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그가 자신의 칵테일 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하게 되는군요. 낯선 곳이라서 그런지.”
사빈은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녀도 이곳에 오자마자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돌아다녔으니까.
강헌이 무척 바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결혼이 결정된 후로 천문호와 추연실은 식사 자리에서 내내 기조그룹과 강헌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그는 재벌 2, 3세 중에서도 ‘낙하산’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강헌은 입사 첫날부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여 임원진을 납득시켰다고 한다.
그런 사람의 하루는 얼마나 빡빡했을 것인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편하게 풀어지고 싶은 마음을 모르지 않는 사빈이었다.
“사진 찍어요.”
사빈이 새초롬하게 말하자 강헌이 작게 미소했다.
“그러죠.”
“이번엔 흔들리지 않게요.”
그가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 두 사람이 잡혔다.
“왼쪽 테이블에 빨간색 셔츠를 입은 사람 보입니까?”
사빈의 눈동자가 슬쩍 옆으로 굴러갔다.
“네. 왜요?”
“아까 전에 연인이 자리를 비운 새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얼굴에 과자를 맞았습니다.”
“푸흡.”
사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찰칵, 촬영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
“천사빈 씨, 괜찮습니까?”
“으응, 괜찮아요, 괜찮아. 기분이 너무 좋아요.”
결국 사빈은 칵테일 세 잔을 마시고 취해 버렸다. 맨 처음 마셨던 블루하와이를 급하게 들이켠 탓이 큰 듯했다.
“어. 이강헌 씨. 이리 와 봐요.”
사빈이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
그의 눈앞에서 하얀 살결이 흔들렸다.
“여기에 뭐 묻었잖아요. 아래로 떨어져서 셔츠에 물들면 어쩌려고.”
사빈의 손가락이 강헌의 입술을 연신 문지른다. 그녀의 손길에 이리저리 뭉개지는 모양이 어쩐지 꽤나 야릇하다.
“하얀색은 티가 많이 난다고요. 지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사빈의 말에 강헌은 문득 생각했다.
그녀의 하얀 살결 위에도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생긴다면 티가 많이 날 것 같다고.
그러다 파인 가슴골에 눈이 닿는 순간.
그는 미간을 좁히며 눈동자를 굴리며 황급히 시선을 옮겼다.
“근데 이강헌 씨 입술, 되게 부드럽네요. 엄청 딱딱할 줄 알았는데.”
강헌은 입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빈의 손가락이 여전히 닿아 있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달싹였다간 하얀 손가락이 아래로 툭 떨어질 것 같았다.
“맨날 딱딱한 말만 내뱉으니까.”
강헌이 멈칫했다.
“다른 사람들의 입술은 죄다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우리 엄마 아빠 빼고.”
늘 딱딱한 말을 들어 왔던 것처럼 말하는 사빈이 의아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겉으로 봤을 땐 사람들이 그녀에게 딱딱하게 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국회의원 딸에, 똑똑하고, 외모도 꽤…… 괜찮은 편이니까.
성격도 나쁘지 않고.
어른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무척이나 얌전하고 조용한 사빈은 둘만 있을 땐 은근히 통통 튀었다. 그 간극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꽤나 재미있었다.
사빈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반대라면 모를까.’
강헌은 진우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시기 어린 시선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강헌도 그랬으니까.
그는 혼자서 견뎠지만 그래도 사빈은 부모님이 큰 버팀목이 되어 준 모양이다.
만약 보육원에 살았을 때였다면 사빈이 미웠을 거다. 그래도 네 옆엔 부모님이 있잖아, 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지금은 다행이다 싶다.
차갑고 딱딱한 자신에 비해 사빈은 부드럽고 연약하니까.
문득 두 번째 만남 때, 호텔에서 보았던 그녀의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작고 낡은 사진은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분명 화목하고 밝았다.
“여행 오니까 너무 좋아요.”
사빈의 손가락이 서서히 멀어졌다.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강헌의 미간은 점점 더 좁혀졌다.
“씁. 이거 하지 말아요. 엄청 잘생겨 보여서 자꾸만 보게 된다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 강헌에게 닿았다. 검지로 그의 미간을 콕! 찍는 움직임이 꼭 작은 새가 부리로 콕 찍는 것처럼 보였다.
이젠 별게 다 귀엽게 보인다. 나도 취한 건가.
“그런 얼굴로 화내면 직원들이 넋 놓고 쳐다보지 않아요?”
“내 얼굴을 안 봅니다만.”
“잘생겨서 그래요. 이강헌 씨가 화내고 있는데 얼굴 보고 눈치 없이 웃으면 안 되잖아.”
“취하면 입에 발린 소리를 참 잘하는군요, 천사빈 씨는.”
“입에 발린 말 아닌데. 진심인데.”
사빈은 픽 웃었다.
“근데 뭐, 괜찮아요.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반듯이 펴졌던 강헌의 미간이 또다시 움찔거렸다.
“내 말 안 믿어 줄 거 알았다고요. 별 기대도 안 해서 괜찮아.”
그에게서 손을 뗀 사빈은 바다를 바라보며 잔을 들어 올렸다.
“발리에 와서 너무 좋아요.”
“…….”
“여행 자주 오고 싶다. 성수기 말고 비수기에. 사람들 덜 붐빌 때 와서 여유롭게 지내고 싶어요.”
아니지. 이제는 ‘싶어요’가 아니지.
