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사빈의 말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신경 쓰일 만큼의 자극은 되었다.
“마음이 없어도.”
사빈이 가물가물한 눈을 억지로 뜨며 강헌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마음이 없어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요?”
“마음보단 쾌락이 우선인 사람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강헌 씨랑 나는 아니잖아요.”
사빈이 검지로 그의 어깨를 콕 찍었다.
“그쪽이랑 나는 마음이 우선인 사람들이에요.”
“…….”
“그쪽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나는 내 자유를 위해서 결혼했어요.”
사빈이 히이, 하고 힘없이 웃었다.
“결혼은 아주 중요한 거라고 엄마 아빠가 어릴 적부터 그랬는데.”
“…….”
“꼭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라고 그랬는데.”
몽롱한 눈 가득 강헌이 담겼다.
“이강헌 씨.”
그녀의 입술에 담긴 제 이름이 제법 달큰하게 느껴져서 강헌은 되레 얼굴을 굳혔다.
“발리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어요.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
“…….”
“빨리 이혼하면 돼요.”
신혼여행 첫날 이혼 얘기를 꺼내는 부부가 예상외로 그리 적지 않다고, 언젠가 신문에서 통계를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을 읽을 때만 해도 사빈은 자신이 그 통계에 집계될 줄은 몰랐다.
미안해, 엄마. 미안해, 아빠.
“계산해 보니 내가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으려면 최소 1년이 걸려요.”
“…….”
“그때 어떻게든 이혼할 수 있도록 이강헌 씨가 힘 좀 써 주세요. 나도 나대로 준비할게요.”
사빈은 지금껏 천문호와 추연실의 눈을 피해 필사적으로 모은 학대의 흔적들을 떠올렸다.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 발표해 봤자 천문호에 의해 묻히고, 자신은 정신병원에 갇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조그룹에서 그 증거를 문제 삼아 이혼을 요구한다면, 그렇게 강헌이 힘을 실어 준다면.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강헌 씨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루빨리 살고 싶을 거 아니에요.”
이혼하면 해남에서 하루 묵은 뒤, 해외로 출국할 것이다.
해남 땅 끝 마을.
부모님의 마지막 여행지였다.
엄마 아빠가…… 숨을 거둔 곳.
사진작가였던 아빠와 여행작가였던 엄마는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주말이면 사빈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는 했다. 목적지를 정하고 떠날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다.
‘함께 떠난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 사빈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초등학생이던 사빈이 2박 3일로 현장체험학습을 떠난 사이, 그녀의 부모님은 해남으로 내려갔다.
한 잡지사에서 ‘우리 땅의 끝에서 바라보는 일몰’이라는 주제로 사진과 에세이를 보내 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것이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부모님은 종종 ‘해남 땅 끝은 반드시 가 봐야지.’라는 말을 하곤 했다.
현장체험학습이 아니었다면 사빈도 부모님과 함께 갔을 것이다.
사고가 벌어진 후.
누군가는 사빈에게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던 게 참 다행이라고. 그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사빈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때 엄마 아빠와 같이 갔더라면.
……그곳이 어디든.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 나았을 텐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혼 사유가 될 수 있겠지.”
아이……? 사빈이 몽롱한 눈을 깜빡거렸다.
강헌은 그것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결혼하면 남자와 여자로 지내야 합니다.”
강헌의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사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건 걱정 마요. 자신 있으니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
“일개미들 앞에서 진짜 부부처럼 보일 수 있느냔 말입니다.”
아아, 난 또 뭐라고. 사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남의 눈 속이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거예요.”
그녀가 눈을 접으며 빙긋 웃었다.
“좋아해요.”
강헌의 눈 밑이 움찔거렸다.
“좋아해요, 이강헌 씨.”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첫눈에 반했어요.”
“…….”
“결혼하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사빈이 그의 뺨을 감쌌다.
“이강헌 씨랑 결혼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야.”
그녀의 맑은 두 눈에 제 모습이 비쳐 보였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숨결이 뒤섞였다.
“……어때요?”
사빈의 목소리에 강헌은 꿈에서 깬 듯 눈을 고쳐 떴다.
분홍색 안개가 낀 몽환적인 늪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꽤 그럴듯하지 않았어요? 회장님 일개미들은 안 속으려나? 보통은 다 속던데.”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저를 무척 사랑하시고 아껴 주세요. 제가 공주님이래요.]
이렇게 말하며 웃으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사빈의 말을 믿었고, 천문호와 추연실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의 속이 문드러지는 것도 모르고.
사빈의 심장이 쥐어뜯기는 것도 모르고.
“회장님과 회장님의 사람들은 철저합니다.”
갑자기 강헌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불안해요?”
“이 정도 연극으로는 속일 수 없을 겁니다.”
