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17)화 (17/90)

제17화

깎아 놓은 듯 높은 콧대 아래로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술 취해서 그런 얘기까지 했어요?”

“다 해요.”

순간 사빈의 숨이 멎었다.

“천사빈 씨는 그래도 됩니다.”

“……왜요?”

“그러려고 한 결혼이니까.”

수평선을 바라보던 강헌의 시선도 사빈에게로 옮겨졌다.

눈이 마주쳤다.

“술 마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발리에서 칵테일이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호텔 측에서 차량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현지를 즐기고 싶다는 사빈의 말에 택시로 이동했다.

차창 밖으로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예술품들을 구경하는 사빈의 눈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헌이 픽 작게 웃었다.

‘아이 같군.’

미소하던 것도 잠시.

그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사빈이 입은 원피스는 가슴 아랫부분부터 퍼지는 형식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몸에 달라붙어서 몸매가 드러났다.

더 큰 문제는 가슴 부분이었다.

‘너무 많이 파인 것 아닌가.’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옷을 입을 권리가 있었다.

강헌이 뭐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녀와 무슨 사이도 아니고.

허울뿐인 부부일 뿐 우린 남이니까.

자꾸만 시선과 신경이 그리로 쏠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강헌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 저기구나.”

발리의 가로수길이라 할 수 있는 핫한 거리에 위치한 그곳은 여자는 상관없으나 민소매를 입은 남자는 출입할 수 없었다.

다행히 강헌은 얇은 리넨 셔츠를 입고 있었다.

“신기하다, 왜 안 되지? 어쨌든 제가 민소매를 입어서 다행이네요.”

그녀가 말갛게 웃었다.

시큰.

또 슬쩍 욱신거리는 마음에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들어가죠.”

그들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6시쯤부터 일몰을 볼 수 있다는군요.”

“와아, 너무 좋아요!”

사빈이 기뻐하며 또 웃었다.

술렁. 강헌은 메뉴판으로 눈을 돌려 버렸다.

“뭐 마시겠습니까?”

“이강헌 씨가 알아서 시켜 주세요. 전 술을 하나도 모르거든요.”

그는 사빈이 먹을 만한 달달한 칵테일과 자신이 마실 마티니 한 잔을 시켰다.

“배는 안 고픕니까?”

“네, 아직 괜찮아요. 밥보다는 술을 더 마셔 보고 싶어요.”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신난 듯 말하는 사빈을 보고 있자니 또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번엔 웃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부정맥 검사를 해 봐야겠군.’

그들이 주문한 칵테일이 나왔다.

“색깔 너무 예쁘다. 이건 이름이 뭐예요?”

“블루하와이. 도수가 낮고 달아서 천사빈 씨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을 겁니다.”

“발리에 있는데 하와이를 마시니까 기분이 좀 묘하네요. 발리한테 미안해지네.”

귀여운 말에 강헌의 미간이 더욱 굳어졌다.

칵테일을 한 모금 넘기는 사빈의 입술과 희고 긴 목, 그리고 그 아래로 조금 드러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 남성 두 명이 사빈을 슬쩍슬쩍 훔쳐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와, 이거 되게 맛있는…….”

강헌의 손이 사빈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굵은 손가락이 사빈의 아랫입술을 슬쩍 눌러 짓이겼다.

“읏, 이강헌 씨…….”

강헌의 손에 액체가 묻어났다.

“떨어질 것 같아서.”

민망해진 사빈이 냅킨을 건넸다.

“이걸로 닦아요.”

그녀가 건네는 것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강헌이 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져가 슥 핥았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확인. 천사빈 씨가 마시기에 괜찮은지 아닌지.”

“알면서 추천해 준 거 아닌가요?”

“이곳 칵테일은 어떤지 모르니까.”

사빈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칵테일은 꼭 저렇게 시음을 해야 하는 건가?’

그저 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핥았을 뿐인데.

강헌의 모습은 지나치게 색정적이었다.

‘남자가 야할 수도 있구나.’

어쩐지 속이 더워지는 느낌에 사빈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이런 것도 간접 키스에 해당되는 건가? 아니겠지…….’

그런 사빈을 바라보던 강헌의 눈동자가 스르르 옆으로 향했다.

그녀를 훔쳐보던 외국인 남성 두 명이 강헌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제야 불편하던 심기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자신이 옆에 있어도 저렇게 쳐다보는데, 혼자 다녔을 땐 얼마나 많은 시선을 받았을지.

그런 생각을 하니 또 속이 뒤틀렸다. 발리에서 춥지 않느냐며 옷을 덮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럼 이래저래 귀찮게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나니까.

……이 여자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강헌은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사빈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다 사빈의 가슴이 눈에 들어오자 흠칫하며 다시 바다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 해가 지기 시작했어요.”

발리의 일몰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현지 곳곳에서는 일몰을 주제로 한 사진과 그림을 팔고 있었다.

빛을 발하는 태양이 꼭 거대한 오렌지처럼 보였다.

색이 점점 짙어지며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의 면적이 점점 커져 갔다.

오렌지색의 하늘과 아직 짙푸른 바다의 사이에서 서퍼들이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서로에게 기댄 연인들은 키스를 하거나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시간이 더욱 지나자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거대한 빛이 하늘을 온통 물들였다.

