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화
사빈이 강헌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에 천 의원 부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네 쓸모를 다하는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기조그룹이라는 거대 재벌과 사돈이라니.
예상보다 더욱 거대한 성과에 천문호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이강헌이와 구체적인 날짜는 논의해 봤니?”
“여보, 이제 이 서방이라고 불러 버릇해야지요.”
“이런, 그렇군.”
“말실수라도 하면 안 되니까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천문호가 사빈을 보았다.
사빈은 소름이 끼치는 팔을 꾹 잡아 눌렀다.
“최대한 앞당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되도록 한 달을 넘기지 않겠다고…….”
천문호가 껄껄 웃었다.
“이강헌이 네게 푹 빠진 모양이구나?”
“아이 참, 이 서방이라니까요.”
“그래, 그래. 이 서방. 그 사람이 네가 마음에 든다던?”
순간 사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집에서 천문호의 말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벌을 받게 될까.
사빈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래, 그런 얘기는 부끄럽겠지. 어쨌든 아주 잘했다.”
예상과 다른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수고했다. 들어가 쉬어라.”
놀란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사빈은 혹여 천문호의 마음이 바뀔세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아버지, 어머니.”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2층에 있는 제 방으로 향한 사빈.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녀는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하아.”
방문에 등을 기댄 사빈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어느새부턴가 방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행동이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
힘없이 중얼거린 사빈은 귀걸이를 빼고 옷을 갈아입고는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참 다행이다. 결혼하게 되어서.
이 소식을 가져오지 못했다면 어떤 벌을 받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최소 일주일 동안은 밖에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뺨이 부어올라서.
잠시 눈을 감고서 숨을 돌린 사빈은 문득 든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앉은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검색창에 ‘기조그룹 이강헌’을 쳐 보았다. 그와 관련된 기사는 적지 않은 편이었다.
기조그룹은 해외에도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아주 커다란 기업이다. 당연히 후계자인 강헌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시선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진은 그리 많지 않았다.
- 이강헌 본부장은 사진 찍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카메라를 든 기자들은 그의 차가운 눈길에 움찔할 때가 많다.
한 기자가 그에 대해 논평한 글의 일부였다.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는구나.”
나랑 똑같네.
하지만 그의 사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빈은 기조전자 신제품 발표회에 참석할 때 찍힌 강헌의 사진을 보았다.
잘생기긴 했다. 어디에 있어도 시선을 끌어모을 외모였다.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댓글들이 전부 비슷비슷한 결이었다.
- 재벌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됐지 외모까지 줄 필요 있었나?
- 얼굴로만 따져도 상위 1% 금수저다.
- 이강헌 삶은 웬만한 드라마 남자 주인공 뺨침. 여행 갔다가 인파에 휩쓸려서 보육원행, 그러다 형 죽고 다시 재벌가 ㄱㄱ 작가들이 이강헌 얘기 미리 알고 그렇게들 똑같은 캐릭터를 지어낸 건가.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구나.”
그리 생각할 때 한 댓글이 눈에 띄었다.
- 근데 이강헌 친아들 아니라던뎅. 밖에서 낳아 왔는데 큰아들 죽어서 이을 사람 없어서 데려왔다던데 진짜임?
- ㄴ님 그런 얘기 하면 기조그룹 법무팀에서 잡아감.
- ㄴㅋㅋㅋ여기가 북한이냐? 잡아가긴 뭘 잡아가.
- ㄴ나도 이 얘기 들음. 인천인가 거기 바다 쪽 보육원이라던데. 울 엄마 대학 때 거기로 봉사 간 적 있다고 했음.
“친아들이 아니라니…….”
유명해지면 이런저런 뜬소문이 많아지는 법이다. 사빈도 이 댓글 또한 그 일환이라 여겼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도 자신과 같은 입장이라면.
지옥 같은 곳에 발을 들이민 것이라면…….
“아냐.”
사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강헌은 누가 보아도 이서훈 회장과 똑 닮아 있었다.
또한 공식 석상 외에 모친인 유정희 여사와 다정히 손을 붙잡고 다니는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되기도 했다.
친아들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지금은 자신의 앞가림을 하기에도 바쁘다.
하지만 사빈은 어쩐지 강헌의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진도 잘 받네.”
온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만들어진 조각 같은 얼굴.
내가 결혼을 하는구나, 이 남자와.
그러다 문득 이런 배경을 가진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사빈은 검색창에 ‘서재희’를 쳤다.
프로필 사진 옆에 함께 기재된 화려한 필모그래피가 눈길을 끌었다.
그녀의 데뷔작은 <가르쳐 주세요, 선배>였다. 사빈도 당시 제목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모두 그 드라마 얘기로 열렬히 꽃을 피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빈은 한 번도 그 드라마를 시청한 적이 없었다.
‘쓸데없는 데 힘 쏟지 말라’는 천문호의 명령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생산성 없는 것에 관심을 보이면 곧바로 벌이 내려졌다.