어쩐지 그는 화가 난 듯했다.
왜일까. 난 꽤 열심히 어필했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이강헌 씨의 속은 알 수가 없어.’
헤어져 준다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 하며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심통이 났어요?”
심통이라는 귀여운 표현에 강헌은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강헌 씨는 나를 유혹하고 싶은가 봐.”
미간을 자꾸만 찌푸리는 것을 보니.
“그거 잘생겨 보인다고 했잖아요.”
사빈이 쿡쿡 웃었다.
“이러다 내가 진짜 좋아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듯 즐거워 보이는 그녀가 어쩐지 얄밉게 느껴졌다.
제 속은 다 뒤집어 놓고는.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말아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천사빈 씨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까지만 신세 질게요. 돌아가면 이강헌 씨 안 괴롭힐 테니까 걱정 마요.”
왜 사빈이 하는 말마다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왜 자꾸만 자극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회장님을 속이지 못하면 천사빈 씨가 원하는 자유는 얻을 수 없을 겁니다.”
“내가 실전에 강한 타입…….”
“키스 혹은 그 이상을 하는 시늉이라면 모를까.”
으응? 사빈이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했어요?”
“우리가 속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는커녕 천사빈 씨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겁니다.”
취하면 귀도 이상해지나?
내가 뭘 들은 거지?
“아이요……? 집 밖으로 못 나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
차갑게 날이 선 그의 음성에 사빈이 움찔했다.
결혼을 했는데 또다시 집 안에 갇힌다고?
자유롭게 지낼 수 없다고?
아이?
아이를 가져야 한단 말이야?
끔찍한 일이었다. 사랑 없이 낳은 아이에게 자신의 불행을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는 절대로 안 돼.’
“키스.”
굳은 결심을 보여 주려는 듯 사빈이 그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슬쩍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아랫입술에 닿는 순간.
순간 강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욕구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강헌은 얼굴을 구기며 제 어깨에 얹힌 사빈의 손목을 붙잡아 떼어 냈다.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난 자신 있어요. 내 마음이 가짜라는 걸 안 들킬 자신.”
엄마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에 줄곧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요, 혹시 첫 키스예요?”
강헌의 표정에 사빈이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농담이에요. 이강헌 씨 나이가 얼만데.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예쁜 애인도 있는 분이잖아요.”
그 애인과 키스도, 섹스도 해 본 적 없다고 하면 그녀는 믿을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무언가를 참아 내는 듯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 덩달아 고양된 사빈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담기지 않았으니까 괜찮아요. 서로 원하는 것을 위해 협력하는 거니까.”
오늘은 사빈의 모든 말이 신경에 거슬린다.
“난 분명 경고했습니다.”
스산한 눈빛에도 사빈은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철저한 일개미라면서요. 실전에서 어색하면 우린 원하는 걸 얻지 못하니까요.”
강헌의 커다란 손이 사빈의 뺨을 감쌌다. 제가 닿는 순간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양새를 보니 속에서 열기가 일었다.
“고용인들은 아침 6시에 옵니다.”
그의 속삭임에 사빈이 눈을 깜빡거렸다.
와아, 엄청 일찍 오네. 식사 준비 때문인가.
“아침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부부 관계는 아침에 하는 거니까.”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달다.
말캉한 입술이 닿는 순간 강헌은 생각했다.
이 여자, 참 달다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몇 번 머금던 그는 입술을 완전히 맞붙이며 천천히 틈을 벌렸다.
사빈이 그의 옷깃을 꼭 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귀엽게 느껴지는 동시에…….
자극적이었다.
꼭 더 헤집어 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강헌은 저도 모르게 사빈의 머리를 감싸 제게로 더욱 당겼다.
“으음…….”
조금 벅찬지 사빈이 벌어진 틈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여전히 강헌의 옷깃을 꼭 쥔 채 버겁게 그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미간을 좁힌 그는 입술을 붙인 채, 여린 몸을 들어 올려 제 다리 위에 앉혔다. 더 가깝게 밀착된 몸과 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뜨거운 숨결이 깊은 안쪽까지 밀려들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강헌은 촉촉하고 유연한 근육을 휘감으며 달콤한 과실을 잔뜩 핥아 마셨다.
그들이 마셨던 칵테일의 맛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세상에서 가장 야릇한 액체를 만들어 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사빈은 매달리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강헌은 가는 허리를 휘감아 바짝 당겼다.
셀 수 없이 많은 숨결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고 갔다.
“하아…….”
한계까지 몰린 사빈이 고개를 뒤로 물리자 그들은 간신히 떨어졌다.
그러나 잠시뿐.
가쁜 숨을 내쉬며 몽롱한 눈빛과 달뜬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사빈을 보자 참을 수 없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감싼 강헌이 다시 입술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