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사빈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이대로 얼마간 더 안고 있어도 괜찮을 만큼 가벼웠다.
“아주 조금만 더.”
어쨌든 미안한 짓을 먼저 했으니까, 속죄하는 셈 치고.
‘내 인생은 속죄의 연속이군.’
강헌이 쓰게 웃던 것도 잠시.
“으응, 고마워요.”
사빈이 그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따스한 온기를 지닌 작은 동물이 품을 파고드는 듯한 모양새였다.
강헌은 그대로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이상했다.
가슴 한쪽에 뜨거운 밤과 차가운 낮이 동시에 펼쳐지는 기분.
그 사이 한가운데 벌어진 아주 작은 틈새로 몸을 작게 만 사빈이 꾸역꾸역 들어오는 듯해서 강헌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덟 살 이후로 처음이야. 누가 이렇게 안아 줘서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거.”
“…….”
“어릴 땐 발이 땅에 닿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하도 안겨 다녀서.”
천 의원 부부가 사빈을 많이 아끼긴 한 모양이다.
강헌은 누군가에게 안겨서 발이 들린 기억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예쁘다, 사랑한다, 소중하다, 매일매일 속삭여 주었는데. 멋진 우리 아빠랑 예쁜 우리 엄마가.”
“……부모님이 많이 아껴 준 모양입니다.”
“응, 맞아요. 우리 엄마 아빠는 나밖에 몰랐어.”
사빈이 배시시 웃었다.
“내가 크레파스로 선만 그어도 화가라고 호들갑 떨었고, 연필로 한 글자만 써도 소설가가 될 거라고 난리를 쳤어요. 수영장에서 발장구 한 번 쳤다고 수영 선수로 키워야겠다고 야단법석 떨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부끄러워.”
사빈이 피식 웃었다.
“나 엄청난 맥주병이거든요. 튜브 없이는 물에 뜨지도 못해. 물속에 들어가면 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어.”
“……그렇습니까.”
“우리 딸 천재라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녀서, 그때 내 얼굴은 내내 빨갰어요.”
강헌의 목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사빈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으음, 이강헌 씨 냄새 좋다. 꼭 우리 아빠 냄새 같아.”
천 의원이 나와 비슷하다고? 향수를 쓰지 않는 듯한데.
지난번 상견례 자리에서 보았을 때 천문호에게서는 아무런 향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야 맡아지는 냄새도 있는 법이다.
어쨌든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 천문호와 자신이 비슷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니, 강헌은 그저 신기하다 여겼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우리 아빠도 이렇게 시원하고 포근하고 단단한 냄새였어요. 꼭 향기로운 나무 같은 냄새.”
“지금은 달라졌습니까?”
그 말에 사빈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지금은 어떨지. 안겨 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여전히 딸에게 다정해 보이는 천 의원이지만 집안에서는 의외로 엄격할지도 모르겠다고 강헌은 생각했다.
“지금은 안아 주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그 말에 사빈의 눈에 서서히 차오른 눈물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은 못 안아 줘요. 아빠가, 아빠는…… 흑…….”
“천사빈 씨, 웁니까?”
사빈을 침대에 앉힌 강헌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그녀를 살폈다.
투둑, 툭.
투명한 눈물방울이 계속해서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강헌은 난감했다. 우는 사람을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할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
일단 눈물을 닦아 주려는 생각에 티슈를 뽑으려는데, 사빈이 손등으로 제 눈가를 쓱쓱, 세게 닦아 냈다.
“이강헌 씨.”
“잠깐, 이걸로 닦아요. 내일 많이 부으면 어쩌려고.”
“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거예요.”
그녀가 몽롱한 와중, 강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려 노력했다.
“난 어릴 적부터 결혼을 엄청나게, 진짜 무지 많이 하고 싶었어요.”
“……그랬습니까?”
“네. 여덟 살 때부터요. 그러니까 협조해 줘요.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탔으니까요.”
사빈이 그의 옷깃을 더듬더듬 붙잡았다.
“나만 믿고 따라와요. 나랑 결혼한 거, 절대 후회하지 않게 제대로 망봐 줄 테니까.”
사빈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어떻게든 강헌과 눈을 맞추려 노력했다.
시야가 잘게 흔들렸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조도가 낮은 스탠드 불빛만이 아니었다.
강헌의 얼굴도 이 공간을 밝히는 데 일조했다.
반듯한 이마와 우뚝하고 수려한 콧날, 굳게 다물린 입술.
마주치면 쉽게 눈을 돌릴 수 없는 매혹적인 눈동자.
실은, 맞선 자리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그래, 연예인을 보는 기분 같달까.
드라마 속 서재희를 보며 감탄했던 것처럼, 호텔 카페에서 제 앞에 앉아 있는 강헌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더럽게 잘생겼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하고.
“난 이강헌 씨 외모가 마음에 들어요.”
움찔거리는 그의 눈썹을 보며 사빈은 또 생각했다.
무슨 눈썹도 잘생겼어, 이 남자는? 틈이 없네, 틈이.
