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2화
추연실이 예약해 놓은 숍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은 사빈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한데 강헌은 벌써 카페에 앉아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저도 서두른다고 했는데.”
“앉아요.”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까딱, 턱짓으로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명령이 당연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빈은 별말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바로 계약서 작성하나요?”
서론을 건너뛰고 바로 본론에 직행하는 그녀의 말에 강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천문호 의원의 막내딸은 얌전하고 조신하며 참한 여성의 표본이라고 했었다.
살짝 웨이브를 넣은, 잘 다듬어진 머리카락. 귀에 매달린 작은 진주 귀걸이.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러운 메이크업. 몸매를 살짝 드러내는 심플하고 단정한 연분홍색의 원피스.
겉모습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목소리와 말투도.
그러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에는 온전히 숨겨지지 않은, 날것에 가까운 생생한 감정이 살아 있었다.
그것은 얌전함, 조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존을 향한 강한 의지, 정도일까.
강헌은 그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 또한 저런 눈빛으로 삶을 헤쳐 왔던 시기가 있었기에.
의아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길러진 아가씨가, 보육원에서 하루하루 투쟁하듯 살아왔던 저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다니.
어제부터 차분한 태도와 담담한 말투로 ‘서재희 씨와 계속 연애하세요.’라고 말하던 사빈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녀의 제안이 무척이나 황당해서라는 이유가 크지만, 어쨌든 흥미가 생겼다.
사빈의 말마따나 어쩐지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느낌은 대체적으로 맞는 편이었다. 보육원에서부터 살아남기 위해 길러진 직감은 여전히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두 번째 만남을 제안했고, 그것은 사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집안에서는 무척이나 놀랐다.
“그래서, 천문호 의원의 딸과 결혼을 하겠다는 거냐?”
“아직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
“나쁘지 않은 패다. 정계 쪽에서 고른다면 1순위지. 실은 두원그룹 쪽이 더 탐나기는 하다만.”
이 회장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천 의원 쪽에서 절대로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 천 의원이 딸을 많이 아낀다고 들었다. 아무리 서로에게 좋은 조건이라도 내연녀가 있는 남자에게 딸을 보내려고 하겠냐.”
“회장님. 재희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이라 표현하지 마십시오.”
이 회장은 혀를 찼다.
“쯧.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어쨌든 식 올리려면 최대한 서둘러라.”
“…….”
“그래야 천 의원 딸이 그것의 존재를 알아도 쉽게 헤어지지 못하지.”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어서 일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강헌이 손을 가볍게 들자, 대각선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누구세요?”
“내 비서입니다.”
서류 가방을 정중히 건넨 강헌의 비서는 가볍게 인사한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강헌은 서류 가방에서 꺼낸 봉투를 사빈에게 내밀었다.
“이건?”
“계약서입니다.”
“벌써 작성한 거예요?”
“사업 성공의 여부는 타이밍이니까.”
재희와의 만남을 이어 가도 좋다는 것으로도 모자라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런 여자는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강헌의 마음에 들었다.
사빈을 놓친다면 한동안 쓸데없는 시간 낭비, 즉 맞선을 몇 번이고 더 봐야 한다. 그래서 강헌은 빠르게 결정했다.
사빈과 결혼하기로.
또한 집안에서도 흡족해하며 당분간 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니 더더욱 미룰 필요가 없었다.
“날짜는 두 달 후가 어떻습니까.”
“좋아요. 그보다 더 당겨져도 좋고요.”
강헌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걸까.
천문호 의원은 가족을 아끼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난 강헌이다.
저들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궁금하지 않다.
사연 없는 집안이 어디 있던가. 그리고 심각한 이유이기보다는 그저 철없는 아가씨가 엄격한 집안의 간섭을 벗어나 마음대로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클 터다.
“최대한 앞당겨 보죠.”
자신의 말에 밝아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물론 그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제 말한 대로 각자의 사생활은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합시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사빈이 작게 웃었다.
예고도 없이.
그 갑작스러운 미소에 강헌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홀씨 하나가 얼어붙은 땅 위에 안착한 듯한, 아주 작고 하잘것없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황폐하고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강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홀씨는 이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계약서 살펴보십시오.”
강헌의 말에 사빈은 서류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종이를 꺼냈다.
