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안녕, 소티스 (3)
애석하게도, 페리윙클을 엮은 화관을 쓰고 결혼하겠다는 두 사람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큰 병일까요?”
레먼은 초조한 듯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는 굳게 닫힌 문 앞을 오가며 방 안에서 누가 나와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차분하고 온화했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글쎄요…….”
퀘렐라와 알베스, 그리고 애나는 그런 레먼을 보고도 부산스럽다며 핀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표정이 더 심각해질 때도 있을 정도였다.
“혹시 소티스 님께서 남몰래 고민하시던 일이라도 있었을까요? 그래서 몸이 상했다던가.”
퀘렐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말 못 할 고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감정적인 동요는 크지 않았어요. 최근 언니는 생각보다 평온한 상태였거든요. 정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신체적인 변화에 가까울 거예요.”
그럼 역시 의사가 이렇게 오래 고민할 정도라면, 중병에라도 걸린 걸까.
아니, 아니지. 그런 불길한 생각은 시작조차 말아야 한다. 레먼은 얼른 고개를 젓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그의 낯빛은 여전히 희게 질려 있었다. 연인이 이렇게 아플 줄도 모르고 베아툼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 자신이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간으로만 느껴졌다.
소티스 메리골드가 쓰러졌다. 오늘 아침, 베아툼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의 일이었다.
두고 온 물건을 가지러 갔던 레먼 대신 아벨이 소티스를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소티스는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복통을 호소하며 끙끙 앓던 소티스가 그대로 의식을 잃자마자, 아벨은 그녀를 가장 가까운 방으로 안아다 옮기며 의사를 불렀다.
그 이후, 의사가 소티스를 안정시키고 살피는 내내 남은 사람들은 불안한 기색으로 복도를 서성이며 시간을 헤아리고만 있었다.
“그런데요, 오늘은 좀 이상하기는 했어요.”
정적을 깨뜨린 건 퀘렐라였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굳게 닫힌 문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언니에게서 낯선 감정이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낯선 감정?”
“네, 그러니까…… 정확히는 엉뚱한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벽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알베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음.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의 감정을 일종의 목소리처럼 비유해 볼게요. 소티스 언니의 마음은 굉장히 조곤조곤하면서도 부드럽고, 한편으로는 단단한 목소리란 말이에요.”
“…….”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그 사이에 낯선 목소리가 잡음처럼 끼어 있었어요. 언니가 평소에 보여 주던 감정과는 결이 조금 달랐어요. 좀 더 날카롭고, 불안정하고, 또 작았거든요.”
애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여태 그런 적이 없었단 말이지.”
레먼이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퀘렐라에게 물었다.
“어떤 감정인지 기억하십니까?”
레먼의 질문에 퀘렐라가 고민할 동안 알베스 또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는 무언가 예감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레먼을 보았다가,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내젓기도 했다.
“어렴풋하기는 했는데요.”
“…….”
“불안감, 초조함, 그리고 반가움, 기대, 기다림. 그런 것들이었어요.”
기다린다고? 뭘?
레먼이 퀘렐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애나는 놀라서 거의 펄쩍 뛰어오를 정도였다.
“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의사는 겸연쩍은 듯했다. 심지어 새 황제마저 복도를 지키고 서 있으니 더 부담스러울 만도 했다.
레먼이 얼른 의사에게 질문했다.
“소티스 님께서는 많이 아프십니까?”
“지금은 좀 어떻고요?”
“……큰 병입니까?”
“의식은 있고?”
“잠깐, 잠깐만요!”
의사가 황급히 소리치며 쏟아지는 질문을 막았다.
“그…… 소티스 님의 남편 되시는 분…….”
“남편이요? 없는데.”
퀘렐라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대신 남편 될 사람은 있어요.”
“아.”
의사가 황급히 레먼을 바라보더니 방 안쪽으로 안내했다. 한 뼘쯤 열린 문 너머로는 정신을 차린 소티스가 상체를 살짝 기댄 채 앉아 있었는데, 어딘가 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오시죠.”
레먼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의사가 덧붙였다.
“소티스 님께서 아기를 가지셨습니다.”
“…….”
“…….”
순간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쩍 얼어붙은 공기에 의사는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불안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자신이 막 방에서 나왔을 때 그토록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게 무색하게도, 이제는 아무도 저를 바라보지 않았다. 남국의 대마법사라던 노인도,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의 붉은 머리 여인도, 조그마한 아이도, 심지어 무뚝뚝하기로 정평이 난 새 황제마저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퀘렐라였다. 그녀는 빛살처럼 나서더니 레먼의 등을 후려쳤다.
