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화
바보 같은 착각을 했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웨딩링을 고르러 간 곳에서 다른 여자를 위한 반지를 고르다니.
이건 동행한 여자에게도, 그리고 그의 연인에게도 실례되는 행동이 아닌가. 하지만 그 차갑고 까칠한 남자는 이런 데 전혀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의 계약에는 감정적 배려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강헌이 자신과 결혼하려는 이유는 딱 하나.
재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의 모든 신경세포는 오직 그녀만을 향해 있을 뿐 그 옆에 서 있는 자신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빈은 누군가에게 1순위가 되는 기분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따라 부모님이 더 그리웠다.
그리움과 허무함이 같은 비율로 배합된 회색 음료를 단숨에 들이켠 기분.
사빈은 그대로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지금은 재희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쯤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만났을까?
자신을 위해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불사하는 남자가 안타깝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겠지.
마주치자마자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출지도 몰라.
그런 다음엔 같은 방으로 들어가…….
“미쳤어, 천사빈.”
대체 왜 이런 생각을. 사빈이 베개에 얼굴을 깊이 묻은 순간, 휴대폰 진동이 지이잉- 울렸다.
강헌이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사빈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이강헌입니다.
반지를 주문하고 돌아오던 날. 강헌은 자신의 명함을 주고 갔다.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하십시오.]
참으로 공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어떨까.
강헌처럼 딱딱한 남자도 한 여자 앞에서는 조금은 느슨해질까.
그럼 참 신기할 것 같았다.
어쨌든 자신의 궁금증은 잠시 내려놓은 사빈은 그와의 통화에 집중했다.
“무슨 일이세요?”
- 예, 저는 프랑스에 잘 도착했습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일개미가 붙어 있나요?”
- ……예.
어쩐지. 프랑스에 가서까지 제게 전화를 다 하나 했다.
- 잘 먹었습니다. 사빈 씨도 저녁 맛있게 먹었습니까?
“혼자 알아서 잘 대답하시네요.”
- 그러게 말입니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강헌의 말에 사빈이 작게 웃었다.
“참 익숙하시네요. 많이 겪어 보셨나 봐요.”
- 그런 편입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니까 포털 사이트 메인에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어서 보게 됐는데요. 일부러는 아니고.”
- 뭘 말입니까?
“서재희 씨도 오늘 출국했던데.”
강헌은 침묵했다.
곤란한 건 대답하지 않는구나.
“미리 약속한 건가요? 프랑스에서 만나기로.”
- ……디저트를 먹고 있군요.
“참 예쁘더라고요. 8년 전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나, 지금이나.”
- ……나중에 함께 가도록 하죠.
“그러니까 이강헌 씨 같은 남자가 좋아하는 거겠죠?”
- ……많이 피곤하겠습니다.
“나도 결혼하면 애인부터 만들어야겠어요.”
잠깐의 침묵 후.
- ……좋을 대로 하십시오. 저도 그게 좋으니.
“난 이제 자려고 해요. 계약 잘 체결하기를 바랄게요.”
- 알겠습니다.
“결혼식 전에는 만날 수 있나요?”
- ……일정이 빠듯해서 못 만날 듯합니다. 아쉽지만.
아쉽긴? 좋으면서.
“거짓말 잘하시네요.”
강헌은 또 침묵을 선택했다. 사빈이 피식 웃었다.
“이만 끊을게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기 전 사빈은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 ……좋은 꿈 꾸기를 바랍니다.
거짓말쟁이. 사빈은 휴대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
결국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신랑과 신부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5월 둘째 주 일요일.
기조그룹 후계자인 이강헌과 국회의원 천문호의 딸이 결혼하는 세인트마리아 호텔 다이아몬드홀에 이목이 휩쓸렸다.
비공개로 거행되는 예식임에도 정, 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하객으로 총출동한 탓에 취재진이 몰려서 보안요원들을 더 투입해야 할 정도였다.
한 대씩 차가 들어올 때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쉼 없이 울렸다. 바깥의 난리통과는 달리 클래식 선율이 잔잔히 흐르는 신부대기실은 평화로웠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다.
“첫날밤 잘 치러야 한다. 이 서방이 너한테 푹 빠지도록. 알겠니?”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니.”
“그리 딱딱해서야 원. 목석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니. 사근사근하게 굴고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 괜히 딱딱하게 굴다가 분위기 깨서 소박맞지 말고.”
“……네, 어머니.”
“이 결혼에 얼마나 커다란 금액이 오갔는지 늘 상기하고 실수하지 마라.”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머, 사돈어른들 오신 모양이다. 웃으렴.”
사빈이 익숙하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자 추연실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오세요.”
이 회장 부부가 신부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복을 곱게 갖춰 입은 추연실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사돈어른 오셨어요.”
