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처음 맞선을 볼 때처럼 스산하게 낮아진 음성에 사빈이 흠칫했다.
“그 남자요?”
“방에 같이 있던 남자.”
방에 같이 있던 남자라면…….
“진우 선배 말하는 거예요?”
그래, 확실히 그런 이름이었다.
강헌은 이름표에 선명히 새겨진 ‘연진우’라는 글자를 떠올렸다.
“맞는 것 같군.”
“어제 우연히 만났어요. 졸업하고 나서 처음으로 만난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만나지? 생각만 해도 신기…….”
“두 사람이 술을 마신 것 같던데.”
“아, 술은 저만 마셨어요. 룸서비스로 주문했는데, 가지고 온 직원이 선배였고, 샴페인 설명을 들은 뒤에 화이트와인을 한 잔 마셨는데…….”
사빈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다음이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혹시 이강헌 씨가 말한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행동에 선배도 포함되나요?”
“……글쎄.”
읽을 수 없는 강헌의 표정에 사빈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쩜 좋아, 선배한테도 실수한 거 아냐?
‘오랜만에 만나서 이게 무슨 추태람!’
혹시 선배가 동문들과 만나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그러다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나이 차이가 나서 함께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천문호의 아들들도 사빈과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들은 총동문회가 열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사빈의 학과 교수들도 대개가 동문이었고, 심지어 그중 한 사람은 천문호와 동기여서 그녀가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는지 천문호의 귀에 낱낱이 들어갔다.
혹여 실수를 하거나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어김없이 서재로 불려 가 벌을 받곤 했다.
그녀가 알기로 진우도 그런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마음만 먹으면 천문호는 강헌 몰래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강헌에게 집안의 사정을 알려 도움을 청할 수는 없다.
그럼 그에게 약점이 잡히는 것이고, 혹여 천문호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초조할 때면 사빈은 입술을 물어뜯곤 했다. 그러다 비릿한 맛이 안으로 흘러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이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완전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아.”
그때 강헌의 손가락이 사빈의 입술에 닿았다.
“찢어지겠습니다.”
“…….”
“그 남자에게는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사빈이 입술 물어뜯는 것을 멈추고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정말이죠? 하아, 다행이다.”
강헌은 손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닿아도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는군.’
그에게는 도전이었고 시험이었다.
과연 사빈의 어느 부위에 닿아도 불쾌감이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헌에게는 아주 가끔 재희가 슬픈 눈으로 키스를 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을 때가 가장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재희의 입술을 볼 때마다 그때가 떠올라서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왔다.
재희가 더러운 게 아니다.
더러운 건 그놈들이다.
그러나 모든 게 오빠 때문이라며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입 맞추려 들던 재희의 기억이 강헌의 목을 졸랐다.
하지만 사빈은 괜찮다.
이렇게 닿아도, 보고 있어도.
작고 도톰한 입술은 딱히 칠을 하지 않았는데도 붉은 편이었다.
방금 전 이로 깨문 여파가 남아 있어서도 그렇지만, 아침에 씻고 나왔을 때도 꽤나 붉었다.
나뭇가지에 알알이 매달린 열매처럼 귀엽고 앙증맞다.
“그럼 진우 선배한테는 저 실수한 거 없는 거죠?”
하지만 진우, 라는 이름을 담을 때에는 조금…… 못나 보인다. 아주 조금.
“실수는 나한테만 했습니다.”
“아아, 다행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무슨 사이입니까?”
“대학 선배예요. 과는 달랐지만 같은 동아리였어요.”
“그뿐입니까?”
사빈이 여상히 눈을 깜박였다.
“그럼요?”
무해한 눈빛과 표정에 강헌의 가슴이 어쩐지 울렁거린다.
이상한 기분. 그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도착할 때까지 집중해서 봐야 하는 서류가 있습니다.”
강헌은 태블릿을 꺼냈다.
“천사빈 씨는 좀 더 눈을 붙이는 게 좋겠습니다.”
갑자기 냉랭해진 강헌의 태도에 사빈은 어리둥절했다.
이미 태블릿 화면에 몰입한 듯한 강헌의 옆모습을 보던 그녀는 이내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아직 머리가 좀 아팠다.
“그럼 난 좀 잘게요.”
“…….”
아까는 대답 잘 해 주더니. 은근 변덕을 부린다니까.
사빈은 눈을 감았다.
깊은 잠에 빠지기 직전, 그녀는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된 5월의 발리는 무척이나 쨍하고 맑았다.
아침 8시 38분 비행기로 출발한 그들은 약 7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발리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현지 시간으로 2시 정도였다.
