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6화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부여잡은 사빈의 손에 땀이 맺혔다. 성인 남자 중에서도 천문호처럼 유독 낮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늘 이렇게 간이 구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서워. 겁이 나. 날 때릴 것 같아서.
“천사빈 씨.”
사빈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떨어졌다. 강헌의 미간도 점점 찌푸려졌다.
정략결혼의 상대자는 하필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제가 불리할 때마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사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으면 상대의 마음이 약해질지를 잘 알고 있어서 그것을 잘 이용하는.
“재희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내겐 아주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의 말이 사빈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재희를 보호하는 그를 보니, 자신을 감싸 주던 엄마 아빠가 떠올라 코끝이 시큰거렸다.
[엄마 아빠한테는 우리 사빈이가 가장 소중해.]
이제 그렇게 말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아무도.
“왜. 나와 정말 아이라도 가져 볼 생각인가?”
공중에 멈춰 있던 강헌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사빈의 앞에 놓인 찻잔을 가져갔다.
“혹여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버리십시오. 난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으니.”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저도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강헌의 눈에는 충격을 받은 사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가 붙인 끄나풀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아까부터 이곳을 흘깃흘깃 주시하고 있던, 커다란 보스턴백을 손에 쥔 남자가 이쪽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화를 들으려는 모양이다.
몇 년간 이 회장이 보낸 일개미들을 상대하다 보니 이제는 척 보면 누가 끄나풀인지 알 수 있었다.
“천사빈 씨. 당신에게 결혼이 꼭 필요한 것처럼, 내게도 그러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이 결혼이 어그러지면 곤란해지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강헌과의 결혼이 취소된다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노는 고스란히 사빈에게 향할 것이다.
체벌의 강도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질 테고.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사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미안, 미안해요. 앞으로는 말 많이 하지 않을게요. 서재희 씨 얘기도 꺼내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가 그녀의 말을 툭 잘랐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파리한 안색의 사빈을 보며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천 의원 부부가 막내딸의 몸이 약해서 걱정이라고 했었지.
……귀찮게 됐군.
“회장님이 보낸 사람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빈의 눈이 커다래졌다. 문득 그녀의 동공이 참 까맣다고 생각하며 강헌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진짜’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진짜……?”
“진짜 결혼을 앞둔 사람들처럼, 설레고 행복하게.”
그들과 참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 결혼이 정략적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잖아요.”
“사과할 일이 있습니다.”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사빈이 눈을 깜빡거렸다.
“회장님께서는 천사빈 씨가 날 마음에 들어 해서 이 결혼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계십니다.”
“……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난 당신과 결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람?
“천 의원님 집안과의 인연도 분명 매력적인 선택이었지만 더 이득이 되겠다 판단된 곳이 따로 있었습니다.”
“아…….”
“그래서 난 천사빈 씨를 잡아야 했습니다.”
강헌은 진하게 내려앉은 강한 눈빛으로 사빈을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또 만나기는 힘들 테니까.”
누가 들으면 사랑 고백인 줄 알 것이다. 그러나 강헌은 그저 재희의 존재를 묵인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다.
이런 말에 면역이 없는 사빈은 옅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뭡니까.”
“회장님은 서재희 씨의 존재에 대해 아시나요?”
잠시 굳어졌던 강헌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사빈과 입을 맞출 수 있었다.
“알고 계시지만, 천사빈 씨가 재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모르십니다.”
“회장님께서는 제가 이강헌 씨를 좋아해서 결혼을 추진한다고 알고 계신다 했죠.”
잠시 생각하던 사빈이 그의 눈을 보았다.
“만약 제가 나중에 서재희 씨의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감당해 낼 수 있을 거라 판단하신 건가요? 이강헌 씨와 헤어지지는 못할 거라 생각하시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염두에 둔 집안이 아닌 저를 선택하신 거고요. 만약을 대비해서.”
그렇군요, 하고 중얼거린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헌 씨한테도 제가 꼭 필요하네요.”
사빈의 말이 강헌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특히나 자신의 이름이.
황폐한 마음속에 내려앉은 홀씨의 존재가 선명히 느껴졌다. 강헌은 그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받아들일 겁니까?”
“우리가 ‘진짜’처럼 보여야 한다는 거 말이죠?”
“사람들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는 정말로 부부처럼 보여야 할 겁니다.”
정말로 부부처럼.
그의 말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머릿속에 깊이 새긴 사빈은 자신의 손을 강헌의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움찔. 강헌의 미간이 좁혀졌으나 뿌리치지는 않았다.