“허허. 며느리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어머, 사빈 양 정말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유 여사의 감탄에 이 회장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결이라고는 하나도 드러나지 않은 드레스였다. 목에는 카라가 달려 있었고 그나마 손목까지 내려오는 레이스 사이로 가는 팔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 노출의 전부였다.
결혼을 하는 신부(新婦)라기보다는 사제 서약을 앞둔 신부(神父)에 더 가까운 옷차림이었다.
하나 깨끗하고 맑은 사빈의 얼굴은 그런 차림새에서도 환히 빛났다.
비록 그녀의 속은 까맣게 죽어 가고 있을지라도.
“강헌이가 보면 또 반하겠네요.”
“어머나, 그런 말씀을. 아까 보니 우리 사위도 너무 멋있던데요? 사돈어른과 사부인을 반반씩 닮아서 어찌나 훤칠하던지.”
가식적인 가면을 뒤집어쓰고 하하호호 웃어 대는 그들을 보며 사빈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행여 강헌이 재희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이 회장과 유 여사의 눈에는 자신이 아주 고마운 호구로 보일 것이다.
천문호와 추연실에게는 기조그룹이라는 거대한 행운을 물어 와서 그나마 밥값을 한 천덕꾸러기일 것이고.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사빈의 코끝이 찡했다.
“예쁜 우리 사빈이. 엄마한테 와 줘서 고마워, 내 천사.”
“사빈이가 아빠 딸이라서 아빠는 너무 행복해.”
언제나 예쁘다, 사랑한다 속삭여 주셨던 부모님.
“우리 딸이 커서 웨딩드레스 입으면 얼마나 예쁠까?”
“하하, 그러게 말이야. 우리 사빈이 데려가는 남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야.”
그땐 몰랐다. 자신이 도구 취급 당하며 계약 결혼을 하게 될 줄은.
사빈은 올라간 입꼬리에 더욱 힘을 주고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울면 애써 공들여 한 화장이 망가질 것이다. 또한 나중에 추연실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눈물을 참는 것에 익숙한 사빈은 이번에도 꾹 참아 냈다.
조금만 참으면, 자유다.
비록 이 회장이 보낸 사용인들 때문에 반쪽짜리긴 하지만, 지금보다는 숨통이 트일 것이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
버진로드를 걸어 다가오는 사빈을 보는 강헌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 줄 때도, 맹세의 서약을 할 때도 차갑고 무심한 낯은 결혼식이 끝나도 변함이 없었다.
신혼여행지는 발리로,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기로 했다. 해서 첫날밤은 세인트마리아 호텔 스위트룸에서 지내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강헌은 태블릿으로 업무를 보았다.
사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래도 첫날밤인데, 샴페인이라도 같이 마실래요?”
“됐습니다.”
“그럼 전 마사지를 받고 올 생각인데, 이강헌 씨는 어때요?”
이름이 불리자 잠시 멈칫한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며 태블릿 화면의 스크롤을 내렸다.
“생각 없습니다.”
칼같이 잘라 내는 음성에 민망했으나 사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았다.
나야 편하지, 뭐.
그리고 이쪽이 더 익숙하다.
실은 프랑스에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이따금 전화를 걸어 나름대로 다정한 통화를 하던 그였다.
[밥은 잘 챙겨 먹었습니까?]
[즐거운 하루였습니까?]
[좋은 꿈 꾸기를.]
무척이나 어색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자신의 안부를 물어 오는 사람은 처음인지라 사빈은 그의 거짓말이 듣기에 꽤나 괜찮았다.
앞으로 일개미들 앞에서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들이 지켜보는 동안에는 강헌이 억지로라도 제게 다정할 테니까.
“그럼 전 마사지 받고 올게요.”
드디어 강헌의 시선이 사빈에게 닿았다.
“혼자 나갈 겁니까?”
“안 가신다면서요.”
“도처에 일개미들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내내 이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갇혀 있으라는 말인가요?”
두 사람은 대치하듯 서로를 노려보았다.
“혼자 나갔다가 무슨 말이 돌지 모릅니다.”
강헌의 차가운 눈빛에 두 손을 맞잡은 사빈이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결혼 준비할 때 여기저기 다니느라 너무 피곤했어요. 오늘 아침에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이것저것 하느라 바빴고. 여기 호텔 스파가 좋다는 말만 듣고 버텼는데.”
“…….”
“조용히 다녀오면 안 될까요?”
쭈뼛거리며 말하는 사빈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헌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제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천문호가 꼭 저런 식으로 한숨을 쉬곤 했기 때문이다.
“그, 그냥 여기에 있을…….”
그가 태블릿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장서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사빈의 얼굴에 환한 빛이 옅게 퍼져 나갔다.
그와는 반대로 강헌의 미간은 점점 좁혀졌다. 기분이 이상하다.
“고마워요. 같이 가 줘서.”
그리고 사빈이 작게 웃으며 말한 순간, 그의 가슴에 강한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