“도둑놈!”
퍽 소리가 엄청 크게 났던 것 같은데. 알베스와 애나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레먼은 그 한 대로 정신을 번쩍 차렸는지 제 등을 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퀘렐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도둑놈! 그 몇 달을 못 참고 감히 언니한테 손을 대!”
“그, 그게…….”
“짐승!”
“…….”
“우리 언니를!”
레먼이 얼떨결에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언니가 좋아하니까 봐주는 줄 알아!”
“…….”
“뭐 해? 빨리 안 들어가? 홑몸도 아닌 언니를 고생하게 둘 셈은 아니겠지? 가서 언니 앞에 무릎이라도 꿇으란 말이야!”
퀘렐라의 일갈에 레먼과 의사가 허겁지겁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벨은 웃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보다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덩달아 눈치를 살피던 알베스와 애나 역시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고, 퀘렐라도 혀를 차며 함께했다.
***
“여태 아기님께서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불러도 될 수준입니다. 소티스 님의 몸 상태도, 아기님의 상태도 무척 나빠요.”
“그렇군요…….”
“마차 이동은 당연히 안 되고, 당분간은 거동조차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기운을 좀 찾아 주는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로즈우드 공녀께서 고용하셨던 기력술사들을 다시 불러오라 했으니, 닷새 내로는 오겠지요. 그전까지는 먹고 마시는 모든 걸 제게 허락받으셔야 합니다!”
“무조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사가 깐깐한 얼굴로 레먼에게 당부했다.
“다시 말씀드리는 거지만, 산모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아기님이 어떻게든 버티신다고 해도, 소티스 님께서 못 버티시면 끝이에요.”
그 말은 레먼에게 치명적이었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레먼은 고개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끄덕였다.
“제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겠습니다.”
아이가 들어선 지는 두 달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산모의 몸이 너무 약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유산되지 않은 건, 어쩌면 신의 뜻이었을지도 모른다면서 의사는 기도하는 말을 몇 마디 중얼거렸다.
“아기님께도 해가 되지 않을 수면제를 지어 드렸으니, 곧 잠이 올 겁니다. 한숨 푹 쉬시고 나면, 당분간은 부담스럽지 않을 음식으로 조금씩 드십시오.”
소티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레먼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양손으로 소티스의 하얀 손을 쥐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던 그가 이내 손등에 이마를 댄 채 속삭였다.
“이게 꿈은 아니겠죠, 소티스 님…….”
“꿈, 꿈이요?”
소티스가 불안한 눈길로 레먼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내어 주지 않은 손으로는 제 납작한 배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왜 그렇게 아픈가 했더니 제 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임신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어려운 일들을 소화했으니 당연할 만도 했다. 아직 이름도 무엇도 없는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죄송해요. 혹시 원치 않은 일이었다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레먼이 깜짝 놀라 외쳤다가 퀘렐라의 눈총을 받았다.
“목소리 안 낮춰?”
고개를 주억거린 레먼은 숫제 울 것 같은 얼굴로 소티스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저는, 저는 너무 좋습니다. 심장이 터질 만큼 기뻐요. 소티스 님이 많이 놀라셨을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었습니다.”
“…….”
“일의 순서가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허락만 해 주신다면, 당신을 위해 뭐든지 할게요.”
제 손을 틈 없이 감싸 잡은 손이 뜨거웠다. 맞닿은 살갗 너머로 두근거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살짝 상기된 뺨은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또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듯했다. 보석 같은 호박색 눈동자는 반짝이며 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좋아요.”
소티스가 한참 만에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얼떨떨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기쁨이 조금씩 찾아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였다.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으니, 신이 깜짝 선물을 내려 준 거라 믿어도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웃을 수 있었다. 더없이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꽃이 만개하듯 퍼져 갔다.
“힘내서, 아이도 잘 지킬 테니까…… 옆에서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레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소티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레먼.”
“네, 소티스 님.”
“레먼.”
“네.”
“…….”
“네, 부인.”
그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소티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자, 소티스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딸이 좋아요, 아들이 좋아요?”
“저는…….”
그제야 레먼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티스 님과 제 사이의 아이라면 어떻든 좋아요…….”
구름 한 점 없는, 더없이 화창하고 완벽한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