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화
공원에 가기 위해 반대편으로 건너가려는 중이었다.
사빈에게 팔을 내어 준 채 횡단보도에 서 있던 강헌은 발견했다.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재희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자신이 뉴욕으로 출장을 갔을 때 사다 준 흰색 캡모자를 쓰고 있었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오직 세 사람만이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우리 안 건너나요?”
사빈이 붙잡은 팔을 살짝 흔들자 그가 꿈에서 깨어나듯 눈을 고쳐 떴다. 강헌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했습니까?”
“이러다 빨간불로 바뀌겠어요.”
사빈을 쳐다보던 강헌은 다시 앞을 보았다.
표시등의 숫자는 점점 내려가고 있었고, 재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일개미.’
문득 강헌은 이 회장이 보낸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빈과 함께 있는 이때, 재희와 마주쳤다는 이유로 동요하면 안 된다. 오히려 재희가 보고 있으니 사빈과 더욱 다정한 모습을 연출해야 했다.
지독한 순간이었다.
강헌은 사빈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어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이, 이강헌 씨?”
“걸을까요.”
한 걸음, 한 걸음.
재희에게로 가까워질 때마다 강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수아비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재희는 휙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덩달아 강헌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잠깐만요, 조금 빠른 것 같은…….”
그들이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다.
이 회장이 보낸 일개미는 신호에 걸려 그들을 놓치고 말았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속 움직이는 이들은 이번에도 세 사람뿐이었다.
사빈의 어깨를 감싼 채 재희의 뒤를 따라가던 강헌은 재희가 커다란 밴에 몸을 싣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이강헌 씨!”
“……미안합니다.”
강헌이 사빈의 어깨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과거 재희가 이 회장이 보낸 남자들에게 끌려갔을 때가 재생되고 있었다.
보육원 근처 폐건물 안, 먼지가 폴폴 날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곳에서 재희는…….
강헌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이강헌 씨,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그가 어깨를 감싸고 있어서 자연스레 부축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구급차를 부를까요? 아니면 비서님을…….”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도 되겠습니까.”
강헌은 사빈을 강하게 붙잡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자꾸만 그날이 떠올랐다.
“이강헌 씨, 나한테 기대요.”
사빈이 그의 머리를 감싸 제 어깨로 이끌었다. 커다란 남자는 순순히 그녀에게 이끌려 여린 몸에 기댔다.
어릴 적, 자신이 아플 때면 부모님은 늘 이렇게 품에 꼭 안아 주셨다. 따뜻하고 든든한 품에 안기면 어느새 아픔이 가시곤 했다.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던 손길.
‘빨리 나아라, 우리 아가.’라고 귓가에 속삭이던 따스한 음성.
사빈을 지탱하는 기억들이었다.
두 분이 돌아가신 이후, 사빈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끌어안았다.
워낙 키와 체격이 커다란 사람이라 좀 무거웠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사람의 체온이 이토록 따뜻한 것이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사빈은 강헌의 등을 쓸어내렸다. 과거 부모님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강헌이 사빈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떼어 냈다.
“……미안합니다. 추한 꼴을 보였군요.”
“추하지 않아요.”
사빈의 말에 그의 동공이 일순 강하게 흔들렸다.
“아픈 건 추한 게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강헌의 뇌리에 깊이 와 박혔다.
“이유를 물어도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냥 묻고 넘어갈게요. 그게 좋겠죠?”
그녀의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방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흑백이던 세상에 작은 색채가 번졌다.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강헌은 시계를 보았다. 아직 퇴근까지는 1시간가량이 남아 있었다.
오늘따라 시간이 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검지로 테이블 위를 톡, 톡, 톡, 간헐적으로 두드리던 그의 움직임이 순간 멎었다.
[아픈 건 추한 게 아니에요.]
그녀와 헤어진 이후로 내내 귓가에 울려 퍼지던 맑고 또렷한 음성이 떠오른 탓이다.
제 등을 쓰다듬던 다정한 손길.
여린 몸의 체온.
포근하고 산뜻한 향기.
강헌은 얼굴을 굳혔다.
자꾸만 사빈이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언제나 누군가를 위로해 주어야만 했다.
그 누군가는 대부분 재희였다.
자신으로 인해 지독한 고통을 겪은 그녀를 강헌은 언제나 달래 주고 안아 주어야만 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안겨서 위로를 받아 보았다. 저보다 키도 체격도 작디작은 여자가 두 팔을 힘껏 벌려 커다란 제 몸을 감싸 안는 그 감각이…….
미치도록 따뜻했다.
