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13)화 (13/90)

제13화

혼자 온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사빈이 생각하는 와중에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정말로 여기 와서 내 생각 안 났어?”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 중에서도 진우는 돋보이는 존재였다.

183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몸, 소년미를 간직하고 있는 잘생긴 외모와 장난스러운 성격 등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세운그룹 회장의 막내아들이다.

세운은 세운백화점을 전신으로 한 기업으로, 유통과 마트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현재는 ‘대한민국의 식탁을 책임지는 기업’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

진우의 이모는 현 서울 세인트마리아 호텔의 사장이고, 이모부는 주요 신문사의 사주였다.

기조그룹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재벌가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집안이었다.

“자랑하려는 마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호텔 지나가거나 이름 들을 때마다 나 생각 난다는 연락 많이 받았거든.”

“아아…….”

다른 시기에 비해 대학 시절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그랬다는 얘기다.

고등학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성적이 떨어지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며 공부하기 바빴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천문호는 창고에 가두고 하루 동안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차갑고 어두운 곳에 홀로 갇혀 있는 순간은 더없이 고독하고 슬펐다.

사빈의 표정에 진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맸다.

“미안해,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야. 응?”

“선배.”

진우가 긴장하며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당장 나가라고 하려나? 그때처럼 앞으로 말 걸지 말라고 하면 어쩌지…….

“술, 설명해 주세요. 저 하나도 몰라서요.”

사빈은 화제를 돌렸다. 대학 시절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을 읽어 낸 진우는 애써 미소 짓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하나 골라 봐.”

사빈이 고른 것은 붉은 병의 샴페인이었다.

“이건 쿠퍼리라는 샴페인인데, 프랑스에서 4대째 내려오는 전통 있는 놈이야.”

차갑게 칠링된 샴페인을 기울여 잡은 진우가 뚜껑을 능숙하게 따 냈다. 폭! 소리와 함께 드라이아이스 같은 연기가 입구를 통해 사르르 흘러나왔다.

투명한 금색의 액체를 2/3 정도 따라 낸 진우가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자, 마셔 봐.”

너무 달지 않으면서도 깔끔한 맛의 액체가 목 안을 타고 흘렀다.

“어때?”

“맛있어요!”

사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진우가 떨리는 마음을 모른 체하며 씩 웃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음회를 시작해 볼까?”

***

호텔로 돌아가는 길.

신호를 받고 서 있는데 한 가게 앞에 세워 둔 스탠드 간판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말 못 할 마음을 전하세요.

- 엔젤스 가든

꽃집의 이름을 보니 사빈이 떠올랐다.

“……천사빈.”

강헌은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가볍게 들뜬 깃털이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는 느낌이 드는 발음이었다.

꽃집을 보고 있던 그의 눈에 연분홍색의 장미가 들어왔다. 어딘가 사빈과 닮아 있는 듯했다.

강헌은 꽃집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서 꽃다발을 주문했다.

그답지 않게 꽤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호텔 직원들의 눈도 있으니까.’

단지 그런 이유다.

그 외 다른 이유는 없다.

강헌은 조금 강박적으로 되뇌었다.

꽃다발보다 먼저 도착한 강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첫날밤을 보낼 스위트룸의 벨을 눌렀다.

- 누구십니까?

예상치 못한 남자의 목소리에 그가 흠칫했다.

사빈에게도 남자가 있었던 걸까.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해도 강헌은 아무런 불만도, 이의도 가져서는 안 됐다.

첫날밤에 호텔을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온 것이나, 반대로 호텔 룸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단지 놀랐을 뿐이다.

사빈에게서 남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기에.

“……천사빈 씨는 안에 없습니까.”

- 있는데…… 잠시만요. 사빈아, 밖에 누가…… 이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강헌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유니폼을 입은 남자 직원이 나온 것이다.

“뭡니까.”

“아, 사빈이가 룸서비스를 주문해서 왔다가…… 커억!”

강헌이 거칠게 진우를 밀치고 안으로 다급히 들어갔다.

“누가 왔다고오……? 어라.”

헤헤. 사빈이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웃으며 손가락으로 강헌을 가리켰다.

“이강헌 씨네.”

“…….”

“내 남편.”

강헌도, 황급히 강헌의 뒤를 따라 들어온 진우도 모두 숨을 흡, 들이켜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남편……?”

진우가 황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오늘 결혼했다는 유명 인사가 너였어?”

정신을 차린 강헌이 고개를 홱 돌려 진우를 노려보았다.

“당신 뭡니까.”

연진우.

이름표를 확인한 강헌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아, 저는…….”

“선배, 다음에는 뭐 마셔 볼까요? 아, 이게 맛있다고 했나?”

와인 병으로 뻗어 가던 손이 허우적거렸다. 홈바(home bar) 의자에 앉아 있던 사빈의 몸이 순간 뒤뚱, 기울었다.

“천사……!”

진우보다 빠르게 반응한 강헌이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받아 냈다.