‘조금만 봐 볼까?’
사빈은 드라마 1화를 클릭했다.
약 50분 뒤.
- 응, 기윤기를 내 첫 선수로 영입할 거야.
엔딩 음악이 흐르며 1화가 끝났다.
“와…….”
사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재희의 연기력은 대단했다. 단 한 번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선이 강렬하고도 섬세하게 휘몰아쳤다.
재희가 이 역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한 편만 보아도 여실히 느껴졌다.
게다가 예뻤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신비주의를 고수하여 사생활은 잘 알 수 없으나, 지금껏 논란에 휘말린 적은 없었다.
어제 보니까 얼굴도 이 8년 전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와 똑같던데. 아니지, 더 성숙해지고 세련되게 변한 것 같다. 거기에 더해서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부와 명예까지.
“이래서 그 남자가 좋아하는구나.”
같은 여자가 보아도 예쁘고 멋진데 하물며 남자의 눈에는 어떨지.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노트북을 덮은 사빈은 책상 위에 놓인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속 빈 강정.
빛 좋은 개살구.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겉으로는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아가씨지만, 실은 살아남기 위해 납작 엎드린 채 가족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다.
천문호의 철저한 통제하에 사빈은 아무와도 가깝게 지낼 수 없고,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는 단절되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일상과 감정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였다.
친부모님과 보냈던 시간들과, 그나마 다른 시기에 비하면 비교적 자유로웠던 대학 시절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벌써 말라비틀어졌을 것이다.
사빈은 옆으로 누워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결혼한 후에는 되도록 강헌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인이랑 밖에서 좋은 시간 보내요, 이강헌 씨. 서재희 씨 아끼는 모습은 보여 주지 말고. 그럼 마음이 너무 황량할 것 같으니까.”
하긴. 더 황량해질 공간이 남아 있겠느냐마는.
남편이 될 사람의 연인에게도 마음속으로 부탁했다.
부디, 강헌을 잘 붙잡아 두고 있으라고.
그사이에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
한 달 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세인트마리아 호텔의 한정식 레스토랑에서 상견례가 있는 날이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서로 주고받을 것이 분명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대화는 주로 어른들이 주고받았다.
결혼 당사자인 사빈과 강헌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고, 사빈의 두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신혼집은 어디로 할지 걱정입니다.”
천문호의 말에 이서훈 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사빈을 보았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친정과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한다던데.”
“아…….”
사빈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밑으로 맞잡은 제 두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사빈 양도 그렇겠죠? 우리 천 의원님께서도 마찬가지시겠고. 그리 아끼시던 막내따님이시니.”
“허허. 제 마음이야 그렇지만.”
천문호는 순간 서늘한 눈빛으로 사빈을 슥 훑었다.
“그게 어디 저 혼자 결정할 일인가요. 제 딸이기도 하지만 이제 회장님 며느리이기도 한 것을요.”
다시 이서훈 회장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천문호의 입가에는 인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빈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계속해서 입꼬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사빈 양 생각은 어떤가요?”
유정희 여사의 물음에 사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 말해야 정답이지?
뭐라고 답해야 좋아하지?
뭐라고 해야만…….
“어머니, 아버지.”
낮은 음성이 흘러나온 입술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강헌은 저를 향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로 여상히 말했다.
“신혼집은 수안구에 마련하려고 합니다.”
“수안구에?”
다들 처음 듣는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인 사빈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헌을 쳐다보았다.
추연실이 중얼거렸다.
“수안구는 너무 먼 것 같은데…….”
“신혼부부가 생활하기에는 적당한 곳 같아서요. 위치도, 생활권도.”
천문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왼쪽 입꼬리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가 있다.
사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건 기분이 좋지 않다는 신호다.
“허허. 그래도 자라 온 터전과 회사가 모두 이쪽인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면 힘들지 않을까요?”
천문호가 눈치를 주자, 추연실도 말을 보탰다.
“그러게 말이에요. 특히 우리 사빈이는 몸이 약해서 제가 옆에서 자주 챙겨 주어야 할 듯싶은데.”
“저희 기조그룹은 3년 전부터 ‘당신의 곁에, 늘 가까이’라는 모토를 중심으로 딱딱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를 벗고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고저도 흔들림도 없는 낮고 단단한 음성에 불안하게 떨렸던 사빈의 마음이 차차 가라앉았다.
“아, 당연히 알고 있지요.”
천문호가 이 회장의 눈치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기조그룹 오너 일가는 그룹 소속 스포츠 구단의 경기를 보러 가거나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여타의 재벌가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 왔다. 때문에 국민들도 기조그룹에 대해서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이런 시기에 지나치게 호화로운 신혼생활을 시작한다면, 어렵게 쌓은 이미지가 훼손될 우려가 있습니다. 기조전자의 주가가 내려가게 된다면 천 의원님도 손해가 크실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