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3)화 (3/90)

제03화

그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마치 이 계약서가 혼인신고서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빈은 떨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의 이름 옆에 사인을 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저어, 제 부모님께는 언제 말씀드려 주실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사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천사빈 씨는 경계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부모님께는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꺼내는 것을 보니.”

그의 표정은 읽어 낼 수 없었다. 마치 천문호처럼.

사빈의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설마 나를 믿는 겁니까?”

느리게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에 사빈은 목을 가다듬었다. 부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야 할 텐데.

“……믿어요.”

강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근거로?”

“그냥…… 아, 이강헌 씨와 부모님은 사이가 아주 좋다고 들었어요. 어릴 때 헤어지고 다시 만난 이후로 더욱 돈독하고 화목한 가족이 되었다고.”

“…….”

“그런 환경에서 자라셨으니까 제 마음을 잘 아실 것 같아서요. 독립하겠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염려하시니까요.”

“……그런 환경.”

그녀는 움찔했다.

내내 고요하던 강헌의 눈에서 폭풍처럼 거대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분노와 적의에 순간 목이 졸리는 듯했다.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함부로 발을 들이밀어 버리고 만 기분이었다.

“내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마십시오.”

그간의 냉랭함은 맛보기였다는 듯, 강헌은 무섭도록 차갑게 선을 그었다.

“어떤 것도 바라지 말고 아무것도 가늠하지 말아요. 그게 우리의 결혼 생활을 무사히 이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니.”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멀어져 갔다.

떨어져 앉아 있던 비서가 급히 다가와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와 봉투를 챙겨 들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잠깐만요!”

황급히 일어난 사빈이 강헌을 따라나서려는 비서의 소매를 훅 붙잡았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예요? 제가 못 할 말이라도 한 건가요?”

비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상사에 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사빈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럼, 하고 고개를 숙인 비서가 다급히 강헌을 쫓아갔다.

“……뭐지?”

혼자 남겨진 사빈은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못 할 말을 했나?

기분 나쁠 만한 포인트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갑자기 바뀐 강헌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 하나.

어쨌든 이것으로 결혼은 합의가 되었으니.

‘좋은 소식을 가져가면 당분간 벌은 받지 않겠지.’

게다가 결혼 준비를 해야 하니 천문호의 얼굴을 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더 오래 붙잡아 두려고 했는데.”

그래야 집에 돌아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출 수 있으니까.

하나 사빈은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를 벗어났다. 이곳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집에서 어찌어찌 강헌이 일찍 자리를 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큰일이다.

천문호와 추연실은 ‘여자애가 혼자서 밖에 나돌아 다니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며 사빈이 허락받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금했다.

늦게 들어가면 분명 추궁을 당하고 결국 벌을 받겠지.

그러다 사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헌은 신혼집에서 미리 살고 있으면 안 되겠느냐는 제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혼식 때까지 미리 나가서 살고 있으려던 계획이 무참히 틀어져 버렸다.

‘한 달만 참으면 벗어날 수 있을까…….’

***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재희는 왼쪽 네 번째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항간에 알려진 ‘배우 서재희’의 화려하고 우아한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스물한 살에 이온 음료 CF로 데뷔한 서재희는 그해 출연한 <가르쳐 주세요, 선배>라는 드라마가 대박을 치면서 단숨에 20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급부상했다.

검도 선수에서 재벌가 며느리가 됐던 여주인공이 이혼 후 홀로서기를 하며 고등학교 후배였던 남주인공과 운명적으로 재회하여 사랑을 키워 가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됐을 때, 주위의 반응은 ‘분명 망한다.’였다.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은 ‘쌩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다니. 게다가 남자 주인공도 처음 출연한 전작 드라마에서 작은 역할을 맡은 것에 불과했던, 이제 막 떠오르는 신예였다.

설상가상 동 시간대 라이벌 드라마에는 한류스타 남자 배우와 아이돌 가수 출신으로 다수의 팬을 확보한 여자 배우가 주인공이었다.

누가 보아도 승패는 명확했다. 그러나 첫 방송 이후 반응이 엇갈렸다.

재희의 연기력은 다른 배우를 가려 버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사람들은 ‘간만에 발견한 보석!’이라며 재희에게 열광했고, <가르쳐 주세요, 선배>는 그해 해당 방송사 연기 대상을 휩쓸었다.

재희는 신인상과 최우수 연기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화려한 이력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톱스타 반열에 오른 재희는 데뷔한 지 8년째가 되는 오늘까지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신비주의 노선을 탄 그녀에 관한 대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때문에 서재희가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자 재희가 다급히 화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재희야.

