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12)화 (12/90)

제12화

강헌은 늘 자책했고, 재희에게 죄스럽고 미안했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연인이란 이름으로 곁에 있어 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재희가 가장 원하는 것은 줄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재희는 여자가 아니라 지켜 주어야 할 여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재희와 닿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날이 갈수록 죄책감은 커져 갔고, 재희와 닿을 때마다 자꾸만 영상이 떠올라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속죄를 해야 했다.

재희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러다 문득 강헌은 떠올렸다. 호텔 스파숍에서 사빈을 가볍게 끌어안았을 때는 아무런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을.

***

사빈이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바로 ‘혼술’이었다.

바로 지금이 기회다.

강헌은 어쩐지 오늘 돌아오지 않을 것 같고, 또 이곳은 호텔 룸이니 안전하다.

“샴페인으로 시작해서 화이트와인으로 넓혀 가 보자. 아직 레드와인은 좀 이른 것 같으니까……. 아냐, 그냥 다 마셔 보지 뭐.”

다시 객실에 비치된 태블릿을 집어 든 사빈은 이것저것 주문하기 시작했다. 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 이름과 설명만 보고 끌리는 것을 죄다 골랐다.

얼마 뒤, 벨이 울렸다.

- 룸서비스입니다.

카디건을 걸친 사빈은 네,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주문하신…….”

서로를 바라본 직원과 사빈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천사빈?”

“……선배?”

선배라 불린 직원이 하, 하고 짧은 숨을 뱉었다.

“연진우 선배, 맞죠?”

“……그래, 맞다.”

진우가 중얼거렸다. 이모가 말한 선물이 이거였나.

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사빈을 보며 씩 웃었다.

“오랜만이다, 천사.”

사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예요.”

“왜, 네 별명이잖아. 실제 성격은 천사가 아니라는 걸 나만 알지만.”

그 사실이 썩 흡족한 듯 미소를 짓던 진우가 별안간 고개를 숙였다.

“왜, 왜 이러세요?”

“그날 미안했다.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꼭 사과하고 싶었어.”

“그, 그만하세요, 선배!”

사빈이 난감한 표정으로 재차 만류했지만, 진우는 자신이 용서해 줄 때까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을 작정인 듯했다.

“이미 오래 전 일이에요. 전 다 잊었어요.”

“난 안 잊었어.”

진우의 머리가 아래로 더욱 내려갔다.

“처음 봤으니까. 네가 우는 거.”

***

그들은 학과는 달랐지만 같은 클래식 연주·감상 동아리 ‘인하모니’ 소속이었다.

사빈은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고 누구에게 싫은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높낮이 없이 일정하게 얘기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말이다.

깔깔거리며 웃어야 할 때도, 화를 내어야 할 때도 사빈은 늘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모습을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렇게 작은 흥미가 일어서 이따금 그녀에게 시선을 던지게 되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사빈의 눈빛은 때때로 생기로 반짝였다. 대개는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마치 그곳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괴리감을 우연히 발견한 후로 진우는 사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가지만 실은 고양이처럼 앙큼하고, 때론 햇살처럼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빈이 재미있어서 늘 쿡쿡 찌르고 건드렸다.

그렇게 모두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사빈이 유일하게 ‘님’ 자를 빼고 선배, 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을 때쯤.

끝자리가 짝수로 끝나는 해의 종강 때마다 클래식 연주회가 열렸다. 가족, 친구들을 모두 초대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인하모니’ 소속 부원들은 대개 유력가 집안의 자제가 많았다.

꼭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있는 집 애들이 가입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때문에 연주회는 부원들의 실력을 내보이는 자리임과 동시에 부모들이 안면을 틔우고 대화를 나누는 교류회장이기도 했다.

4학년이 된 사빈이 두 번째로 연주회에 참가하던 날, 천문호와 추연실도 자리했다.

그때 진우가 사빈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도 되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재작년에도 생각했는데. 널 보는 네 부모님의 눈빛이 조금 이상해.”

사빈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입으로는 되게 아끼는데 눈빛은 반대인 것 같아.”

이렇게 말하면 사빈은 또 발끈할 거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다들 안 그러는데 왜 선배 혼자만 저를 못 건드려 안달이냐고.

바로 그게 사빈과 가까워질 수 있던 이유였다.

모두들 얌전하고 조용하며 천문호 의원의 딸인 사빈을 어렵게 여겼지만 진우만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놀려 댔다.

사빈에게 특별한 존재이고 싶었다.

그 작은 머릿속에 콱 박히고 싶었다. 게다가 요즘 집에서 유학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이대로 다른 나라로 가 버린다면 사빈이 영영 저를 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버를 좀 했다. 연진우 생애 가장 뼈아픈 순간이었다.

“솔직한 느낌을 표현하자면, 밖에서 데리고 들어온 애 취급하는 것 같달까?”

