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경호원들에 제지당한 재희는 강헌의 앞을 막아설 수가 없었다.
강헌은 익숙한 듯 미동도 없이 묵묵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공중에 떠 있던 이 회장의 손은 강헌에게 닿지 않고 아래로 천천히 내려왔다.
“못난 놈.”
쯧. 이 회장은 눈물이 고인 재희와 무표정한 강헌을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네놈이 정말로 정신을 차렸나 확인하는 중이다.”
이 회장의 차가운 시선이 재희에게 닿았다. 움찔하며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재희의 몸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군.”
“…….”
“이제 저거 그만 만나고 아내 될 사람에게만 집중하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저것’이라는 말에 강헌의 눈썹이 희미하게 찌푸려졌고, ‘아내’라는 말에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상처럼 서 있던 강헌이 슥 움직여 그들 사이를 가로막듯이 섰다.
“당장 돌아가거라. 천 의원 측에서 이의를 제기했다간 피곤해진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순간 이 회장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설마 사빈 양도 저것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냐?”
“……모릅니다.”
“헌데 어찌 나왔어.”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네놈이 이렇게 회사를 팔아먹는 걸 알면 임원진과 주주들이 참 좋아라 하겠구나.”
저를 닮아 거대한 강헌의 체격에 가려져서 재희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 회장은 그녀가 서 있는 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사빈 양에게 잘해라. 그만한 집안의 처자가 널 좋아하기까지 하니, 다시 못 올 행운이다.”
그 말에 재희는 깨문 입술을 더욱 세게 악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맛이 퍼졌다.
“하루빨리 아이를 갖도록 해. 그래야 네가 저런 것에게 정신 팔려서 딴 길로 새지 않지.”
강헌은 침묵했다.
쯧, 하고 다시 혀를 찬 이 회장이 몸을 돌리자 경호원이 문을 열었다.
방을 나서기 전 멈춰 선 이 회장이 고개를 반쯤 돌려 말했다.
“나올 때는 따로 나와라. 회사 일이 급해서 나왔다면서 저것과 만나고 있으면 안 되지 않느냐.”
저것.
자신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말에도 재희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네가 사빈 양 있는 곳으로 곧바로 돌아가야 저것에게 후환이 없을 거다.”
“……회장님.”
“잊지 마라. 네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저것의 운명이 좌우된다. 위로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아래로 내려가기는 쉽지.”
재희가 톱스타 반열에 올라서기까지는 물론 그녀의 외모와 재능 때문이기도 했으나, 기조그룹의 도움 덕이기도 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재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탁. 문이 닫혔다.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미안하다.”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어떻게 된 거야?”
“영화제 참석 준비하느라 선영이가 너무 고생을 해서, 밥 좀 먹이려고 왔는데…… 회장님과 마주쳤어.”
선영은 재희가 데뷔할 때부터 함께해 온 스타일리스트였다.
“난 정말 전화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은 정말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회장님께서…….”
강헌은 마른세수를 했다. 아까 이 회장 본인이 말한 대로 자신을 시험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어. 정말 미안해, 오빠.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회장이 시키는데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이런 상황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정말 미안하다. 낮은 음성으로 괴로운 듯 내뱉는 강헌을 보며 재희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제발. 미안하다는 말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재희가 강헌에게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가 제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알고 있다. 강헌에게 자신은 그저 한없이 미안하고 또 미안한 사람일 뿐이라는 걸.
그가 제게 갖는 감정은 딱 하나다.
죄책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재희는 강헌과 보통의 연인이고 싶었다.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그러다 다시 화해하는.
그러나 ‘연인’이라 규정하기로 한 우리의 사이는 어쩌면 남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강헌은 단 한 번도 제게 먼저 다가온 적이 없다. 손을 잡거나 끌어안은 것은 언제나 재희였다. 간혹 그녀가 요구하면 강헌은 마지못해 손을 잡아 주거나 안아 주기는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강헌과 입을 맞추거나 그 이상의 행위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다가가면 그의 안색은 창백해지고 손끝은 차갑게 식었다.