차갑고 낮은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오빠, 어디야? 왜 어제오늘 연락이 안 됐어?”

- 선보느라.

재희는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강헌이 선을 보는 것은 그의 일과가 되었을 정도로 빈번히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헌이 자주 선을 보는 것은 재희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호텔 카페에서 마주 앉는다. 대화를 나눈 지 10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후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패턴이었다.

“놀랐잖아. 나 하루라도 오빠 목소리 안 들으면 불안해서 못 자는 거, 잘 알면서.”

- 미안하다.

그 차갑고 날카로운 남자가 순순히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서재희뿐이다.

그 사실에 재희는 강한 만족감을 느꼈다. 비록 자신을 향한 그의 감정이 애정이 아닌 죄책감에서 기인했을지라도.

상관없다. 전혀.

강헌이 제 곁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제 세인트마리아 호텔 디저트 참 맛있더라. 고마워, 오빠. 다음에 또 가자.”

- 재희야.

어쩐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다.

재희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이런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를 땐 대개 안 좋은 소식을 전해 줄 때였다. 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도.

그리고…….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던 그때에도.

재희는 떨리는 입가를 끌어 올리며 억지로 대답했다.

“……응, 오빠.”

- 나 결혼한다.

콰지직.

재희의 세계가 수천 갈래로 찢기며 깨졌다. 윙윙거리는 커다란 소리를 내는 기계가 머릿속을 온통 파헤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방금 뭐라고…… 뭐라고 한 거야?”

- 나 결혼하려고 해.

차가워진 손끝이 벌벌 떨렸다.

강헌 오빠가 결혼을 한다고?

나 아닌 다른 여자와?

선을 보는 게 아니라, 정말로 결혼을 하게 됐다고?

“누, 누구…… 누구랑?”

- 어제 선본 사람.

강헌이 어제 누구와 선을 본다고 했었더라.

무슨 의원의 딸이라고 했는데.

안개가 낀 듯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강헌이 만난 지 10분 만에 퇴짜를 놓은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될 사람이라고 여긴 탓이다.

- 지금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야.

그가 한 사람을 두 번 보는 일은 지금껏 없었다. 기껏 가라앉았던 재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겨, 결혼을…… 오빠가…… 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의 말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어떻게 달라지는 게 없어? 오빠한테 아내가 생기는 거잖아. 다른 여자가 오빠 옆에 당당하게 서 있는 거잖아!”

어깨가 위아래로 거세게 오르내리던 그때.

- 계약서 작성했어.

강헌의 말에 재희가 멈칫했다.

계약서?

- 어제 대뜸 그러더군. 너와 계속 연애하라고. 아무 상관 안 할 테니, 대신 결혼은 자기와 하자고.

“나랑 오빠랑 만나는 걸 알아?”

- 어제 우연히 비상계단에 들어왔다가 본 모양이야. 너와 내가 같이 있는 걸.

그는 알까.

강헌은 단 한 번도 ‘우리’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때 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여자는 오빠한테 뭘 바라는데?”

- 자유.

재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강헌 같은 남자에게 바라는 것이 고작, 자유?

“무슨 뜻이야?”

- 말 그대로, 서로의 사생활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하기로 했다.

강헌과의 결혼을 꿈꾼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악착같이 위로 올라가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무척이나 높았다.

보육원 출신의 여배우가 아무리 날고뛰어 봤자 재벌가의 문턱을 넘을 수가 없었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결혼을 입에 담다니. 그냥 그날 없앴어야 했나.”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어릴 때 함께 자라 왔기에 누구보다도 잘 내조할 수 있어요. 각오, 되어 있습니다.”

“각오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룹에 위기가 닥쳤을 때, 회사가 무너지지 않도록 강헌이를 도울 힘이 네게 있느냐?”

“그건…….”

“남들은 처가의 도움을 받으며 승승장구할 때, 강헌이는 홀로 고군분투하며 생살을 찢기는 고통을 그대로 감내해야 하겠지.”

“…….”

“네가 정말로 강헌이를 생각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을지 잘 알 거다.”

이 회장의 말에 재희는 그와의 결혼을 단념했다. 이 회장의 말마따나 제게는 힘이 없었다.

연예계에서 쌓은 인맥과 명성과 부는 기조그룹이라는 거대한 사업체를 경영하는 그에게 별 쓸모가 되지 못했다.

언젠가 그가 저 아닌 다른 여자와 정략적인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는 날이 이렇게 갑자기 닥치게 될 줄은.

“결혼식은 언제인데?”

6개월 후일까. 아냐, 설마 그렇게 빠르지는 않겠…….

- 두 달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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