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8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싫으면 다른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 아뇨! 좋아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강헌이 제 마음을 알아채고 고른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우연이겠지.
어쨌든 원하는 디자인의 반지를 고르게 되어 기분은 좋았다.
사빈이 반지를 끼워 보는 사이, 강헌이 다른 반지 하나를 골랐다.
‘웨딩밴드랑 프러포즈링은 다르다고 하던데.’
프러포즈링을 고르는 걸까?
강헌은 꽃 모양으로 세공된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골랐다.
아무래도 혼자 고르고 싶어 하는 분위기라서 사빈은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
사빈은 사이즈가 맞지 않아 따로 주문 제작을 맡겼다.
“완료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저희 매장을 찾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두 손을 배꼽 아래에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이는 직원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그들은 매장을 나섰다.
사빈은 나중에 강헌이 따로 산 반지는 제작을 맡기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꽃 모양 반지에 대해 끝까지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 역시 제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함께 왔지만 나름대로 서프라이즈라는 건가?
혹시 오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가 반지를 고르는 일에 몰두해서?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한 가지에 빠지면 오로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강헌도 그런 유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도 방어기제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빈은 강헌을 따라 그가 미리 예약해 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백화점 꼭대기에 위치한 그곳은 야경이 볼만하여 인기가 있었다.
“회장님께서도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하기를 원하십니다. 급하게 준비를 하면 두 달 안에 가능할 듯싶습니다. 지금쯤 천 의원님과 통화를 하고 계실 겁니다.”
두 달…… 그래, 그게 어디야.
하루라도 빨리 집을 탈출하고 싶었지만 사빈은 지금까지 참은 김에 더 참아 보기로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천사빈 씨가 봐 둔 집에서 사는 것은 곤란합니다.”
“왜요?”
“회장님이 보내는 일개미가 드나들기엔 너무 작습니다.”
“일개미가 드나들어요?”
“감시 차원에서 가사 도우미 등을 배치할 겁니다. 그들의 눈을 속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요.”
말도 안 돼! 사빈은 벌떡 일어나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감시가 결혼해서도 이어진다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게 맞긴 하다.
애초에 자신이 봐 둔 집은 지은 지 10년이 된 20평대의 빌라였고, 보안이 빡빡하지도 않았다. 양쪽 집안에서 그곳을 신혼집으로 놔둘 리 없다. 그래도 이 남자라면 어떻게든 양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이 남자가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그럴 줄 알았다.
서재희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그편이 편할 테니까.
그는 그녀와 따로 만나는 공간에서, 나는 작지만 아늑한 나만의 공간에서 각자의 생활을 영위하면 될 일이라고 사빈은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때에 따라서는 부부 관계를 하는 것처럼 보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직 먹은 것도 없는데 사빈은 체한 기분이었다.
“뭘…… 해요?”
“회장님이 보내는 일개미들은 노동 정신이 투철합니다. 받는 돈이 클수록 책임감도 그에 비례하죠. 철저히 속이지 않으면 둘 다 고통스러울 겁니다.”
강헌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성관계는 아침에 나누는 설정으로 하죠. 고용인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보통 7시에 퇴근하는데, 그 시간대는 아무래도 좀 이르니까.”
붉은 색소가 펑, 터져서 볼을 물들이는 기분이었다.
때마침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사빈은 혹여 직원이 자신들의 대화를 들었을까 봐 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릇을 세팅한 직원이 물러간 뒤에도 사빈은 좀처럼 강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은 민망해 죽겠는데, 강헌은 마치 ‘밥을 먹겠습니다.’와 같은 여상한 말을 한 듯 태연자약했다. 그런 행위에 익숙해서, 그래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까?
“천사빈 씨.”
강헌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빤히 응시했다.
“동의하지 않는 겁니까?”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저 남자와 그러니까…… 부부 관계를…… 아침마다…….
“동의하지 않으면 결혼은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사빈은 정신을 부여잡고 떨리는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도, 동의해요. 그런데 어느 정도로…… 그러니까 수위는…….”
“제대로 속일 수 있을 만큼.”
단호한 그의 대답에 사빈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유.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던 단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그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순간만 참아 내면 당신도 나도 각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빈의 삶의 이유였다.