성격이 좀 딱딱하고 이따금 재수 없는 것만 빼면 괜찮을 텐데.
“그리고 서재희 씨 외모도 내 타입이에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어허.”
사빈이 검지로 구겨진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이거 하지 마요.”
“…….”
“이럴 때마다 이강헌 씨 잘생김 지수가 더 높아져서 곤란하거든요. 또 어떤 표정을 지으면 잘생겼나, 이것저것 막 시켜 보고 싶어지니까.”
“……하.”
“그렇다고 걱정은 마요. 잘생긴 사람 보면 다들 이런 감정 느끼니까. 이강헌 씨가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란 말이죠. 오케이?”
헤헤, 하고 사빈이 맑게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아무런 경계심도, 계산도 없이 그저 순수한 웃음이었다.
‘무해하다.’
사빈을 보고 떠오른 동사였다.
결혼을 계약이라 표현하며 조건을 내건 사람인데도 속물적이라거나 철저히 실리를 따지는 거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참 이상하게도.
천사빈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내 눈에 보기 좋은 이강헌 씨랑 서재희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나도 행복할 테니까요.”
“……무슨 논리인지 도통 모르겠군.”
“내가 조금이라도 걸리적거리면 이강헌 씨는 날 싫어할 거고, 그럼 어찌 됐든 안 보고 살 수 없는 우리는 불행해질 거 아니에요. 난 그런 거 싫어요.”
작고 붉은 입술이 오물오물 잘도 움직인다.
“같이 있을 때 재미있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불쾌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런 건 충분히 겪었으니까.”
과거에 누군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불행하다고 했던 적이 있었나.
“난 세상의 모든 연인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왜인 줄 알아요?”
강헌이 알 턱이 없었다.
“신이 이런 마음을 예쁘게 여겨서 나한테도 좋은 인연 점지해 줄까 봐서요. 되게 계산적이죠.”
사빈이 힘없이 웃었다. 강헌은 어쩐지 가슴이 스산하게 저미는 듯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을 여자가 어째서 이런 쓸쓸한 얼굴을 하는 것일까?
도무지 천사빈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눈길이 가고, 작은 호기심이 생겼다.
이 쓸쓸함의 근원은 뭘까.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꼭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견뎌 낸 눈빛을 하고 있다.
“그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지 못하면 일정에 차질이 빚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회장이 자신뿐만 아니라 사빈도 들들 볶을 것이 뻔하다.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말이다.
재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강헌 씨.”
사빈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해요.”
작고 하얀 손이 자신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최고의 파트너가 될 거예요, 우리는.”
“…….”
“난 제대로 망봐 주고, 이강헌 씨는 내 자유를 보장해 주고. 어때요?”
사빈이 내민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살짝 웃었다.
이럴 땐 또 풍파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 어린애 같다.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는 강헌이 답답했던지 사빈이 먼저 그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계약 성사. 땅땅. 오케이?”
취한 그녀의 입에서는 평소의 차분한 얼굴로는 절대로 내뱉지 않을 것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피식 웃었다.
“어어? 이강헌 씨, 지금 웃은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뜬 사빈을 보며 강헌의 입매가 조금 더 늘어졌다.
“천사빈 씨는 술을 마신 쪽이 더 낫습니다. 평소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잔뜩 경계하는 모양새라.”
“나도 이강헌 씨가 웃는 쪽이 훨씬 좋아요. 평소엔 너무 무뚝뚝하고 무서운 로봇처럼 보여.”
강헌이 그녀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렇게 보였나.
“신혼여행 갔다 오면 지금보단 자주 웃어 주세요. 난 이강헌 씨의 조력자니까.”
“……노력해 보죠.”
“좋아요. 계약 완료.”
사빈이 손을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그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또 기울어졌다.
“조심……!”
사빈이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실은 아까부터 눈꺼풀이 내려왔거든요. 솔솔……. 근데 이강헌 씨 가슴 진짜 넓네요…… 완전 침대…….”
그녀의 고개가 푹 꺾이더니 이내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헌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아까는 아버지의 전화 때문에 정신없이 나가느라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직원들의 시선 때문에 사빈을 가볍게 끌어안았을 때, 분명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재희의 일을 목격하게 된 충격으로 강헌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게 되었다.
심지어는 재희가 요구하여 아주 잠깐 안아 줄 때에도 얼른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 접촉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였을까?
사빈과 닿았을 땐 본능적으로 느껴지던 불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제게 꼭 안겨 잠든 사빈을 내려다보면서 강헌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럴 수도 있는 건가…….”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정말 베스트 파트너를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빈에게 사용인을 속여야 한다는 이유로 먼저 스킨십을 제안한 것은 강헌이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숨 막히는 거부감과 엄청난 용기를 동반하여 내린 결단이었다.
그래야 재희를 보호하는 동시에 사빈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으니까.
“으음.”
미간을 살짝 찌푸린 사빈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으…….”
이리저리 작게 뒤척이던 사빈은 편한 자세를 찾고는 그제야 미간을 바르게 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있던 강헌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작은 동물이 잠투정을 하는 것 같지 않나.
“……이런 게 귀엽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