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안녕, 소티스 (4)
채 열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멘데즈 황성에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혼돈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멘데즈와 베아툼 전역을 들썩이던 영혼 문제들은 점차 가라앉았고, 구심점을 잃은 악령술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소문으로는 베아툼의 국왕이 복지 정책을 펼쳐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을 구제할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북부로 떠난 에드먼드는 이따금 회한의 감정이 절절하게 적힌 보고서를 보내 왔다. 오로지 실력과 노력만으로 그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티스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편지를 찢거나 태우지도 않았다. 그저 한 글자 한 글자 차분히 읽고, 레먼에게 보관해 달라 부탁할 뿐이었다.
멘데즈의 황제가 된 아벨은 안정적으로 정무를 이어 나갔고, 소티스의 안정을 이유로 근 일 년을 머무르게 된 베아툼의 마법사들을 귀빈으로 극진히 대우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마리아네스가 황성으로 다시 올라와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멘데즈에서 오래 머물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어쩔 수 없지, 안정기가 너무 늦게 오기도 했고. 그래도 소티스를 모셨던 시녀들이 많이 도와주었으니 잘된 것 아니겠나.”
“하긴, 그렇겠네요.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셔도 됐을 텐데…….”
“어허.”
알베스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대부가 될지도 모르는데 자리를 지켜야지. 알베스 마탑이야 어차피 다른 마법사들이 잘해 줄 테고, 나도 슬슬 퇴물이니 자리를…….”
“대부는 누가 대부예요?”
깐깐한 목소리에 두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휙 돌아갔다.
거기에는 허리에 손을 척척 얹은 두 여자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로 불만을 피력하고 있었다.
“대모는 당연히 저! 퀘렐라 에니드죠. 따져 볼 것도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레먼 페리윙클의 아이인데, 마법사가 아닐 수가 있겠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입문 마법사를 교육하는 데 아주 도가 텄거든요. 제가 바로 하늘이 내린 대모감이에요!”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이 질세라 소리쳤다.
“무슨 소리! 원래 아이의 부모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도맡는 게 상식인 거 모르세요? 마리아네스 로즈우드! 소티스의 유일무이한 친구! 저만큼 소티와 가까운 사람이 있나요? 이 대륙을 뒤져도 없죠, 그렇고말고요! 대모는 무조건 제가 되어야만 해요! 게다가 전 사교계에 대한 지식을 아낌없이 물려줄 수도 있어요!”
“저기, 두 분…….”
레먼이 곤란한 얼굴로 양손을 들어 보이자 퀘렐라와 마리아네스가 무시무시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도둑놈은 조용히 해!”
“맞아, 조용히 하시죠!”
“저…….”
옆에서 끼어들 타이밍을 찾지 못한 아벨이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나도 대부가 되면 안 되는 건가?”
“이건 베아툼 왕국의 일이거든요!”
“안 될 소리!”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합니다, 폐하!”
저마다 자신이 대모나 대부가 되어야 할 이유를 열심히 연설하는 가운데, 팔짱을 낀 채 혀를 차던 유일한 여인이 약 올리듯이 말했다.
“애석하네요. 전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이모인데.”
셰릴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어렸다.
“자매 좋은 게 다 뭐겠어요? 아, 언니 한번 잘 뒀다니까.”
“아…….”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러움 섞인 탄식을 쏟아냈다.
승리감에 당당해진 셰릴이 제 남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물었다.
“역시 조카끼리는 나이 차이가 적은 게 좋겠지, 여보?”
무뚝뚝한 렉투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귀 끝이 붉어진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그는 재빨리 셰릴을 번쩍 안아 들더니, 아벨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급한 용무가 생겨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누가 봐도 의도가 빤한 그 말에, 아벨은 웃으며 그를 보내 주었다.
“하하, 아하하. 그래. 들어가 보게.”
셰릴이 사라지자 정원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마리아네스와 퀘렐라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대모가 둘일 수는 없어요. 아예 지금 결판을 짓는 게 어때요?”
“어머! 바라던 바예요. 전 두려울 게 없거든요. 하지만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 아니겠어요?”
“하긴, 아무리 퀘렐라 님께서 우리 소티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라고 해도 소꿉친구를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다 이해한답니다.”
