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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연인에게 (15)화 (15/90)

제15화

뭘 봐도 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는데, 지금 사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고 있는데도, 아니, 오히려 잠이 드니 표정이 더욱 풍부해지는 여자였다.

어쩐지 이대로 계속 잠든 사빈의 얼굴을 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그런 스스로가 낯설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때마다 이강헌 씨 잘생김 지수가 더 높아져서 곤란하거든요. 또 어떤 표정을 지으면 잘생겼나, 이것저것 막 시켜 보고 싶어지니까.]

사빈의 말이 떠올라서 강헌은 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앞으로는 미간도 마음대로 찌푸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으으.”

사빈은 이마를 짚으며 힘겹게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잠시간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고 있던 사빈은 천천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향했다.

다행히 어제 스파숍에 다녀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신부 화장을 한 채 그대로 잠들었을 뻔했다.

오늘은 신혼여행을 가는 날이다. 대충 씻고 준비를 해야 했다.

‘술을 마시면 이렇게 괴로운 거구나.’

하지만 어제 마실 당시에는 좋았다.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 이래서 사람들이 그렇게들 술을 찾는가 싶었다.

처음 마셨던 샴페인이 가장 맛있었다. 역시 권해 주는 것을 마시니…….

물소리가 뚝 끊겼다.

얼굴을 적신 물줄기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어제 술을 권해 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진우 선배!”

사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지? 어제 실수를 하지는 않았나?

아무리 떠올려 봐도 머리만 아플 뿐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이게 바로 블랙아웃이라는 걸까.

‘큰 실수를 했으면 어쩌지?’

그러다 천문호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윽.”

갑자기 머리가 웅웅 크게 울렸다. 심호흡을 한 사빈은 일단 얼른 씻고 나와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냥 이대로 다시 자고 싶다.

하지만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면 안 된다. 집안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행위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추라도 달린 듯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납니다.”

강헌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후우, 하고 낮게 숨을 내쉰 사빈이 입술을 뗐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강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500밀리리터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

“지금 출발해야 하나요?”

고개를 끄덕인 그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빈에게 생수병을 내밀었다.

“마셔요.”

“아…… 고맙습니다.”

생수병을 받자마자 손이 아래로 툭 떨어질 것 같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10킬로그램짜리 아령을 쥔 기분이었다.

생수병을 떨어뜨리는 민망한 상황은 간신히 넘겼으나 뚜껑을 따는 것이 문제였다.

‘왜 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거야……!’

입술을 깨문 사빈이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려 할 때.

스윽.

그녀의 손에서 병을 가져간 강헌이 아주 손쉽게 뚜껑을 연 뒤 다시 사빈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민망해 죽을 것 같아서, 얼른 물을 안으로 넘겼다.

“콜록콜록!”

그러다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미간을 좁혔던 강헌은 이내 힘을 풀고 그녀의 손에서 생수병을 빼낸 뒤 침대가에 앉아 사빈의 등을 쓸어내렸다.

‘……!’

콜록거리는 와중에도 놀란 사빈의 눈이 커졌다.

“고, 고맙…….”

“숨 천천히.”

강헌의 손길에 사빈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옷 갈아입고 나와요. 캐리어는 내가 챙길 테니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강헌은 무심히 방을 나섰다.

타악.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사빈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비집고 들어온 또 다른 생각.

‘……은근히 다정하구나.’

***

혼몽한 사빈을 챙겨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한 강헌은 무사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 마시고 싶습니까?”

사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헌은 승무원을 불러 물을 청했다.

“천천히 마셔요.”

그의 말을 따라 천천히 물을 마셨지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손이 떨려서 흘리고 말았다.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투명한 액체가 꼭 어젯밤에 흘린 그녀의 눈물처럼 보였다.

강헌은 말없이 냅킨으로 사빈의 턱을 슥 닦아 주었다.

“제, 제가…….”

“냅킨도 흘리려고 그럽니까?”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손길은 섬세했다. 그래서 사빈은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좀 더 자는 게 좋겠습니다.”

“저어.”

강헌이 무감정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혹시 제 술버릇이 좋은 편이었나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짧은 숨을 내뱉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 그냥. 이강헌 씨가 어쩐지 좀…… 잘 챙겨 주는 것 같아서요.”

순간 싸늘해진 그의 눈빛에 사빈이 어깨를 움츠렸다.

“으음,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프네.”

반은 모면하려는 마음, 반은 진심이었다. 사빈이 눈을 감고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많이 아픕니까?”

“정말 내 술버릇이 괜찮았나 봐요. 나빴다면 이렇게 챙겨 줄 리가 없는데.”

“베스트 파트너.”

그가 불쑥 내뱉은 말에 사빈이 눈을 번쩍 떴다가 이내 찡- 울리는 머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강헌의 굵은 손가락이 그녀의 미간을 꾹 눌렀다.