이강헌과 천사빈은 다음의 항목을 이행한다는 조건하에 결혼을 행한다.
……로 시작되는 계약서는 무척이나 심플했다.
“하나, 해당 계약의 내용은 철저히 기밀에 부친다. 둘, 서로의 사생활은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다.”
“원한다면 서로 합의하에 조건을 추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내용을 밑에다 써 주시겠어요?”
사빈은 차분하고 조용조용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 모습이 인상 깊다고 생각하며, 강헌은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원한다면.”
슥슥 적어 내려가는 글씨체가 무척이나 수려했다. 집중한 얼굴과 만년필을 쥔 손가락도 아름다웠다.
제 이름 옆에 사인하는 강헌의 손가락을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그가 사빈에게 만년필을 건넸다.
“사인하십시오.”
만년필을 받아 든 사빈은 자신의 이름 옆에 사인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왜 그럽니까?”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조건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요.”
사빈이 그의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신혼집을 먼저 구해서 미리 들어가 살고 있어도 될까요?”
예상치 못한 얘기였다.
의아한 강헌의 시선에 사빈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기왕 결정된 김에 빨리 독립하고 싶어서요.”
“…….”
“집은 제가 마련할게요. 아무래도 독립이니까 제가 모아 놓은 돈으로 마련하려는데, 그리 넓지 않아도 괜찮겠죠? 어차피 집에 잘 들어오시지 않을 것 같은데.”
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위치도 제가 정해도 되나요? 되도록 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싶어서요. 가까이에 있으면 또 의존하게 될 거고, 그럼 독립이 아니니까요.”
“…….”
“실은 이미 봐 둔 곳이 있는데, 혹시 수안구는 어떠세요?”
강헌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꼭 오래전부터 결혼을 준비해 왔던 사람 같군요.”
그의 말에 사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언제부터 결혼을 하고 싶어 했는지 알면 당신 놀랄걸요.’
여덟 살.
막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사빈은 결혼을 꿈꿔 왔다.
그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한 지 일주일 후.
태어나 본 적 없던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처음 대면하던 날.
마치 골동품을 감정하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찬찬히 뜯어본 후에 그들이 내뱉은 첫마디 4음절을, 사빈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볼만하군.”
무엇이?
“데려가죠.”
어디로?
물을 새도 없이 사빈은 그들에게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성형외과였다.
“어떻게 자랄 것 같은가?”
큰아버지는 엄마 아빠의 사진을 의사에게 내밀었다.
“꽤 미인으로 자랄 듯하네요. 기대에 미치지 않더라도 조금만 만져 주면 놀랍도록 변하게 될 겁니다. 만지기 쉬운 얼굴이에요.”
그렇게 사빈은 천문호와 추연실의 막내딸이 되었다.
몸이 약해 외국에서 요양하다가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데려온 귀하디귀한 외동딸.
그것이 외부에 알려진 사빈의 사정이었다.
“널 데려와 키우는 것은 내가 베푸는 은혜임을 너는 잊어서는 안 된다.”
“네에…….”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하렴.”
천문호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설명해 주었던 도깨비보다도 더욱 무서운 눈빛에, 사빈은 울지도 못했다.
“네 존재 가치를 증명해라. 아주 쉽단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르면 된다. 알겠니?”
“……네.”
“대답 끝에는 꼭 ‘아버지’나 ‘어머니’를 붙이렴.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잖니.”
“……네, 아버지.”
그날을 떠올린 사빈은 강헌의 만년필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저……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부탁이 참 많은 여자군.
“제가 신혼집에 먼저 들어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강헌 씨가 제 부모님께 말씀드려 주시면 안 될까요?”
간절한 눈빛과 음성은 진심이었다.
“정 내키지 않으시면, 방금 제가 한 말은 잊어 주세요. 부모님께는 말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말 또한 진심이었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가 스륵- 아래로 내려갔다.
“손가락.”
“……네?”
“손가락 부러지겠습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만년필을 꽉 부여잡고 있던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
문득 그의 만년필을 여전히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빈이 얼른 그의 앞에 만년필을 놓았다.
“죄송해요. 흠집은 안 생겼을 거예요.”
“내게 돌려주면 어떡합니까.”
“네? 그게 무슨.”
강헌이 눈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가리켰다.
“천사빈 씨가 사인을 해야 결혼을 할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