부채를 착 펼치며 얄밉게 웃는 마리아네스에게 퀘렐라가 삐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티스 언니는 아이를 낳거든 바로 베아툼으로 내려갈 텐데, 세톤느 제4왕자와 약혼한 마리아네스 님과의 거리는 또 얼마나 멀어지겠어요?”
“…….”
아차. 마리아네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그녀의 우울한 시선이 자신의 왼쪽 약지로 떨어졌다.
실제로 이야기를 좀 나눠 보니, 세톤느의 왕자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마리아네스를 보고 반했다면서 황성에 머무르며 몇 번이고 대화를 요청했는데, 말도 잘 통하고 정중하기까지 했다. 자연히 마음이 기울어서, 얼마 전 제 약혼녀가 되어 달라는 낭만적인 고백에 그러겠다며 손을 내민 것까지는 좋았으나…….
베아툼과 세톤느가 멀어도 너무 멀다. 소티스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기뻤던 나머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마리아네스의 녹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설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치사하게 거리로 공격하다니! 멀어도 챙겨 주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게다가 이참에 세톤느와 국교를 트면 되잖아요? 그리고 언젠가 저도 아이를 가지게 될 거잖아요. 아니다. 이럴 게 아니라 저도 남쪽으로…….”
“그건 안 될 말이죠. 가까운 지역끼리 해결하자고요. 어디 보자, 세톤느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은…… 웰트 대공령이네요? 그래, 나중에 아기님을 낳으시거든 에드먼드 전하께 대부라도 되어 달라 부탁드려 보시죠! 그쪽이랑도 소꿉친구시잖아요?”
“에드먼드는 반성하려면 아직 멀었단 말이에요! 걘 안 돼!”
두 사람의 불꽃 튀는 싸움에 질려 버린 알베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지지든 볶든 둘이 알아서 해라, 난 모르겠다. 늘그막에 외로워서 손녀 키우는 마음으로 대부나 하려고 했던 건데…….”
그러자 애나가 눈을 깜빡이며 알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외로우세요, 알베스 님?”
“…….”
알베스가 잠시 고민하더니 주머니에 있는 과자를 꺼내 애나에게 건넸다.
“이 늙은이가 적적하지 않게 네가 많이 놀러 와 주려무나.”
“적적하긴요, 스승님.”
레먼이 볼멘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뒤늦은 육아에 기뻐하실 땐가요. 돌아가시면 원로회에서 스승님을 하루도 못 쉬게 달달 볶아 댈 텐데, 아이를 봐주실 틈이나 있겠습니까.”
“이놈아! 너나 잘해라, 너나. 퀘렐라가 준 육아 서적은 아직도 못 익혔느냐? 그러니 매사 구박이나 받지.”
“그래!”
승기를 완전히 잡은 퀘렐라의 다음 목표는 레먼으로 결정되었다.
“아기 안는 방법도 엉망진창이어서 혼난 게 고작 이틀 전인데, 어떻게 기저귀 가는 법을 버벅거릴 수가 있지? 이런 걸 완벽하게 익혀도 막상 애가 태어나고 나면 다 잊어버리고 허둥거리기 일쑤라니까?”
그녀가 깐깐한 목소리로 레먼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마음 약한 소티스 언니가 ‘어머, 괜찮아요. 저도 엄마니까 함께 돌봐야죠’ 같은 소리를 하는 날이면 그날은, 어? 알지?”
“퀘렐라…….”
“낳아 주기까지 했으면 책임은 아빠가 지란 말이야!”
“아, 알겠으니까.”
레먼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알려 줘, 기저귀 가는 법. 그리고 분유 타는 법도. 유모를 두는 것보다 내가 직접 하는 게 아이에게 좋다는 거지?”
“어휴. 그걸 말이라고! 사람을 쓰더라도 자기가 다 할 줄 아는 걸 시켜야 하는 법이거든요! 숙모님 말씀처럼 남들보다 꼭 한 발짝씩 늦…….”
문득, 자신이 격의 없이 레먼을 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퀘렐라가 말을 우뚝 멈추었다. 그녀가 어색한 시선으로 레먼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대했더라. 마치 엘디카가 죽기도 전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서슴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높직하게 세워져 있던 장벽은 온데간데없었다.
움찔한 퀘렐라가 눈을 내리깔며 침묵하자 레먼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네가 우리 아이의 대모가 되어 줬으면 좋겠는데, 퀘렐라.”
“…….”
“내가 부족해도 네가 많이 도와줄 테니까.”
