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5)화 (5/90)

제05화

천문호는 얼굴에 쓴 가면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갖은 힘을 주었다.

사빈이 멀리 가게 된다면 지금처럼 곁에 두고 입맛대로 조종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그러나 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기에 그저 허허, 멋쩍은 웃음을 짓는 것에 그쳤다.

“강헌아.”

이 회장의 부름에 강헌은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저희 아이가 말주변이 없는 편이라,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정희 여사가 살며시 고개를 숙이자 천문호와 추연실이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사빈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천문호의 얼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가면이 곧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요즘 수안구가 신혼부부들이 처음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곳으로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저희도 신경을 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천 의원님.”

“어머, 저희 친정에서 수안구에 건물 한 채를 소유하고 있는데, 거기를 신혼집으로 리모델링하면 어떨까요?”

“어머니.”

유 여사의 말을 부드럽게 자른 강헌이 사빈을 한번 슥 바라보고는 다시 모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되면 혹여 저희 집안 소유 재산에 대해 다시 초점이 맞춰질 거고 괜한 잡음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저희 둘이 상의하여 생활하기 적당한 곳으로 마련하겠습니다.”

낮고 차분한 음성에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어제 그렇게 화내듯이 갔으면서, 왜 자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해 주는 걸까.

감정이 벅차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결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님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누군가 가족 앞에서 저를 위해 나서 준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를…….

“그래야 빨리 아이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사빈은 눈을 깜빡였다.

혹시나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어른들의 표정을 보니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보다.

사빈과 강헌의 눈이 마주쳤다.

‘미친 거예요?’

‘그럴 리가.’

이러한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이내 서로에게서 눈을 돌렸다.

“방금 아이라고 했습니까?”

표정 관리에 능숙한 천문호였지만 지금만큼은 당혹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 부부가 아이를 갖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뻔뻔스러운 낯짝과 대답에 사빈은 기가 막혀서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허허, 그렇지요.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른 것 같아서…….”

이 회장이 끼어들었다.

“우리는 빨리 손주를 보고 싶은데. 천 의원님은 아니십니까?”

천문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빨리 아이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됐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기조그룹과 보다 확실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희도 바라 마지않지요. 그래도 몸이 약한 아이라 걱정이 되어서요.”

천문호는 순간의 머뭇거림을 사빈을 걱정했다는 것으로 둘러대었다. 다행히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옆에서 잘 챙기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하지요.”

때마침 식사가 나와서 이야기는 그것으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디저트는 젊은 사람들끼리 편하게 먹도록 해 주는 게 어떨까요?”

유 여사의 말에 이 회장이 동의했다.

“그게 좋겠군. 천 의원님은 어떠십니까?”

“예,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천문호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늦어도 허락하마.”

“……알겠습니다, 아버지.”

“어쩜 사빈 양은 저리 얌전하고 조신할까요. 추 여사님을 닮아서 아주 미인이기도 하고요.”

“호호, 과찬의 말씀이세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빈은 속으로 비웃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큰어머니를 닮을 리가 있나.

“강헌아. 사빈 양 잘 에스코트해야 한다.”

“예.”

먼저 일어난 강헌이 사빈에게 다가갔다.

“갈까요.”

불쑥 내밀어진 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천문호의 날카로운 시선에 사빈은 얼른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저, 코트랑 가방 가져갈게요.”

강헌은 말없이 옷걸이에 걸려 있는 사빈의 코트와 가방을 한 팔에 걸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 방을 나섰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닫히고 입구를 벗어날 때까지도 강헌과 사빈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저기. 이제 놔주셔도 되는데.”

강헌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이강헌 씨.”

우뚝. 처음으로 불린 제 이름에 강헌이 멈춰 섰다.

그가 그녀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요?”

“디저트 먹으러 갑니다.”

“손이 조금 아파요.”

그제야 사빈의 손을 놓은 강헌이 제 손을 말아 쥐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세인트마리아 호텔의 디저트가 맛있다고 하더군요.”

따라오라는 듯 강헌은 몸을 휙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크고 너른 뒷모습을 보던 사빈은 그의 왼쪽 팔을 보며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코트랑 가방은 내가 들어도 되는데.’

이러니까 꼭 무슨 데이트 같다.

정략결혼을 앞두고 형식적인 상견례로 만난 사이가 아니라.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일까. 그럼 좋을 텐데.

그래야 자신들의 결혼 기사가 배포되면 ‘언젠가 호텔에서 그들을 보았는데 애정이 아주 없지는 않더라.’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말이 돌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하실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사빈은 그의 뒤를 따랐다.