“일단 쉬어요. 난 할 일이 있으니.”
물건 던지듯 말을 던진 강헌은 데스크가 놓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야? 원래 변덕이 심한 사람인가.”
분명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좀 다정한가 싶었는데 갑자기 냉랭해졌다.
흠, 마음대로 하라지. 나도 혼자서 할 일이 많으니까.
후우— 숨을 천천히 내쉬는 것으로 기분을 갈무리한 사빈은 마스터룸 안으로 들어갔다.
“음, 좋다.”
들어가자마자 은은한 향기가 사빈의 코를 간질였다.
로비에서 설명을 듣기로는 호텔 측에서 제작한 전용 디퓨저로, 이곳에서만 맡을 수 있다고 했다.
1급 조향사가 발리의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를 담기 위해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에 사 가야겠다.”
캐리어를 활짝 펼쳐 놓은 그녀는 문을 잠그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몰래 샀던 원피스였다.
“널 드디어 입어 보는구나.”
짙은 초록색의 하늘하늘한 민소매 원피스는 사빈의 하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울렸다.
사 놓고 처음 입어 보는 원피스는 생각보다 몸매가 많이 드러났다.
노출을 삼가고 단정한 차림만을 해야 했던 사빈은 제 팔을 매만졌다.
“이렇게 살을 드러낸 건 처음이네.”
어쩐지 좀 허전하다 느낀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괜찮아. 여기엔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까.
음, 근데 가슴이 좀…… 파였나?
“아냐. 아까 보니까 비키니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던걸.”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에 비하면 조금 파인 거지.
여기서 이 정도는 한복이다, 한복.
‘이젠 내가 입고 싶은 옷 마음대로 입을 거야.’
결심한 듯한 얼굴로 일어선 사빈은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마스터룸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기 전.
사빈은 닫힌 방문을 흘깃 바라보았다.
나간다고 알리고 가야 하나?
‘아냐. 또 방해된다고 인상 팍 쓰겠지.’
그녀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고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
화상회의를 끝낸 후.
강헌은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오후 5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왔지만 일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가 아니면 진행이 되지 않는 프로젝트였다.
다행히 이 건만 해결하면 남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
아까는 술렁거리는 제 마음이 당혹스러워서 사빈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고 말았다.
딱히 다정하게 대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놀란 눈으로 저를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이런 사람이었지.’라는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아 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후.”
또다시 마음속에 바람이 불어와 잔잔했던 감정들을 툭툭 건드렸다.
그녀의 눈물을 본 탓일까.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스터룸에 있는 건가.’
당연히 사빈이 호텔 안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맞아 준 것은 사빈이 아니라 그녀의 캐리어였다.
……밖으로 나갔나.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치안이 좋은 곳이라지만 그 작고 여린 여자 혼자서 다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강헌은 사빈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신호가 다 갈 때까지 받지 않았다.
그는 계속 전화를 걸면서 일단 밖으로 나갔다.
풀빌라는 맑고 푸른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
혹여 멀리 갔을까 싶어서 걸음을 서두르던 그는 저 멀리에 우뚝 서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초록색의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사람은 분명 사빈이었다.
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레이스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곧 사라져 버릴 것처럼 투명하고 흰 살결. 처음 봤을 때부터 참 하얗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햇빛 아래 있어 본 적 없는 사람 같다고도.
그녀를 바라보던 강헌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천사빈 씨.”
자신을 부르는 낮은 음성에 사빈이 고개를 돌렸다.
“……?”
무표정한 얼굴을 한 강헌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언제 왔어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강헌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섰다.
“말이라도 하고 나가지 그랬습니까.”
“그럴 틈을 안 줘서요.”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결국 침묵했다. 사빈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강헌 씨는 발리에 와 봤나요?”
“처음입니다. 천사빈 씨는 와 봤습니까?”
“나도 처음이에요. 뉴욕이랑 파리, 런던밖에 안 가 봤어요.”
그마저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 한정된 공간만 다녀왔다. 관광을 할 여유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곳저곳 가 보려고 했는데. 발이 안 떨어졌어요.”
바다를 간 적은 딱 한 번.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셨던 여덟 살 때였다. 그때 봤던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이 여전히 사빈의 기억 속에 선명했다.
“어릴 땐 수평선 너머로 가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엄마 아빠가 지구는 둥글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안 믿었죠.”
“어린아이였으니까.”
그의 말에 어쩐지 뭉클해서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다 좋아합니까?”
“네. 많이 가 보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 많이 가 보면 되겠군요.”
천천히 옮겨진 사빈의 시선이 그의 옆얼굴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