[미안, 정말 미안하다, 재희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낯빛으로 입을 틀어막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재희는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런 사이는 연인이라 할 수 없다. 우린 연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재희는 허울뿐인 명목이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를 붙잡을 방법이 이것뿐이었다. 그는 기조그룹이라는 거대한 집안의 후계자이고, 자신은 그저 보육원 출신 배우일 뿐이니까.
그나마 이 회장의 조력이 없었다면 이름도 알리지 못한 채 그저 그런 배우로 스러졌을 것이다.
언젠가 이 회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절…… 가만히 두시는 거예요?”
“왜. 망쳐 주랴?”
“…….”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강헌과 닮은 얼굴로 이 회장은 가시 같은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서 가장 움직이기 쉬운 건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그 욕망의 크기가 클수록 쉽지. 그런 의미에서 넌 가장 움직이기 쉽다.”
이 회장이 정확히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폐건물에 끌려간 저를 발견한 강헌과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제 오빠를 내 곁에 둘 수 있어.”
그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욕망이 먼저였던 사람이다, 나는.
“직업은 참 잘 선택했구나. 강헌이를 이용하는 주제에 겉으로는 선량한 피해자인 척. 연기력 하나는 타고났어.”
재희는 애써 이 회장의 말을 지워 내려 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이유는 오직, 사랑이라고 되뇌며.
“별일은 없었고?”
“응. 오빠한테 전화하고 기다린 게 다야.”
“그래…… 다행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강헌의 눈빛이 사랑이 아님을 안다. 그래도 재희는 스스로를 속였다. 오빠는 날 사랑해…… 조금쯤은.
“선영 씨는?”
“다른 방에 있어.”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 봐야겠군.”
재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 강헌을 뒤에서 끌어안고 너른 등에 뺨을 기댔다.
그의 몸이 흠칫 굳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재희야.”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을게. 실은 나 많이 무서웠어.”
재희는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맡아 보는 향기였다.
이건…… 허브? 그가 이런 향기의 제품을 썼던가?
“늦겠다. 그만 가는 게 좋겠어.”
그때 강헌이 재희의 손을 붙잡아 제게서 천천히 떼어 냈다.
“결혼한 여자는…… 어때?”
그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어떠냐니.”
“말 그대로, 어떤지 궁금해서.”
“…….”
“……예뻐?”
강헌은 침묵했다.
“하긴, 천문호 의원 젊었을 때 사진 보니까 미남이더라. 부인도 참하고. 두 사람 닮았다면 예쁘겠지.”
재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천문호 의원은 아내 외에는 가족을 공개하지 않아서 아무리 검색해도 딸의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천 의원이 딸을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우리 막내 공주님’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예쁘고 똑똑할 것 같았다.
유일하게 공개된 천 의원 딸의 정보는 나이였다.
스물여섯.
재희보다 세 살 어렸다.
어리고, 예쁘고, 똑똑한 좋은 집안의 처자. 게다가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투명하고 맑겠지. 사랑스러울 거고.
강헌은 정략적인 결혼이며 그저 사업의 일환일 뿐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재희는 알고 있었다.
감정이란 한순간에 불타오르는 것임을.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는 상관없다는 것을.
갑자기 한없이 불안해졌다.
오빠가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난 어쩌지?
오빠가 날 떠나게 된다면?
그의 대답을 알면서도 재희는 기어코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오빠. 키스해 주면 안 돼?”
그의 눈빛에 재희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하다.”
재희는 힘없이 웃었다.
거봐. 난 오빠를 잘 안다니까.
“농담이야. 선영이 기다리겠다. 그럼 나 먼저 나갈게, 오빠. 운전 조심해서 가.”
재희가 나가고 난 뒤.
혼자 남은 강헌은 잠시간 서 있다가 이내 마른세수를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사빈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게 옳은 것이니까.
재희가 선영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고도 남았다고 판단한 강헌은 그곳을 나섰다.
아버지의 말대로 사빈을 그곳에 혼자 두고 온 것은 잘못한 일이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에는.
그러나 재희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또 재희에게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재희는 충분히 힘들어하고 아파했다. 그런 아이를 또 고통 속에 버려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 그때 뛰쳐나가지만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재희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