아무리 심한 장난을 쳐도 발끈하고 말았던 사빈이다.

그런데…….

“우리 집 사장님, 사모님도 내가 속 썩일 때마다 죽일 놈, 살릴 놈 하는데. 그래도 저렇게 쎄한 눈빛으로 쳐다보지는 않…… 야, 천사빈, 너 울어? 우는 거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사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진우가 황급히 따라가 붙잡았지만 그녀는 손을 뿌리쳤다.

“다시는, 다시는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울음이 섞여 흔들리던 목소리가 어찌나 애처롭던지.

그녀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아무리 연락해도 사빈은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사빈은 미술관에서 인턴을 시작했기에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유학 준비에 바빴던 진우는 결국 그녀를 만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렇게 헤어졌다.

***

그리고 지금 다시 만났다.

꼭 운명처럼.

“내내 생각했어. 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말이야.”

사빈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천문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고, 자신의 연주회가 끝난 오후에는 큰오빠의 생일을 기념하여 사진관에 들러 가족사진을 촬영한다고 했다.

“오늘은 우리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거니까 그리 알거라. 사람들에게는 인턴십 때문에 아쉽게 참석하지 못했다고 할 테니.”

아침에 나올 때 제게 툭 던진 천문호의 말에 사빈은 순간 부모님의 부재를 새삼 커다랗게 실감했다.

자신도 ‘우리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족사진을 촬영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사빈이 ‘우리 가족’이라고 부를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그것 때문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찰나에 진우의 말을 들으니 평소완 다르게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았다.

‘밖에서 데리고 온 애’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던 날이었다.

“다 지난 일인걸요.”

“사과…… 받아 주는 거야?”

“네. 그날은 저도 예민했어요.”

진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내가 말이 너무 심했다. 내가 백번 잘못했어. 그대로 유학을 가 버리면 네가 날 잊을까 봐 오버를 좀 했다. 천사빈 뇌리에 탁! 꽂히고 싶어서 치기 어린 마음에.”

전부터 진우가 저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사빈은 알고 있었다.

어디 사빈뿐이랴. 동아리 사람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죄다 알고 있었다. 다만, 사빈은 진우의 관심이 이성적인 관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기엔 늘 장난만 쳤고, 미묘한 분위기가 생성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사빈의 생각에는 그랬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진우가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는 것을 사빈이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아니. 잡혀 왔어. 미국에서 들어오자마자 남해로 내려가서 농땡이 피우려던 계획을 딱 들켜 버렸거든.”

“남해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도 될까? 주류 설명도 할 겸.”

망설이던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모르는 직원이 왔더라도 안으로 들여야 했다. ‘룸’서비스니까.

“좋아요.”

그들은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쩐지 크게 들렸다.

“그런데 혼자 왔어?”

“아…… 네, 뭐.”

그런 셈이다. 강헌은 오늘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잡혀 왔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이 호텔, 이모가 운영하는 곳이거든.”

아,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것도 같았다.

“기억이 나는 것도 같네요. 선배 집안에서 호텔을 운영한다고 애들이 말했던 게.”

하지만 이곳 세인트마리아 호텔인 줄은 몰랐다. 그때 당시에는 들었던 것도 같은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잊혔다.

“오후에 한국에 몰래 들어와서 곧장 남해로 직행하려는데 엄마가 어떻게 알고 공항에 딱 와 있지 뭐야.”

땡땡이치려던 계획이 실패했지만 익숙하다는 말투였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일하라는 처분을 받았어. 어릴 때부터 종종 그랬거든. 노동의 가치를 모르고 돈만 써 대는 사람은 필요 없다면서. 가혹한 성 여사님.”

휴, 하고 한숨을 내쉬던 진우가 이내 씩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널 다시 만났으니까.”

전부터 진우의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입을 열지만 않으면 꽤나 미남인 그의 외모는 특히나 웃을 때 더 빛을 발했다.

“그럼 오늘 귀국해서 곧바로 끌려와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응. 이제 한 30분 정도 됐나. 오후에 결혼식이 하나 있었나 봐. 그거 피한 게 다행이지. 결혼식은 신경 써야 할 게 엄청 많거든.”

“아아…….”

“이모가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어지간히 대단한 사람들인가 봐. 호텔 홍보 효과 엄청 기대하고 있던데. 자초지종 들을 새도 없이 투입돼서 잘은 모르지만.”

사빈이 멋쩍은 듯 웃었다.

음, 그거 내 결혼식 말하는 것 같은데.

“참, 주류 설명해 줄게. 술 잘 알아?”

“아뇨, 하나도 몰라요. 이름이랑 쓰여 있는 설명 보고 끌리는 걸로 골랐어요.”

“어른 다 됐네, 천사빈. 혼자 호캉스도 즐길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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