“누가 지켜보고 있다면서요.”
그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받아들일 마음은 있지만 자신은 없어요.”
“…….”
“그러니까 이강헌 씨가 잘 이끌어 주세요. 어설픈 거 티 나지 않게.”
강헌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사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의미에서, 악수입니다.”
“……풋.”
사빈이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또, 예고 없이.
거꾸로 엎어 놓은 초승달처럼 스르르 접히는 눈가에서 강헌은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그럼.”
스르르.
그가 손을 세워 그녀와 깍지를 꼈다.
“이렇게는 괜찮습니까.”
마디마디 얽힌 손가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의 손에 비하면 자신의 손은 무척이나 작았다.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왜 갈수록 미친 듯이 뛰는 걸까.
갑작스러운 스킨십이었지만 머리와 다르게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일개미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일개미?”
“회장님이 보낸 사람을 난 그렇게 부릅니다.”
진지한 얼굴로 속삭이는 강헌을 보니 또 웃음이 터졌다.
그의 얼굴이 순간 무섭게 굳어졌다.
“왜 웃습니까?”
“아, 미안해요.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일개미’라고 하니까 좀 웃겨서요.”
“예고를.”
하고 웃으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강헌은 그 말을 속으로 꾹 삼켰다.
어쩐지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크게 바뀔 것만 같았다.
고작 작은 웃음일 뿐인데.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계속 이렇게 손을 잡고 있을까요?”
사빈이 속삭였다.
“반지 사이즈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 잘 모르겠는데.”
그의 손가락이 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문지르자, 사빈은 어쩐지 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연애를 해서 그런가.
참 자연스럽고 익숙하네, 이런 스킨십이.
“다음 주에 보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편한 시간을 알려 주시면 데리러 가겠습니다.”
“직접요? 그럴 필요까지는.”
아.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니까. 수긍한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일은 바쁘시겠죠?”
“상관없습니다.”
“저는 6시에 퇴근해요.”
사빈은 추연실의 여대 동창이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근무 중이었다. 말이 경영기획팀 소속이지, 그냥 낙하산이다.
추연실은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곳에 사빈을 꽂아 놓고 혹여 남자를 만나지는 않는지, 집안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을 하고 다니지는 않는지 감시했다.
실제로 사빈은 근무 중이라도 추연실이 부르면 언제든 나갈 수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그러려니 했다. 사빈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경력을 쌓기 위해 입사한 낙하산이 적지 않았던 탓이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서초동에 있는 나비 갤러리로 오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시간 맞춰서 가겠습니다.”
떨리는 마음과는 별개로, 안심이 되었다.
집에 늦게 들어갈수록 ‘가족’들과 마주칠 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 차갑고 딱딱한 남자가 정말로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그때 사빈은 가까이에 서 있는 보스턴백을 들고 있는 남자가 이쪽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나머지 손으로 강헌의 손을 감쌌다.
“저 잘할게요.”
“뭘 말입니까?”
“이강헌 씨가 저랑 결혼한 거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 사빈이 이 회장이 보낸 일개미를 의식하여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강헌이 픽 웃었다.
“내가 사람을 잘 만났군요.”
그가 웃을 줄은 몰랐기에 사빈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나한테 웃어 준 건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순간이지만, 찰나였지만 분명 강헌은 웃었다.
희미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미소였다.
……저렇게 웃는구나, 이강헌 씨는.
멋있네. 아주 조금.
어쩐지 강헌과의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생겼다.
“어디 아픕니까? 갑자기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더워져서.”
“그럼 나가서 좀 걷겠습니까?”
“좋아요.”
강헌은 제가 들고 온 그녀의 코트를 붙잡고 사빈이 팔을 꿰어 넣을 수 있도록 도왔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가방은 제가 들게요.”
강헌은 그녀에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살짝 열려 있던 가방 안에서 무언가 팔랑- 떨어졌다.
강헌이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웠다.
아주 작고 오래된 사진이었다.
어린 사빈의 뒤로 부모님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구도였다.
휙. 강헌의 손에서 사진이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주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빼앗듯 사진을 가져온 사빈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보이려 애를 쓰며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세인트마리아 호텔을 나서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가로수를 보는 척 고개를 슥 돌리니 보스턴백을 손에 든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망설이던 사빈은 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일개미가 따라오고 있어서요.”
그녀의 속삭임에 강헌은 입가에 힘을 주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려 했다.
첩보 영화를 찍는 것처럼 주위를 잔뜩 경계한 채 ‘일개미’라고 진지하게 속삭이는 그녀가.
아주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