“어? 지금 뭐 하시는……?”

“어제 나한테 이랬습니다. 천사빈 씨가.”

“내, 내가요?!”

강헌이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

“예.”

깔끔하고 단호한 대답에 사빈은 무안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다른 사람 얼굴에 함부로 막 손대고 그러지 않는데…….”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강헌은 미소가 새어 나가려는 것을 참았다.

그래, 이런 것을 귀엽다고 하는 것인가 보다.

사빈의 말대로 그들은 꽤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듯했다.

줄곧 이런 사람을 찾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과 줄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사이.

“어제 많이…… 불쾌했어요?”

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 사빈의 모습에 또 헛웃음 비슷한 게 나오려 했다.

그걸 참으려니 강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꼭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사빈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제가 술을 어제 처음 먹어 본 거라…… 그냥 달달한 주스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기억이 끊겼어요.”

“술을 처음 마셔 봤습니까?”

“네. 근데 되게 맛있더라고요.”

슬며시 눈동자를 올리니 강헌이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제 안 마실게요.”

“집이 많이 엄한가 봅니다.”

순간 사빈의 몸이 흠칫 굳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강헌은 미간을 좁혔다. 또 어제 같은 얼굴이다. 세상의 시름을 다 알아 버린 것 같은 표정.

“술. 또 마시고 싶습니까?”

“아, 아니에요.”

사빈이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혹시 만약 내가 잘못 행동하면…… 이강헌 씨가 아버지께 다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 어쩌지.’

분명 불려 가서 벌을 받을 텐데.

사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술 마십시다. 발리에서 첫날밤에.”

“정말요? 정말 나랑 술 마셔 줄 거예요?”

커다래진 눈을 보니 강헌은 반사적으로 미소가 나오려 했다. 같이 술 마시는 게 뭐라고 저리도 격하게 반응하는지.

어젯밤 이후로 몸이 고장이라도 난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될 정도였다.

“역시 내 술버릇이 꽤 괜찮았던 거죠? 혼자 침대로 걸어가서 조용히 잠들었다든가.”

“만약 어제 호텔방 안에 폐쇄 회로가 있었다면 천사빈 씨는 내게 말을 걸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을 테니까.”

사빈은 어떻게든 기억을 쥐어 짜내 봤지만 떠오르는 게 요만큼도 없었다.

“아무리 해도 기억이 안 나요.”

“천사빈 씨한테는 다행인 일이군요.”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러지?

강헌의 굳은 표정을 보건대 좋지 않은 짓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행동은 정반대로 다정하지 않나.

“그럼 왜 이렇게 잘 해 주는 거예요?”

제 눈치를 보는 그녀를 보니 어쩐지 놀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 또한 강헌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투쟁하듯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며 살아온 그였다. 이런 가볍고 간질거리는 생각 따위를 할 시간은 없었는데.

사빈은 한순간에 자신을 유치하게 만드는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도 자꾸 눈길이 가는…… 정말 이상한 사람.

“그쪽이 날.”

강헌의 고개가 비뚜름하게 기울어졌다.

“덮치려 했습니다.”

순간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가…… 뭘 해요?”

“곱게만 자라서 이런 표현은 모릅니까?”

곱게만 자랐다는 말에 사빈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강헌의 말에 곧 다시 풀리고 말았다.

“안아 달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안고 싶다고.”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사빈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제가 그쪽한테요?”

“천사빈 씨가, 내게.”

내가?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살면서 한 번도 내뱉어 본 적 없는 말인데?

“거, 거짓말!”

사빈은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취했대도 그렇지, 제가 그런 말을 절대로 할 리가 없어요!”

“어제 술을 처음 마셔 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술은 진심과 본심을 드러내 주죠.”

뭐, 뭔심과 뭔심?!

“떨어지지 않겠다면서 내 목을 끌어안고 놔주질 않더군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는 수 없이 천사빈 씨를 안아 든 채로 얼마간 있어야 했습니다.”

사빈의 머릿속이 그대로 뚝 멈춰 버렸다.

거짓말, 말도 안 돼!

저 남자가 말하는 사람이 정말 나 맞아?

믿을 수 없어!

“내가 기억 못 한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죠?”

“그렇게 한가해 보입니까, 내가?”

……그건 아니다.

강헌은 장난과 농담을 즐길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얼어 버린 그녀를 보며 속으로 슬며시 웃던 강헌은 이내 떠오른 얼굴에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건 그렇고, 물어볼 게 있는데.”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서 내 정신을 부숴 버리려나.

사빈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마음의 준비를 더 해야 하나요?”

“사생활에 관여하려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로서 서로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만약의 사태에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건데.”

그답지 않게 서론이 길어서 사빈은 눈을 고쳐 떴다.

사생활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 거지?

“어제 그 남자는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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