이강헌 씨가 말했잖아.
결혼을 했으니 이제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아니, 이제 그럴 거예요. 혼밥, 혼술, 혼숙. 맘껏 즐기면서 살 거야.”
그녀의 계획에 강헌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결혼은 그저 인생을 가로막았던 허들을 넘는 수단일 뿐이다.
사빈은 비행기 안에서 떠올렸던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이강헌 씨. 우리 결혼 생활 하는 동안 내 방어막이 되어 주는 거죠?”
“방어막?”
“모임 따위에 참석하는 거, 정말 하기 싫거든요.”
“걱정 마십시오. 나도 같으니까.”
그녀가 빙긋이 웃었다.
“우리가 공통점도 있네요.”
그 말이 어쩐지 강헌의 가슴에 지잉- 울렸다.
“나도 이강헌 씨와 서재희 씨의 방패막이 되어 주고. 이강헌 씨도 내 방패막이 되어 주고. 완전 윈윈.”
그 순간 강헌은 깨달았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재희를 떠올린 적 없다는 사실을.
“어? 혹시 저 사람…… 진우 선배인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강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꽤 비슷하게 생긴 동양인이긴 한데 연진우는 아니다.
근무 중일 호텔 직원이 발리에 와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아닙니다.”
“완전 비슷한데…… 키 크고 팔다리 길고 머리통 작은 게.”
관광객 많은 이곳에 키 크고 팔다리 길고 머리통 작은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웃는 게 이온 음료 광고 모델 같은 것도 완전 똑같은데?”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일본어를 쓰고 있고.”
“아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사빈이 손뼉을 짝! 쳤다.
“진우 선배한테 줄 선물을 사 가야겠다. 내가 갑자기 취해서 많이 놀랐을 거예요.”
저는 한 번도 재희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빈의 머릿속에는 그 선배라는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그리 생각하니 속에서 연기가 가득 피어올라 답답해진다.
재희에게 미안해서일까.
아니면…….
툭.
그때 강헌의 어깨 위로 사빈의 머리가 떨어졌다.
“왜 이러지? 갑자기 이마가 무거워요…….”
완전히 취한 모양이었다.
“으음, 이강헌 씨 향기 좋다. 아빠 냄새가 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안겨 들자 그의 단단한 몸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강헌이 생각지 못한 기습에 놀란 사이, 사빈은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천사빈 씨.”
사빈은 대답이 없었다.
잠든 건가? 이렇게? 이 상태로?
“하.”
모아진 살결이 탐스럽게 솟은 모양에 강헌은 마른세수를 했다.
“고문이 따로 없군.”
***
취한 사빈을 챙겨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강헌은 어깨를 고스란히 내어 주어야 했다.
“천사빈 씨. 호텔에 다 왔습니다.”
“으음…… 벌써요…….”
강헌은 비틀거리는 사빈의 몸을 한 팔로 휘감다시피 감싸 부축했다.
“우리 아빠는 나 다리 아플 때마다 안아 줬는데.”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나 안아 주면 안 돼요? 걷기 싫은데.”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사빈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때도 우리 아빠처럼 해 줬다면서요.”
“……천문호 의원이 생각보다 꽤 다정했던 모양이군.”
그의 중얼거림에 사빈이 비틀거렸다.
“조심……!”
“우리 아빠는 다정했어요. ……와는 다르게…….”
작아진 사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강헌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잘 안 들립니다.”
“안아 주지 않을 거예요?”
‘안다’라는 말의 이중적인 의미를, 이 여자는 알까.
“다른 데서는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안 해요. 이강헌 씨한테만 그러는 거지. 아빠 향기 나니까.”
그녀의 대답에 줄곧 답답했던 속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만입니다.”
“응, 알았어요.”
사빈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숨을 낮게 내쉰 강헌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가슴 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음, 향기 좋다.”
단단한 어깨를 붙잡은 사빈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날 것 같군.’
첫날밤엔 신부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신방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 걸까.
안으로 들어온 강헌은 곧장 마스터룸으로 가서 사빈을 침대에 눕혔다.
“으응, 어디 가요.”
그녀가 떨어지려는 그의 옷깃을 붙잡아 제게로 당겼다.
강헌의 커다란 상체가 사빈의 위로 쓰러졌다.
“나 향기 더 맡고 싶단 말이에요.”
“천사빈 씨, 이거 놓고…….”
사빈이 그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강헌 씨 향기 너무 좋아요.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아.”
양손에 엄마 아빠의 손을 붙잡고 햇빛이 부서지던 바닷가를 걸었던 그때로.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제 귀에 애달프게 속삭이는 사빈 때문에 강헌은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말캉한 살결이 제게 짓눌리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딱 미칠 지경이었다.
‘……돌겠군.’
사람과 이토록 밀접한 접촉을 오래 해 본 적 없던 강헌이다.
재희가 먼저 안겨 와 포옹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밀착해서 오래 닿아 있던 적은 없었다.
“자꾸 이러면 천사빈 씨가 위험해집니다.”
사빈이 그의 목을 안았던 팔을 조금 풀고 얼굴을 마주했다.
“왜요?”
“둘만 있는 공간에서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붙어 있으면 대개는 위험합니다.”
“아아…… 나도 알아요.”
알아? 그런데 이런 짓을 해?
“하지만 이강헌 씨랑 나는 남자랑 여자가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