벗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계속 안겨 있고 싶었다.
“…….”
반듯하게 매인 넥타이로 향하던 그의 손이 도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이곳은 회사였고, 흐트러져서는 안 되는 장소였다. 사빈 때문에 흔들리는 스스로를 인정하기 싫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대체 그게 뭐라고.
강헌은 고개를 젖혀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자신은 온기와 여유를 누릴 자격이 없었다.
재희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사람이라면 이래서는 안 됐다.
겨우 서너 번 만난 여자에게 속절없이 흔들리는 스스로를 강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하면 할수록 사빈의 따스한 품과 말간 미소가 떠올랐다.
“……미친놈.”
그날, 사빈과 함께 있는 것을 재희가 보았다.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정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계획적이라는 것을 알아도 연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는데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연인…… 우리는 연인인가?
“나한테 정말 미안하면…… 나랑 사귀어 줘. 내 연인이 되어 줘, 오빠.”
재희의 말에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비록 키스도, 섹스도 하지 않지만 기념일을 챙기고 특별한 날에는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사이가 되었다.
처음 강헌이 선을 본다고 했을 때, 재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낯으로 저를 붙잡고 울었다.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오빠가 내게 이러면 안 되지 않느냐고.
“오빠가 떠나면 내 인생은, 그 힘겨웠던 시간들은…… 누가 책임져 줘?”
그 말에 강헌은 부서지는 심장을 안고서 재희를 달랬다.
그저 형식적인 것뿐이야.
선을 보지 않으면 회장님이 또 네게 해코지할까 겁이 나서 그러니 이해해 줘.
전부 거절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에 재희는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거 알아. 오빠 집안에서 날 받아 주실 리 없겠지. 만약 정말로 결혼을 해야 한다면…… 약속해 줘. 절대로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강헌은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것이 재희에게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는 길이었다.
속죄하기 위해 곁에 있는 것이 과연 연인일까.
강헌은 이내 쓰게 웃었다. 이런 물음을 갖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사빈을 애써 지워 내는 것뿐이었다.
***
미술관 건물 앞에 서 있던 사빈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와 멈추는 검은 세단으로 향했다.
“딱 맞춰 오셨네요.”
“예.”
강헌은 사빈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짧게 대꾸했다.
너와 대화할 의지가 요만큼도 없다는 듯 차가운 태도였다.
사빈은 그와 다시 만날 날을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합법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또한, 그가 제게 아주 조금은 마음을 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이 얼음장 같은 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이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상대방도 제게 호의를 베풀 거라고 생각하다니.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사빈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기대하면 안 되는데, 그 기본적인 것을 까먹고 있었다.
‘창피한 걸까? 아무래도 그런 모습을 쉽게 보일 사람 같지는 않으니.’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기 위한 사빈만의 방법이었다. 상대방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백화점 내부에 위치한 브랜드 주얼리숍으로 향하는 내내 차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내릴 때에도,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그들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침묵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강헌 본부장님.”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얼리숍은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약 2시간 동안 다른 이들의 매장 방문을 받지 않았다.
아직 그들의 결혼이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보안을 위해 한 명의 직원만이 배치되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십니까?”
직원의 물음에 강헌의 눈이 드디어 사빈에게 향했다.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괜히 등줄기가 찌릿한 기분이 들어서 사빈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천사빈 씨가 원하는 쪽으로 하세요. 난 어떻든 상관없으니.”
“예비 신랑님께서 예비 신부님을 많이 배려해 주시네요.”
직원의 말에 사빈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걸 이렇게 포장하다니. 과연 프로다운 처세다.
“저도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럼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 세 개 정도 보여 드릴까요?”
사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흰 장갑을 낀 직원이 두 쌍의 반지 세 개를 올려놓았다.
“대개 이 중에서 고르시는 분이 많으십니다.”
짐짓 무심한 척 반지를 내려다보던 사빈의 눈이 한곳에 머물렀다.
백금으로 만든 심플한 링 가운데에 핑크 다이아몬드 세 개가 콕콕콕 박혀 있는 디자인이었다.
귀엽다. 색깔도 예쁘고.
남성용은 가운데 하나만 콕 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강헌은 싫어할 것 같았다.
어쩐지 핑크라면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어할 것 같은 느낌.
사빈은 마음에 드는 반지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 옆에 있는 것을 골랐다.
역시 백금에 다이아몬드가 왼쪽에 박힌 기본적인 디자인이었다.
“이걸로 할…….”
“이것으로 하죠.”
강헌이 고른 것은 핑크 다이아몬드가 박힌 디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