가장 부드러운 것으로만 골라낸 진심이 전해졌다.
이런 다정함 앞에서 퀘렐라는 한없이 약했다. 정말이지.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콧잔등을 긁었다. 소티스와 만나더니, 영락없이 제 아내를 꼭 닮아 가지 않나.
“당연하지. 한참 멀었어!”
그 순간 한곳에 모여 웅성거리는 이들 사이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소티스 님!”
“언니!”
“소티!”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 소티스가 멋쩍게 웃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너무 지루한걸요. 의사가 이제 조금씩은 움직여도 좋다길래……. 그리고 우리 아가가, 아빠가 보고 싶은지 자꾸 조르네요.”
소티스의 배는 어느새 많이 불러 있었다. 의사가 말하기를 출산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원체 몸이 약하고 아기의 상태도 불안정해 몇 차례 위기가 지나갔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아이와 소티스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소티스 역시 최선을 다해 아기를 지키고 돌보았다.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다며 단발머리를 유지한 그녀는 예전에 비해 조금 더 발랄해 보였다. 환히 웃는 일도 더 많아졌다. 머리를 기르지 않는 건 혼돈과의 싸움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 사실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희 아이 말이에요.”
그녀의 아이는 특별했다.
아기의 감정은 점점 강해져서, 퀘렐라는 부푼 배 안쪽에서부터 울려 오는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그 감정들은 분명한 기대, 그리움, 고마움, 그리고 애정을 담고 있었다.
알베스 역시 비슷한 것을 느껴, 그 아이에게서 독특한 기류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불안해 보이던 파장이 안정되고 나서부터는…… 놀랍게도, 그것은 역대 혼돈들이 보였던 마력의 흐름과 닮아 있었다.
“태몽이었어.”
그 이야기를 들은 레먼은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엘디카 님께서 주셨던 붉은 빛, 소티스 님께서 보았던 붉은 나비. 모두가 태몽이었어요.”
“그럼 제게 흡수된 영혼이…….”
“우리의 아이가 되어 주는 걸까요?”
그날 소티스는 밤새도록 울었다. 반가움과 그리움,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눈물이 끝없이 흘러넘쳤다. 레먼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다가, 이내 소티스의 마른 몸을 끌어안고는 함께 울고 말았다.
가장 불행했던 것이 가장 큰 기쁨으로 돌아오는 날이 올 줄이야.
“이름을, 핀이라고 지어 주고 싶어요.”
“핀…….”
“핀 페리윙클.”
완연한 봄의 볕을 쬐던 이들의 얼굴에 더없이 환한 미소가 어렸다.
“잘 어울리네요.”
“반드시 행복해질 것 같은 이름이에요.”
“당연하죠, 누구 딸인데. 어떤 불행도 씩씩하게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가 될 거예요.”
소티스는 양손을 배에 얹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두근, 두근. 제 것이 아닌 심장 고동 소리가 전해졌다. 제 손바닥에 꾸욱, 조그만 손이 다가와 함께 맞대는 것도 느껴졌다.
너도 나를 다시 만날 날이 기대되니? 소티스가 웃은 채로 속으로 되뇐다.
나도 그래. 나도 기대돼. 그리고 무척 보고 싶어.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당신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곳으로 와 주세요.”
가장 불행했던 여인은 그 약속을 보란 듯이 지켜 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자신이, 가장 행복한 미래를 선물할 차례였다.
모든 잔인한 운명을 벗어던지고, 가장 반짝이는 내일로 모든 생을 채울 수 있기를.
“소티스 님.”
레먼이 다가와 소티스의 손을 잡고 이마를 맞댔다.
그는 마치 소티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네, 레먼.”
“저도 우리 아이를 얼른 만나고 싶어요.”
우리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날까. 그리하여 이 세상을 얼마나 씩씩하게 헤쳐 나갈까.
어떤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함께 손을 맞잡는다면, 진심으로 대한다면 못 할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 기다림이 아무리 길어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태양은 반드시 떠오르니까.
“이제 함께 있어요.”
신이여, 가장 가엾은 것을 굽어보소서.
당신의 품에서 모든 존재의 죄를 전부 씻게 하시고,
그리하여 아무도 슬프지 않을 내일을 주소서.
그리하여, 가장 선한 것이 기어이 승리하고 마는 세상이기를.
사라지지 않고,
살아갈 내일을 위하여.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