

“설마 또 안아 달라고 한 건 아니겠지?!”

고개를 번쩍 치켜든 사빈은 아야야, 하며 손으로 뒷목을 감쌌다.

“어? 이렇게 감싸는 느낌…… 왜 익숙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또 안아 달라고 했을 리 없지, 내가.

그렇게 납득하며 문득 시계를 본 사빈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일분일초를 아껴야 한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발리니까.

그래도 처음 술을 마셨을 때보다는 숙취가 덜했다. 욕실로 들어간 사빈은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입술이 왜 이렇게 부었지? 자다가 깨물었나?”

응? 여긴 또 왜 이래?

사빈은 파인 가슴골 위 붉게 물든 부위를 매만졌다.

“자다가 긁은 건가…….”

이상하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사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옷을 벗고 해바라기 수전의 물을 틀었다.

잠버릇이 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 집을 나와 자유로운 곳에 있다 보니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샤워를 마친 사빈은 그제야 아! 하며 깨달았다.

“이강헌 씨는 어디에 있지?”

뭐, 다른 방에서 자고 있나.

사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강헌이 옆에 있는 것이 더 이상하니까.

“오늘은 이거랑 이거 입어야지.”

그녀가 고른 옷은 베이지색의 민소매 여름 니트와 그보다 좀 더 진한 색의 긴 리넨 바지였다.

햇살이 피부에 장시간 닿으면 따끔거리니까. 사빈은 카디건을 어깨에 두르고 가슴 앞에서 매듭을 지었다.

“아, 배고프다.”

룸서비스를 시키려다 예의상 강헌에게 권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 깨어 있을 것이다.

신혼여행을 와서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업무를 보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강헌은.

하지만 거실로 나간 사빈은 자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워 있는 그는 얼핏 마네킹처럼 보일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은 복근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 꼭 화보를 촬영 중인 모델 같았다.

‘……잘생기긴 참 잘생겼네.’

그는 자고 있어도 풀어지지 않고 반듯한 평소 그대로였다.

조금 망가지면 어디가 덧나나. 인간미 없게.

가슴팍이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것만이 그를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유일한 요소였다.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

저 때문에 찬물 샤워 후 이 방, 저 방, 발코니를 전전하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는 것을 사빈이 알 턱이 없었다.

……뭐라도 덮어 줘야 하나? 인류애 차원에서.

사빈은 마스터룸 안으로 들어가 여분의 얇은 담요 이불을 가져왔다.

강헌처럼 각이 딱 잡혀 반듯이 접혀 있는 이불을 쫙 펼쳐 쥔 사빈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담요의 길이가 길었다. 그것을 밟은 사빈이 비틀거리며 그의 위로 넘어졌다.

“어어?”

“윽…….”

놀란 사빈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가슴팍과 부딪친 턱이 아파 왔으나, 지금은 강헌이 먼저였다.

“이, 이강헌 씨, 괜찮아요? 미안해요! 일부러는 아니었어요. 그냥 이걸 덮어 주려다가…….”

강헌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당황한 듯 볼이 빨개진 사빈이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많이 아파요?”

“……뭡니까.”

“정말 미안해요, 이불을 덮어 주려다가 넘어졌어요.”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사빈이 담요를 쥔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몇 시입니까.”

“8시예요.”

이 시간까지 잠을 자다니. 아무리 늦게 잠들어도 일어나는 시간은 늘 5시로 같았는데.

마른세수를 한 강헌이 소파를 벗어났다.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예요?”

“…….”

그는 대답 대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또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군. 참으로 몹쓸 술버릇이었다.

그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사빈은 눈치를 보았다.

‘내가 또 실수했나? 설마 진짜로 또 안아 달라고 한 건…….’

일단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야겠다.

“저어. 룸서비스 시키려고 하는데. 같이 먹을래요?”

예의상 묻는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제저녁에 같이 칵테일을 마시러 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친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가 거절하면 얼른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하아…… 그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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