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10)화 (10/90)

제10화

휙.

강헌은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내가 그렇게 보기 싫은가?’

파트너십을 다지려면 조금은 친해져야 할 텐데.

어쨌든 사빈은 강헌과 함께 스위트룸을 나섰다.

***

과연 명성에 부합하는 마사지였다.

피곤에 절었던 사빈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다. 힐끔 강헌을 보니 그도 마사지를 받기 전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 보였다.

“어땠어요? 난 완전 좋았는데.”

“…….”

무시하려던 강헌은 이내 직원들의 신경이 이쪽에 쏠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도 좋았습니다.”

그의 대답에 사빈이 배시시 웃었다. 강헌의 왼쪽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세인트마리아 호텔 룸서비스도 그렇게 괜찮대요. 이강…… 강헌 씨만 괜찮다면 룸으로 돌아가자마자 시키려고 하는데.”

이강헌 씨, 라고 부르려던 사빈 역시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성을 떼고 그의 이름만을 불렀다.

“사빈 씨가 좋으면 나도 좋습니다.”

스윗한 그의 대답에 직원들뿐만 아니라 사빈의 볼 역시 빨개졌다.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떨리긴 떨렸다.

“갈까요.”

강헌이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것과 동시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흑, 오빠.

강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야.”

- 지금 당장 와 줄 수 있어?

울먹이는 재희의 목소리에 강헌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강헌 씨, 무슨 일이에요?”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곤란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회사…… 아니면 서재희.

이내 한 가지 생각에 미친 사빈이 눈을 고쳐 떴다.

그러다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강헌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아아, 그 일 때문이구나.”

“……?”

“어서 가 봐요, 강헌 씨. 오늘까지 해결 안 되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제야 사빈의 뜻을 알아들은 강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워낙 급한 사안이라.”

“그러니까요. 어서 가 보세요. 전 여기서 더 있을게요.”

직원들을 의식한 강헌은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내 사빈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오겠습니다.”

신혼부부의 다정한 모습에 직원들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박, 기조그룹 아들 엄청 무뚝뚝하다더니 신부한테는 아니네?’

‘리체 호텔에서 맞선 볼 땐 상대방을 울렸다던데. 역시 짝은 따로 있나 봐.’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강헌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직원들도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신부님은 저희가 잘 케어해 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일이 잘 해결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강헌이 떠난 뒤.

혼자 남겨진 사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지금 나 혼자 있는 거야? 아버지, 어머니 없이 자유롭게?’

……자유다.

드디어 오랫동안 품어 온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강헌은 이 회장이 심어 놓은 일개미가 사방에 있다고 했지만, 천문호와 추연실에 비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손짓 하나, 고갯짓 하나에도 일일이 제동을 걸며 검열을 하지는 않으니까.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데 일개미들이 뭐 어쩔 텐가. 그들도 회사가 건재해야 월급을 받는 입장 아닌가?

“저 아로마 욕조에 들어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어머, 그럼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입욕 준비를 마친 사빈은 향기로운 보랏빛 물에 들어갔다.

직원이 켠 향초가 은은히 타올랐다.

“그럼 편하게 즐겨 주십시오.”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갔다. 커다란 통창 바깥으로 보이는 잘 관리된 나무들이 꼭 그림처럼 보였다.

“……대박!”

천문호와 추연실이 ‘천박한 표현’이라며 입에 담지도 못하게 했던 말을 내뱉으며 사빈이 소리 죽여 웃었다.

바깥에서 혼자 꼭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

어쩐지 강헌은 재희에게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급한 업무라도 결혼식 날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는 상사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을 테니까.

강헌이 부러웠다.

다른 사람과 정략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는 와중에도 전화 한 통에 곧바로 달려갈 정도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역시 상대방에게 그러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열렬하게.

지독하게 부러웠다.

이런 감정은 학교를 다닐 때도 매번 느끼던 것이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투정을 부리던 친구를 볼 때마다.

비 오는 하굣길, 아침에 싸웠다던 아빠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있는 친구를 볼 때마다.

깜빡하고 집에서 가져오지 못한 준비물을 형제자매가 투덜거리면서도 가져다주던 친구를 볼 때마다.

회색 음료의 씁쓸한 맛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1순위일 수 있을까.

내 말 한 마디에 언제, 어디에 있든지 달려올 누군가가 생길까.

강헌과 재희가 부러웠다. 그들에게는 자신이라는 걸림돌도 그들의 사랑을 더욱 강화시키는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도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있어.”