강렬했다.

사빈의 인생에서 가장 색채가 선명한 순간이었다.

“이강헌 씨.”

홀린 듯 석양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

“나와 결혼해 줘서.”

이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작은 중얼거림을, 강헌은 놓치지 않았다.

사빈의 말의 의미는 ‘자유’를 말한 것일 테다. 엄한 집안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서 좋다는 뜻이겠지.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심장이 욱신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꼭…… ‘나’와 결혼한 것이 좋다는 것처럼 들려서.

사빈이 일몰을 감상하는 동안, 강헌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본래 낯선 여행지에선 평소와는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지 않나.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사빈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강헌은 불현듯 이 회장의 주문을 떠올렸다.

[둘이 사진 많이 찍어 와라. 써먹을 데가 있을 듯하니.]

평소라면 당연히 귀찮고 싫다 여겼을 아버지의 말을 이번에는 따르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여행지니까.

“사진, 찍겠습니까?”

드디어 바다에서 눈을 뗀 사빈이 고개를 돌려 강헌을 보았다.

“홍보에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회장님께서.”

홍보…….

그치, 이건 계약이니까.

하지만 사빈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거절했을 거다. 기록으로 남는 사진에서까지 가식적으로 웃고 있기가 싫었다.

그렇지만 이 순간을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정말로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요.”

강헌이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서 화면 안에 다 담기지 않았다.

“더 가까이 오겠습니까.”

사빈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로 조금 더 다가갔다.

이번엔 화면 안에 다 들어오기는 했지만 신혼부부라기엔 여전히 좀 어색해 보이는 두 사람.

“조금만 더 가까이…….”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강헌의 팔을 툭 쳤다.

그의 몸이 사빈 쪽으로 기울었고 손가락이 촬영 버튼에 닿았다.

“Gosh, So sorry!”

백인 커플이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강헌과 사빈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깜짝이야.”

“괜찮습니까?”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근데 방금 사진 찍힌 것 같은데. 볼까요?”

흔들린 화면 속에서는 어색해서 어정쩡한 표정과 자세를 한 사빈과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강헌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뭐야……!’

제 모습을 확인한 사빈은 경악했다.

아무리 흔들렸다지만 너무 못생기게 나온 거 아닌가?!

‘말도 안 돼…….’

반면, 강헌은 잘생긴 모습 그대로였다.

높은 콧대는 그대로 담겼고 흔들려서 빗나간 초점은 도리어 그윽한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빨리 지워요. 나만 이상하게 나왔어요.”

“괜찮은데.”

사빈의 눈이 커졌다.

“이강헌 씨 눈에 난 이렇게 보여요?”

그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좌절한 얼굴이었다.

“남들 눈에는 내가 이렇게 보이는구나…….”

작은 한숨이 덧붙여졌다.

하아. 그래도 어떡해. 이렇게 태어난걸.

그래도 사빈은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예쁘다 생각하기로 했다.

이 얼굴에는 엄마 아빠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사빈은 부모님이 못 견디게 보고 싶은 날이면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곤 했다.

“어쨌든 얼른 지워 주세요.”

전문가한테 메이크업을 배워 볼까. 사빈은 제 얼굴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뾰로통해 입술이 톡 튀어나온 그녀를 보고 있으니 강헌은 웃음이 픽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괜찮게 나왔습니다.”

“전혀 위로 안 되네요.”

“평소보다 낫게 나왔는데.”

“뭐라고요?!”

사빈이 발끈하자 강헌이 고개를 숙이며 낮게 웃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멍하니 강헌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봅니까.”

“어, 그게…… 신기해서요. 이강헌 씨는 절대 안 웃을 줄 알았는데.”

“이 사진을 보고 어떻게 안 웃습니까.”

그러자 사빈이 또 발끈했다.

“놀리지 말아요! 흔들려서 그렇거든요?”

저를 노려보는 사빈은 꼭 화난 흰 토끼처럼 보였다.

“그런 걸로 칩시다.”

강헌은 나무 그늘 아래 늘어진 흑표범처럼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사진 안 찍을래요.”

사빈은 블루하와이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리 도수가 낮다지만 술 약한 사람이 그렇게 마시면 취합니다.”

“남이사.”

“천사빈 씨가 취하면 내가 고생하니까.”

윽. 저 사람이 웃으면서 뼈를 때리네.

사빈이 또 곱게 눈을 흘기자 강헌이 픽 웃었다.

“다른 거 또 시켜 줄 테니까 마음 풀어요.”

“내가 무슨 술꾼인 줄 아나.”

“그럼 그만 마시겠습니까?”

“그런 말은 안 했어요. 여기서 제일 비싼 걸로 시킬 거예요.”

“독할 텐데.”

“상관없어요. 고생은 이강헌 씨가 하니까.”

강헌이 직원을 불러 영어로 칵테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왜 도수 낮은 걸로 달라고 해요? 제일 비싼 거 시켜 달라니까.”

“그러다 숙취로 고생합니다. 하고 싶은 거 많다면서요. 내일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으면 억울할 텐데.”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이건 다정한 건지 뭔지.

“농담한 겁니다.”

“……거짓말. 이강헌 씨는 농담 같은 거 안 할 사람처럼 보이는데.”

“안 합니다. 평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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