세인트마리아 호텔 베이커리 카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두 사람은 파티시에의 추천 음료와 케이크를 골랐다.

“여기 디저트 맛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 거 좋아해요?”

“누가 알려 줘서.”

“혹시…… 서재희 씨요?”

순간 강헌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재희 이름은 꺼내지 않는 게 좋겠군요.”

누가 보면 마치 자신이 서재희를 욕하거나 해코지를 하려는 줄 알겠다. 그만큼 강헌의 분위기는 무시무시했다.

어이가 없던 것도 잠시.

‘……많이 좋아하나 보네.’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자신도 이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코끝이 찡해지려고 해서 사빈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서요?”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사빈이 눈썹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 서재희 씨 좋아해요.”

강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말이냐는 뜻이었다.

"저희 계약한 직후에 서재희 씨 데뷔작을 봤어요. 그 드라마가 방영할 당시에 못 봤거든요. 한 편만 보고 자야지, 했는데 그날 새벽까지 네 편 연달아 보고 나서 나흘 만에 다 봤어요."

“…….”

“너무 재밌던데요? 특히 서재희 씨 연기가 대단했어요.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이 굉장해요. 배우 하려고 태어났나 봐요.”

“일부러 이러는 겁니까?”

사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요?”

“일부러 재희 얘기를 꺼내서 내 신경을 건드는 거냐고 묻는 겁니다.”

그녀가 하, 하고 짧은 숨을 내뱉듯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강헌 씨와 서재희 씨 사이를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관심도 없고요. 그냥 배우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하고 사빈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굳이 따지자면 저는 이강헌 씨보다 서재희 씨가 더 좋아요.”

난감인지 황당인지 모를 그의 표정에 사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표정에 외모도 인간미가 없어서 잘 만들어진 조각 같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기는 한 모양이다.

“…….”

고개를 숙이고 살포시 웃는 사빈을 보며 강헌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아까 상견례 자리에서 사빈은 마치 그녀의 존재가 지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거의 미동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움직임만 보였다.

이목이 집중될 때마다 동공이 흔들렸고, 대답하기 전후에는 늘 천문호와 추연실을 슬쩍 쳐다보았다.

부모의 눈치를 본 것인지, 긴장되는 자리에서 무언으로 응석을 부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만 사빈에게로 눈길이 가게 되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때 주문한 홍차와 치즈 케이크가 나왔다.

“아까 왜 그런 말을 했어요?”

“어떤 말 말입니까?”

사빈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강헌은 놓치지 않았다.

“아, 아이가…… 빨리 생기니 하는 얘기 말이에요.”

“아아, 그거.”

강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야 얘기가 빨리 끝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부모님이 원하시기도 하고.”

테이블 밑으로 맞잡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던 사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정말…… 저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세요?”

하. 강헌이 어이없다는 듯 짧은 조소를 흘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어쩌려고 그런 말을 했어요.”

이 결혼이 계약인 줄 모르는 천문호와 추연실은 아이를 가지라고 닦달할 게 뻔했다.

“별 의미 없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가 알아서 수습하겠습니다.”

아, 하고 사빈이 눈을 고쳐 떴다.

“혹시 서재희 씨가…… 임신을…….”

“천사빈 씨.”

차갑게 얼어붙은 음성으로 저를 부르며 강헌이 손을 뻗었다.

사빈은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뭐 합니까?”

천천히 실눈을 떴다.

제 앞에 놓인 찻잔으로 뻗어 가려던 커다란 손이 공중에서 뚝 멈춰 있는 장면에 사빈은 눈꺼풀을 완전히 들어 올렸다.

그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아…….”

연하게 칠한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자조가 연기처럼 새어 나왔다.

천문호는 낮은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뒤엔 예고도 없이 손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사빈은 입술을 깨물고 그저 묵묵히 받아 내야만 했다.

작은 소리라도 냈다간 벌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강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뻗었을 때.

이대로 얻어맞는 줄 알았다.

폭력을 감내하는 데 익숙해진 몸은 저절로 움직여 스스로를 방어하려 했다.

‘……비참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 그녀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빈혈입니까?”

이 남자는 절대로 모르겠지.

곱게만 자랐을 것 같은 천문호 의원의 막내딸이 실은 몸과 마음이 멍투성이라는 사실을.

“……아뇨.”

“그럼 뭡니까?”

“그냥…… 그게…….”

“늘 위기를 이런 식으로 모면하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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