[아빠가 엄마를 아껴 주는 것처럼, 사빈이도 사빈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건 그거 하나야.]
생전 부모님의 입버릇이었다.
그것을 지키고자 사빈은 천문호와 추연실 아래에서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참고 견뎌 내고 있는 중이었다.
“……알겠어요.”
감옥을 벗어나는 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지금 와서 포기하기에는 그간 버텼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다.
“해 볼게요. 들키지 않도록.”
사빈은 테이블 밑으로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그래야 자유를 누릴 수 있어.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사빈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헌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음식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부부 관계는…… 아침마다.’
***
양가의 뜻이 일치하여 결혼식은 한 달 반 후로 결정되었다.
이서훈 회장이야 빨리 아들을 결혼시켜서 재희를 떨어뜨려 놓고 싶을 테고, 천문호는 하루빨리 재벌가와 사돈을 맺고 싶어 했으니.
그사이 이 회장과 천 의원의 비서진들은 합심하여 사빈과 강헌의 러브스토리를 각색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1년 전 미국 뉴욕에 같은 기간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강헌은 계약을 위해서, 사빈은 추 여사를 따라 자선 파티에.
그때 처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4개월 동안 드문드문 연락을 이어 가다가 본격적으로 교제를 하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보도 자료를 뿌리면 그게 곧 사실이 되고 진실이 된다.
기조그룹이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우기도 하고, 또 요즘은 재벌가도 중매결혼보다는 연애결혼을 많이 하는 추세라서 딱히 문제 될 점은 없었다.
오늘은 드레스를 피팅하고 오는 날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추 여사는 ‘막내딸의 드레스는 직접 골라 주고 싶다’며 친분이 있는 의상실에 방문했다.
추 여사는 사빈의 의사는 전혀 묻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드레스를 열 벌이나 골랐고, 의상실 주인은 홍보 명목으로 한 벌당 다섯 장 이상의 사진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어 댔다.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추 여사가 있는 자리에서 티를 낼 수는 없어서 입가에 힘을 주며 겨우겨우 버텼다.
***
“일주일 정도 남았네. 결혼식.”
강헌과는 이따금 만나서 저녁을 먹고 헤어졌는데 그나마 그것도 일주일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었고, 결혼을 앞두고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아졌다.
어제는 그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프랑스로 출장을 가게 됐습니다.]
이 회장 부부와 같은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조금은 다정했다.
낮고 부드러웠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어쩐지 사빈의 마음이 묘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사빈이 몸을 일으켰다. 기분도 싱숭생숭하고, 아무래도 이대로 잠들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드라마를 볼까?”
사빈은 보다 말았던 재희의 데뷔작인 <가르쳐 주세요, 선배>를 보기로 했다.
“선배라.”
선배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대학 시절, 모두가 자신을 어려워할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가왔던 동아리 남자 선배였다.
그러다 그 선배 때문에 펑펑 운 적이 있었다.
[다시는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사빈은 그 선배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선배는 제게 사과를 하려 몇 번이고 다가왔지만 결국 유학길에 올랐고 사빈은 졸업을 했다.
그것으로 인연은 끝이었다.
“괜한 걸 떠올려선…….”
드라마를 재생하려 인터넷에 접속한 사빈은 포털 사이트 메인에 걸린 연예 뉴스를 보고 멈칫했다.
[서재희, 퀸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프랑스로 출국]
프랑스.
강헌의 출장지.
딸깍. 마우스가 기사의 제목을 클릭하자 공항에서 찍힌 서재희의 사진이 화면에 크게 떴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예쁨을 가릴 수는 없었다. 172센티미터에 달하는 신장에 늘씬한 몸매, 건강하고 깨끗한 피부, 그리고…….
“저건……?”
숄더백의 스트랩을 붙잡은 서재희의 왼손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사빈의 시선을 붙잡았다.
꽃 모양으로 세공된 5부 다이아 반지는 강헌과 자신의 웨딩링을 고를 때 그가 따로 주문한 그 반지였다.
모양이 특이해서 힐끔 보아도 기억하고 있었다.
‘서재희 씨를 위한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