“엄청 일찍 왔네요?”

“뭡니까, 이 상황.”

“먹고 싶은 거 룸서비스로 다 시켰어요. 내 로망이었거든요. 자유롭게 술 마셔 보는 것도.”

사빈이 힘없이 웃었다. 어쩐지 쓸쓸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곱게 자란 사람이 지을 법한 미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사빈이 그의 옷깃을 붙잡고 흔들어 댔기 때문이다.

“왜, 안 돼요? 난 이런 것도 하면 안 되나?”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재희가 그런 일을 당한 이후로 그는 이런 상황에 극도로 민감했다.

강헌의 서늘한 눈동자가 스륵 진우에게로 향했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눈이 커다래진 진우가 다급히 입을 열었지만 사빈이 더 빨랐다.

“하나도 안 위험한데요? 그래서 일부러 룸서비스로 시킨 건데. 세상에서 가장 안 위험한 사람이 가져왔는데.”

하하, 이걸 좋아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사빈의 말에 타격을 입은 것도 잠시,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는 차가운 시선에 진우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빈이와 같은 학교를 다닌 연진우라고 합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거 절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선후배 사이라지만 엄연히 공적인 시간 아닙니까. 이 지경으로 취하게 두다니, 호텔 유니폼을 입고 대체 뭐하는 겁니까.”

강헌이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진우는 억울했다.

처음 샴페인을 마시고 그다음으로 화이트와인을 맛보기로 했다.

맛있다며 한 잔을 다 비운 사빈은 옆에 있는 다른 와인을 골랐고, 그 한 잔을 마시는 순간.

갑자기 취해 버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정말 갑자기 말이다!

갑자기 손등에 턱을 괴더니 갑자기 헤실헤실 웃으며 갑자기 아무 말이나 해 대기 시작했다.

겨우 15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술이 이렇게 약할 줄 누가 알았겠나.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그때 사빈이 진우에게 손짓했다.

“선배, 빨리 와서 앉아요. 아, 그쪽도 한 잔 할래요?”

저를 올려다보는 사빈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얼굴을 굳힌 강헌이 사빈을 번쩍 들어 안았다.

“앗……!”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강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읏, 머리가 빙빙 돌아요오…….”

“이만 나가 보십시오. 오늘 일은 나중에 반드시 해명해야 할 겁니다.”

진우를 차갑게 노려보며 강헌이 사빈을 안아 든 채 몸을 돌렸다.

침실로 가기 전.

“이곳으로 꽃다발이 하나 올 겁니다. 그거 알아서 처리하세요.”

말을 마친 강헌은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진우가 참아 왔던 숨을 길게 터트렸다.

“……하. 미치겠네, 진짜.”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다.

미국에서 들어오자마자 호텔로 붙잡혀 와서 노동하던 중, 좋아하던 후배와 운명처럼 재회했다.

그녀가 결혼한 날.

첫날밤을 보낼 스위트룸에서 말이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었다.

진우는 힘 빠진 표정으로 카트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속이 뻥 뚫린 듯 공허하면서도, 사빈을 안고 들어간 남자에게 질투가 났다.

그러다 슬퍼졌다.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내야 하는 건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니.

오늘 사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은 그 공식을 피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만이었다.

밖으로 나서는 진우의 표정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

침실로 들어온 강헌은 사빈을 침대에 눕히려 했다.

“저기이.”

“…….”

“이강헌 씨이.”

“……왜 부릅니까.”

“나 조금만 더 안아 주면 안 돼요?”

그가 멈칫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아닌지 순간 헷갈렸다.

“뭐라고…… 했습니까?”

“어릴 땐 엄마 아빠가 이렇게 자주 안아 주곤 했는데…… 더는 그럴 수가 없어서요…….”

그야 그렇겠지. 이렇게 다 커 버린 딸을 어떻게 번쩍번쩍 안아 든단 말인가.

의외로 어리광이 많은가 보다. 취하면 본심이 드러나니까.

“안 될까요……? 아빠가 안아 줬을 때랑 엄청 비슷해서 기분 좋은데.”

“…….”

“진짜 오랜만인데. 이런 기분. 이런 마음.”

평소의 강헌이라면 단박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빈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애처로움과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져서 쉽게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강헌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

보육원에서 자라던 시절.

평소엔 친하게 지내던 어린 동생들이 무척이나 싫어지던 때가 있었다.

강헌은 무척이나 어른스러운 아이였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였다. 어른의 따뜻한 품 안에 안겨 있을 때의 그 포근함과 보호받는 기분에 무척 행복했다.

하지만 점점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 원장 선생님의 품을 양보해야 했다.

교복을 입는 나이가 되었을 땐 그런 마음은 없는 척 행동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른에게 안겨서 위로받고 싶은 어린아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사빈도 그러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매정하게 침대 위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강헌은 지난번 횡단보도 앞에서 그녀에게 졌던 신세를 갚는 셈 치기로 했다.

“아주 조금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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