사빈은 아로마 입욕제를 푼 물에 젖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할 수 있어. 그러려고 결혼한 거잖아.”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내가 나 스스로를 아껴 주면 된다.

나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 언제까지나 거짓된 삶을 살 수는 없으니까.

사빈은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이제는 강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결혼을 했잖아?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사빈은 불안했다. 혹여 강헌이 마음을 바꾸어 자신과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오늘 서재희 씨한테 달려간다는 건, 이제 각자의 자유를 누리자는 신호로 보면 되는 거지?’

그런 조건으로 결혼이라는 계약을 한 것이니까.

사빈은 제 앞날에 비친 서광만을 좇기로 했다.

스파숍에서 나온 그녀는 룸에 돌아오자마자 룸서비스 메뉴판을 펼쳤다.

“내 마음대로 주문해야지.”

그간 천문호와 추연실 때문에 음식을 마음대로 고르지도, 먹지도 못했던 사빈이었다.

건강 때문이 아니라 살이 찌면 보기 흉하다는 이유로 사빈은 기름기 없는 야채 위주로 먹어 왔고, 그마저도 양껏 먹지 못했다.

디저트는 어불성설이었다. 살찌는 것은 고사하고 혹여 이가 썩어서 치과에라도 가게 되면 돈이 깨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용기를 짜내어 ‘먹은 만큼 움직이고, 이를 잘 닦으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가 난방이 되지 않는 창고에 갇혀서 하루 종일 쫄쫄 굶은 적이 있었다.

[주는 대로 먹을 것이지,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말대꾸야.]

[이곳에서 반성하렴. 널 거둬 준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구나.]

그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결혼이었다.

사빈은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겠다고 다짐까지 해 왔다.

음, 애피타이저로는 트러플 양송이 수프와 시저 샐러드로 하고.

“연어 구이랑 초밥도 시켜야지. 아, 와규 등심 스테이크도 먹어야겠다. 칠리소스 새우구이도 먹어야지! 일단 이걸로 메인은 마무리하고. 디저트로는…… 멜론 셔벗이랑 바닐라 소스를 곁들인 초콜릿 케이크로 해야겠다.”

그런 다음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해야지. 아주 격하게!

사빈은 추연실의 말에 따라 ‘우아하고 몸매 가꾸기에 좋은’ 운동만 해야 했다. 주로 발레나 필라테스 같은 것들이었다.

몸에 상처가 나면 값이 떨어지고, 괜히 헛바람이 들어서 트레이너라든가 다른 회원 남자와 눈이 맞으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발레나 필라테스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운동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추연실이 함께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추연실은 자신에게 콩고물을 타 내려 아부하는 인간들만 득실거리는 곳을 골라 다녔다.

사빈은 자신을 향한 과도한 관심과 아부 섞인 말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제대로 운동에 집중할 수 없었다.

손동작 하나를 해도 사방에서 잘한다며 박수를 쳤고, 한 동작이라도 놓치면 여러 명이 달라붙어서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때를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움직일 거야.”

룸서비스를 주문한 사빈은 커다란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다 문득 걱정이 됐다.

강헌이 전화를 받자마자 뛰쳐나가야 할 만큼 재희에게 다급한 일이 벌어진 걸까.

“설마…… 임신은 아니겠지……?”

지난번 아이 운운하던 강헌의 말도 그렇고.

몸을 벌떡 일으킨 사빈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결혼은 유지될 수 있는 건가?

혹여 강헌이 책임을 지겠다며 결혼을 깨기라도 한다면……!

“안 돼, 절대 안 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뇌하던 사빈은 룸서비스가 도착했다는 소리에 심호흡을 했다.

“위장이 비면 뇌가 돌아가지 않는댔어. 고민은 먹으면서 하자.”

***

“서재희!”

재희가 있는 곳은 세인트마리아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 레스토랑이었다.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그곳은 정, 재계 유력 인사와 유명 연예인들이 다녀가는 곳으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가장 안쪽 커다란 룸을 연 순간.

“오……!”

오빠, 라고 부르려던 재희는 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에 강헌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재희가 무사한지 빠르게 훑은 그는 대체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지만, 재희는 고개를 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잘하는 짓이다. 오늘 결혼한 놈이 첫날밤에 신부를 내팽개치고 여길 기어와?”

후. 작게 심호흡한 강헌은 뚜벅뚜벅 걸어가 자신과 아주 많이 닮아 있는 중년의 남성 앞에 섰다.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이 회장은 손을 높이 쳐들었다.

“아,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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