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1)화 (1/90)

제01화

사빈과 강헌은 진짜 부부가 아니라 결혼한 순간부터 1년 후에 이혼하기로 약속한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강헌은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고, 사빈은 자유를 얻어 내야 했다.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 그저 눈속임으로만 서로를 안고, 입을 맞춰 온지도 오래.

“하으…… 강헌 씨…….”

달뜬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대는 사빈을 보자 오늘은 정말로 참을 수 없어졌다.

그의 인내심은 진작에 바닥난 지 오래였다.

다시 한번 사빈과 입술을 겹친 그는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헤집으며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졌다.

더 가까이 그녀를 느끼고 싶다.

이렇게 맞닿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당신 안을 거야.”

그녀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이번엔 진짜로.”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잔뜩 날이 선 그의 눈빛.

사빈은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게 옳았다. 그런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가 선사하는 짜릿한 감각에 계속 잠겨 있고 싶었다.

“잠깐,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천사빈.”

그의 목에서 긁힌 듯한 소리가 났다. 그는 말하고 싶었다. 다 털어놓을까. 재희와의 관계를, 그리고…… 자신의 마음도.

“이렇게까지 자극해 놓고 도망가려고?”

“강헌 씨에게는…… 연인이 있잖아요.”

강헌이 그녀를 뒤에서 거칠게 끌어안았다.

“강헌 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로만 생각하면 안 되나?”

낮고 짙은 목소리에 사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하고 나, 둘만.”

“…….”

“제발.”

자신을 원하는 그의 눈빛에 그녀의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정말 몰랐다.

그와 이렇게 될 줄은.

***

사빈은 다짐했다.

맞선을 보게 된다면 상대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곧바로 결혼에 직행하겠다고.

흠이 있으면 더 좋았다.

가령,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다든가.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 여자와의 만남을 포기할 수 없다든가 하는.

그래서 그 여자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결혼을 가장한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남자라면 더욱 좋았다.

만약 그런 조건의 남자라면 사빈은 외모도 집안도 따지지 않고 곧바로 결혼할 생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찾았다.

“천사빈 씨, 맞으십니까?”

내 남편이 될 남자.

“네, 제가 천사빈입니다.”

사빈은 남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소맷부리에 매달린 붉은 보석을 보았다.

이 남자는 분명 방금 전까지 톱 여배우와 밀회를 즐기다 온 남자였다. 자신이 바라는 조건에 딱 부합하는 이상적인 사람을 첫 맞선 자리에서 만나게 되다니.

‘그간의 불운이 한 번에 씻겨 나가는구나.’

***

서울 세인트마리아 로비에 위치한 카페.

그곳이 오늘의 맞선 장소였다.

1시간 전에 도착한 사빈은 비상계단을 찾았다.

첫 맞선에 긴장한 그녀는 잠시 계단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비상문이 금방이라도 열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을 혹여 집안에서 알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창까지 올라갔다.

사빈이 서 있는 곳 바로 위에 있는 계단창에서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빈은 눈을 크게 떴다.

배우 서재희였다.

데뷔한 이래로 한 번도 톱 배우 반열에서 떨어진 적 없는 대스타였다. 그런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연예인으로 추정되는 세련된 분위기의 남자였다.

남자의 손목에서 붉게 빛나는 커프스단추가 눈에 띄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170대 초반으로 알려진 서재희보다 훨씬 큰 것을 보니 180센티미터는 족히 넘는 듯싶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신체 때문에 가뜩이나 여리여리한 서재희가 더욱 가녀리게 보였다. 연인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던 사빈은 그대로 조용히 비상계단을 나섰다.

***

그리고 지금, 사빈은 서재희의 연인과 맞선 상대자로 앉아 있다.

‘대단한 사람과 만나고 있었구나. 하긴, 톱스타니까.’

남자의 이름은 이강헌.

굴지의 대기업인 기조그룹의 외아들이다.

본래 위로 형이 하나 있었으나 어릴 적 스키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후 현재는 이 남자가 유일한 후계자다.

사빈은 배우 못지않은 강헌의 외모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우뚝 솟은 콧대와 적당히 도톰한 입술, 매끈한 피부가 잘 어우러진 얼굴은 마치 뷰티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남자 모델 같았다.

또한 굳이 커프스단추가 아니었더라도 흔치 않은 압도적인 체격만으로 그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세간에선 강헌을 두고 ‘로또 백 번 맞은 사람만큼의 행운아’라고 칭했다.

어릴 적 여행을 갔다가 인파에 휩쓸려 부모님과 헤어진 뒤, 형이 사망한 후 극적으로 찾아낸 재벌가 막내아들.

왕년에 미남으로 유명했던 이서훈 회장의 외모와, 대한민국 최고 사립 여대의 사범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한 모친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외모와 두뇌, 둘 다 우수한, 재계 신랑감 1순위.

그런 남자와의 선 자리를 따내기 위하여 아버지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사빈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빈이 결혼하려는 이유는 그런 아버지의 노고에 부합하기 위함이 아니다.

도망과 탈출.

오직 그 이유뿐이었다.

“이강헌이라고 합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고 차가웠다.

누구도 이 목소리를 거역할 수 없을 것처럼 들렸다.

타고난 카리스마로 업무를 진두지휘한다더니, 보지 않아도 회사에서 그가 어떤 모습일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예.”

잠깐의 정적 후.

“제가 너무 긴장을 해서 잠시 숨을 고르려고 했는데요.”

뜬금없는 사빈의 말에 강헌의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비상계단에 갔다가 보게 됐어요.”

숨을 작게 들이마신 사빈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서재희 씨와 만나고 있던 것을 봤어요. 말씀드린 대로, 일부러는 아니고 우연히.”

