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안녕, 소티스 (2)
베아툼으로 떠나기 전날, 레먼 페리윙클은 꿈을 꾸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이들이라 새삼스럽다 못해 이상할 지경이었다. 레먼은 저를 향해 선선히 웃는 사람들을 보고, 지금이 제 꿈속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부르고 싶었다. 마주 보고 선 채 그리웠다는 듯 웃고, 눈물을 글썽이고, 때때로 이름을 부르고, 금방이라도 끌어안으려는 듯 팔을 벌리는 이들에게 똑같이 해 주고 싶었다.
“…….”
그러나 꿈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리웠던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하다못해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그저 망연하고 애처로운 눈길로 그토록 사랑했던 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일행의 가장 앞에 있던 여인이 말했다.
“레먼.”
엘디카의 음성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오랜만이구나, 내 미진한 제자야.”
다른 이들 역시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제야 겨우 만났네.”
“그래, 보고 싶었다고.”
레먼은 굳은 채 눈을 크게 뜰 뿐이었다.
혼돈과의 지난 싸움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적어도 그들을 잃었다는 현실을 차분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는 있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상처에 어설프게나마 딱지가 질 동안, 그들은 저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꿈에 얼굴 하나 비치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올 수가 없었단다.”
엘디카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가 너를 찾아왔다면, 너는 필시 상실에 매몰되었을 거란다. 그걸 바라지 않았어.”
“그래. 죽음이 원통하고 서글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이를 해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왜…….”
시간이 조금 지나자, 레먼은 힘겹게나마 입을 열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몸이 조금 풀리자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마지막이니까.”
엘디카가 웃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헤맸어. 이제 그만 사라지고 싶을 만큼.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소멸이 가장 가치 있게 쓰일 만한 일을 찾아내고 말았지.”
“…….”
“그리고, 지금은 너를 만나도 괜찮을 것 같더구나.”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레먼은 그들의 죽음에 눈물지을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 정도는 강해졌다. 곁을 지켜 주는 좋은 이를 만난 덕분이기도 하다.
“페리윙클의 이름에 걸맞은 대마법사가 되었구나. 훌륭해.”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에 레먼은 무언가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사무치게 그리운 이들이었다. 눈앞에서 처참하게 스러져 간 이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혼돈과의 마지막 전투에 임했던 이들의 반은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남은 반을 간신히 갈무리했지만, 무엇이 그리 원통한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였다.
그런 이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남은 세월이었다. 유산처럼 남겨진 제 목숨을 차마 내던지지 못해 하루, 그들이 잃어버렸던 내일이 원통해 대신하는 마음으로 하루, 떳떳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또 하루, 그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지 않기 위해 하루 더…….
그렇게 견뎌 낸 세월 속에서 그리움은 애써 뭉툭해졌다. 살기 위해 그 감정의 끝을 갈아 냈다. 제법 많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했다.
“우리는 사라져야 해, 레먼. 그리고 너는 미래로 나아가야 하지. 그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숙명이야.”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셨다고요.”
“그래. 그리고 줄 것도 있고.”
엘디카가 한쪽 팔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전신을 옭아매는 듯한 힘이 풀렸다.
레먼은 얼른 앞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욕심껏 끌어안았다.
“엘디카 스승님. 선배님들, 그리고 규율들이시여…….”
맞닿은 몸에서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안았다는 관념적인 감각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레먼은 원치 않았으나 그들의 부재를 다시금 실감했다. 서늘하고 쓸쓸한 감각이 가슴을 채우고, 목 끝까지 차올라 서글프게 찰랑거렸다.
엘디카가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레먼에게 건넸다. 투명한 것의 안에는 붉고 반짝이는 빛이 한 점 들어 있었다.
“소티스의 힘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막기는 했지만, 아직 무엇이 되기에는 너무 약하고 작은 영혼이어서.”
“그래서 우리가 힘을 보태기로 했지. 알잖니, 우리는 페리윙클의 마법사들이니까.”
“이건 우리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선물이란다, 제자야.”
엘디카가 고개를 들어 레먼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의 마지막 규율에게도 인사를 전해 주렴.”
“스승님.”
“약속해야지?”
레먼은 입술을 꾹 깨물며 대답했다.
“……예.”
“그래. 우리는 떠날 테니…… 너도, 소티스도.”
“…….”
“떠난 사람일랑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그래도 되나요?”
“그래도 되냐니.”
항상 살아남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무능해서, 한없이 보호받는 처지라서, 그래서 다른 훌륭한 이들의 목숨을 발판 삼아 차오르는 물을 피해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이 목숨은 제게 기회인 동시에 빚이었고, 의무인 동시에 형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삶이 기꺼우면서도 힘겨웠다.
“네게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단다.”
“…….”
“삶은 하나뿐이고 시간은 절대로 되돌아가지 않으니.”