시선을 깔고 손목시계를 슥 내려다본 강헌이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요. 맞선은 2시간쯤 본 것으로 하죠.”

“서재희 씨와 계속 연애하세요.”

그 어떤 자리,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할아버지인 이병조 전 회장과 판박이라는 말을 들었던 강헌이다.

“대신, 결혼은 나랑 해요.”

그러나 사빈의 말에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뜻입니까?”

“서재희 씨와 헤어지지 않아도 돼요. 약속할게요. 절대로 두 사람 사이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일어나려던 강헌은 도로 몸에서 천천히 힘을 빼고 소파에 눌러앉았다.

“맞선 보는 거 피곤하지 않아요? 전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강헌 씨는 벌써 여러 번 본 것 같은데. 퇴짜 놓는 방법 생각하기도 지칠 것 같고요.”

“……원하는 게 뭡니까.”

“말씀드렸잖아요, 결혼이라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사빈이 얼른 덧붙였다.

“집이 워낙 엄해서요. 아무래도 이런저런 제약이 많으니까 조금 답답해서.”

집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명예에 흠집을 냈다가는 아버지의 서재로 호출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사빈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적당히 위신 챙기면서 서로 원하는 걸 얻는 게 어때요? 이강헌 씨는 계속 연애를 하고, 저는 자유롭게 살고. 서로 터치하는 거 없이 각자 인생 살아요. 남편, 아내 타이틀만 차지하면서.”

강헌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직원이 주문한 커피와 홍차를 내오고 돌아가고, 사빈이 홍차를 세 모금 정도 천천히 음미할 때까지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사빈은 초조해졌다.

‘만약 이강헌 씨가 거절하면 어쩌지? 오늘 얘기가 아버지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너무 경솔했나. 이 남자의 입이 굉장히 무겁다는 소문을 듣고 질러 본 건데.

1시간 같은 1분이 몇 번이나 지나간 끝에 강헌이 입을 열었다.

“방금 본인이 말한 것, 지킬 수 있습니까?”

사빈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원한다면 계약서를 작성해도 돼요.”

다시 생각에 잠긴 강헌은 이번에는 금방 입을 열었다.

“내일 다시 만나죠.”

사빈의 눈이 커졌다.

지금껏 기조그룹 이강헌이 맞선 상대와 두 번 만난 적은 없다고 들었다.

“저, 정말인가요?”

“오늘과 같은 시간, 장소에서.”

말을 마친 강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빈이 급히 따라 일어났다.

“나랑 결혼하는 거죠?”

그녀를 흘깃 돌아본 그가 차갑게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내일 다시 만나서 얘기합시다.”

***

맞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빈.

“사빈 양, 의원님께서 서재로 오라시네요.”

“……네, 알겠습니다.”

크게 심호흡을 한 사빈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의 문 앞에만 서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괜찮아. 결과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심하게 맞지는 않을 거야.’

똑똑.

문을 두 번 두드린 사빈은 들어오라는 낮은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천문호가 보고 있던 신문을 접고 안경을 빼내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앉아라.”

두 손을 꼭 부여잡은 사빈은 천천히 걸어가 맞은편 의자에 착석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니.”

천문호의 눈빛은 꼭 뱀처럼 서늘하여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버지의 앞에만 서면 늘 이런 기분이다.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독니에 목이 물어뜯길 것만 같은 끔찍한 공포감이 사빈을 지배했다.

작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입술을 뗐다.

“내일 다시 보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말끝이 파르르 떨린 것을 느낀 사빈이 얼른 천문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여태껏 단 한 번도 아버지의 표정을 읽어 내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다.

‘또 벌을 받게 되는 걸까…….’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몇 초가 지난 후.

“잘했다.”

숙인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사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번 맞선을 봤던 상대와 다시 만난 적이 없다지.”

강헌을 말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빈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그놈과 다시 만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일 거다.”

천문호의 눈빛에 보기 드물게 만족감이 서렸다.

“이강헌이 마음에 들도록 처신 잘해라.”

사빈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아버지.”

“네 존재 가치를 증명해 내라.”

천문호가 검지로 책상을 톡, 톡, 간헐적으로 두드렸다.

“지금까지 집안에서 네게 투자한 비용과 시간을 잊지 말고.”

“……네, 아버지.”

얌전히 대답하는 사빈을 바라보던 천문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요즘 남자들은 그리 네네 거리는 여자들을 재미없어한다던데.”

“…….”

“적당히 아양도 떨고 애교도 부려. 무슨 수를 써서든 이강헌이 시선 붙잡아 놔.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않게.”

야망에 젖은 그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강헌이와 결혼해서 기조그룹에 시집을 가야 한다. 알겠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지.”

“나가 봐라.”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일어난 사빈이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내일.”

문고리를 향하던 손을 내린 사빈이 얼른 천문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 어머니 통해 예약 잡아 놓으라 할 테니 관리 받고 가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가 봐라.”

고개를 숙인 사빈이 서재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문을 닫은 뒤에야 그녀는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하아…….”

긴장이 풀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침대 위에 철퍼덕 쓰러진 사빈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언제쯤 이 집을 나갈 수 있을까.’

언젠가 벌을 받은 뒤 혼잣말이랍시고 천문호를 욕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좋으면 자기가 시집을 가든지.]

그리 심한 욕도 아니고, 큰 소리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 청소를 하다 사빈의 말을 듣게 된 가사 도우미가 어머니에게 일러바쳤고, 결국 그날 저녁에 사빈은 또 벌을 받아야 했다.

“빨리 결혼하고 싶다.”

나직한 속삭임에는 설렘이나 달콤한 감정 따위는 묻어 있지 않았다.

“제발 결혼해 주세요, 이강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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