목소리들이 앞다투어 말하고 있었다.
“행복하게 살아야지, 치열하고 열렬하게.”
“불행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은 생이야.”
“규율에게 안부를 전해 주렴.”
“우리는 괜찮다고.”
“고생 많았다고.”
“우리가 생각했던 최선보다 더한 기적을 보여 줘서 고맙다고.”
“그러니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엘디카가 성큼 물러섰다. 분명히 꽉 안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의 모습이 속절없이 흐려졌다.
레먼은 망연한 기분이 되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흩어지고, 희미해지다가, 이내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안녕, 레먼.”
“안녕, 소티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들이 남기고 간 유일한 물건인 구슬이 따뜻한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그러다가 레먼이 울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 구슬은 눈처럼 녹아 그의 안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져 버렸다.
행복해야 해.
그 말만이 각인처럼 남아, 그의 기억에 서글프게 파고드는 꿈이었다.
***
“무슨 꿈을 그렇게 꿔요?”
눈을 뜨자마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그를 당겨 안았다. 그 체온에 레먼은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포근하고 다정하다.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여전히 조금 얼떨떨한 마음으로 소티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가 뒤척거리던가요?”
몸을 살짝 움직여 레먼의 위에 엎드린 소티스가 그의 뺨과 눈가를 쓸어 주었다.
“우시던걸요. 슬픈 꿈이었어요?”
“조금요.”
레먼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다가 손끝에 낱낱이 입을 맞추었다.
“스승님과 선배님들을 만났어요. 그간 한 번도 꿈에 나타나신 적이 없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소티스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의 콧잔등에 제 코끝을 대며 웃어 보였다.
“이제는 만나도 괜찮겠다, 싶으셨던 건 아닐까요? 다정한 당신이라면 분명 죄책감과 슬픔을 느꼈을 테니까요. 아니면……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찾아오셨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사실 저도 며칠 전에 기이한 꿈을 꾸었거든요.”
레먼은 대답 대신 소티스의 머리를 가만히 넘겨 주었다. 그녀는 그 손길에 기대며 종알종알 말했다.
“수십 마리의 나비가 제게 날아오는 꿈이었어요. 그대로 제게 부딪히거나 통과할 줄 알았는데…… 스며들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 한 마리는 붉은 나비였어요. 그대로 가지 않고 제 근처를 맴돌다가, 손을 내미니 그곳에 잠시간 내려앉아 있다가 가더라고요.”
“…….”
“그건 뭐였을까요?”
레먼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나비는 영혼을 의미하는데…… 그 영혼이 한꺼번에 소티스 님을 찾았다는 건, 좋은 의미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 수도 있어요. 전체적으로 그 꿈이 불길한 느낌이었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고개를 느릿느릿 내젓더니 쪽, 소리 내어 입술을 맞댔다가 떨어졌다.
“내일이면 베아툼으로 가는 거니까, 그곳의 영혼들이 절 반기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제 더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인도해 주지는 못하지만요.”
“그보다도 당신의 몸 상태가 더 걱정이에요. 아직도 입맛이 없다고 하시니…….”
레먼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여기가 베아툼이었다면 일단 의사를 데려왔을 테지만, 손님으로 온 상황에다가 황성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소티스에게 진료를 받아 보자며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행이 끝나고 나서부터는 몸이 조금씩 나아지는 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의 걱정을 읽은 소티스가 방긋 웃으며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마탑에 도착하면 한동안 제가 게으름을 피워도 조금만 봐주세요. 몸이 좀 나아지고 나서는 심부름이라도 할 테지만요.”
“궂은일 같은 건 안 하셔도 돼요. 대신, 소티스 님께서는 결혼식 준비를 해 주세요.”
“결혼식…….”
약속이야 했지만, 새삼스러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티스의 얼굴이 붉어지자 레먼이 웃으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아직 여름철 꽃이 다 지지 않았을 때니까요. 느지막하게 핀 페리윙클을 엮어 화관을 만들고, 온실에서 키워 낸 장미로 부케를 만들면 소티스 님께 무척 잘 어울릴 거예요.”
소티스는 자신이 한번 치렀던 적이 있는 결혼식을 떠올렸다. 그때도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썼다. 부케를 꼭 쥐어 긴장을 달래며 단상 앞에 섰던 기억이…… 어쩐지 지금은 조금 흐릿하게 느껴졌다.
다만 당시의 기억은 추억이라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어땠더라. 긴장됐으며 불안했고, 앞으로의 일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기대돼요.”
소티스가 레먼에게 기댄 채 속삭였다.
“당신과 결혼하고, 함께 살고, 그렇게 손잡고 늙어 갈 수 있어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궁금했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필시 이 사람의 곁이 따뜻해서겠지.
소티스는 팔을 뻗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를 힘껏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