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17)화 (118/121)

117화. 안녕, 소티스 (1)

“소티스 님, 일어나세요.”

소티스는 불쾌하고 축축한 감각에 둘러싸인 채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더라. 몸이 무겁고 속이 여전히 울렁거리는 데다 눈꺼풀에 바위라도 매단 듯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레먼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그는 한없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조금 더 주무시겠어요? 바깥에 말을 전하고 올 테니 나가지 말고 누워 계세요.”

“나가지 말고…….”

그제야 그녀는 오전에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았다.

오늘은 에드먼드가 황성을 떠나는 날이다. 귀족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잃은 몇몇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중 메리골드 공작에게는 아예 추방령이 내려졌다. 황실을 기만해 사욕을 채우고, 무리한 성 증축 공사로 사람들을 다치거나 죽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 새로 즉위한 아벨이 더한 처분을 내릴 가능성이 있어서, 공작은 독을 마시는 기분으로 황명을 받아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후에는 아벨의 즉위식이 있었다. 새 황제의 요청으로 간단하게 진행되기는 한다지만, 어쨌든 황실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점은 여전했다.

“배웅……해야지요. 전할 말도 있고.”

오늘 있을 일을 간단히 정리한 소티스는 반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밤새 흘린 식은땀 때문에 몸이 찝찝하고 불편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소티스 님.”

레먼이 여전히 불안한 눈길로 소티스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소티스는 밤새 악몽을 꾸었다. 지난 일을 그저 덮어 두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상처로 인식하고 극복하게 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울며 깨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레먼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몸 상태는 점점 나빠져만 갔다. 소티스는 여독이 쌓인 데다 마법을 잃은 여파로 그런 것이니 의사를 부르지 말라고 했고,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었지만…….

그러지 말 걸 그랬다. 레먼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속이 울렁거리고 피곤한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이제는 배 안쪽이 당기는 복통과 어지러움마저 호소했다.

큰 병이면 어떡하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으나 불안해지는 것까지 막을 방법이 없었다.

“괜찮아요.”

소티스가 살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창백하고 여린 손바닥에 레먼이 고개를 숙여 제 뺨을 기댔다.

“제가 도와드릴 것은 없나요?”

소티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두 가지 정도 있어요.”

“들어드릴게요.”

그의 확신 어린 말투에 소티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뭘 부탁할지도 아직 안 들으셨어요.”

“그건 지금부터 여쭈면 되겠네요.”

“정말이지…….”

다른 한쪽 손도 올려 레먼의 양 뺨을 감싼 소티스가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편지지를 준비해 주시겠어요? 넉넉히요.”

“네, 그럴게요.”

그는 순종적으로 대답하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상처투성이 손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혹여 그 가벼운 입맞춤으로도 상처가 눌려 아플까, 한없이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두 번째 부탁은 무엇인가요?”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레먼의 호박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느리게 깜빡이며 소티스의 모습을 담았다.

“그게…….”

소티스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방금 이루어져서요.”

입 맞추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레먼이 손바닥에 입술을 꾹 눌러 버린 뒤라, 더 청하기도 무안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한 레먼의 얼굴에도 열이 홧홧하게 올랐다. 그는 조금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잠시 피했다가, 이내 기쁜 얼굴로 다시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소티스의 몸이 조금 따뜻해서인지, 닿아 온 입술은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짧은 입맞춤이었을 뿐이었다. 붙어 있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아쉽게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토로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알아요.”

소티스가 이마를 맞대며 웃었다.

“저도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그 말을 들을 때면…….”

레먼이 꿈을 꾸는 듯, 붕 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요, 소티스 님.”

***

“조건이 있어요.”

소티스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건넨 편지지를 받아 들던 에드먼드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는 희망을 품어야 좋을지, 절망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소티스는 문득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얼굴이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에드먼드는 조금 수척해 보였고, 눈 밑에 드리운 그늘 때문인지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주변을 헤매다가 소티스를 응시했고, 이내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를 감히 쳐다볼 수 없다는 듯 발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마 그런 얼굴을 보고도 가엾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 이유는, 그를 향한 사랑이 이미 어떤 빛도 품지 못할 만큼 퇴색된 뒤여서겠지.

“그래. 듣겠다.”

에드먼드의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감정 중 절망이 조금 더 우세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소티스의 통보만을 기다렸다.

“제가 어떤 조건을 제시할 줄 알고 듣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대는 무리한 조건 같은 걸 이야기한 적이 없었어. 평생 그랬지.”

소티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도 언제나 제 부탁이라면 덮어 놓고 거절하셨잖아요, 같은 원망의 말이 무심코 나올 뻔한 까닭이었다.

그런 식으로 과거를 헤집어 봤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후련함은 잠시뿐, 공연한 말을 했다며 후회할 자신의 성격을 알았다.

그러니 그러지 않기로 했다. 소티스는 편지지를 그의 품에 떠밀듯이 안겨 주었다.

“보고하세요.”

“보고…….”

“네. 북부로 가서, 웰트 대공령의 척박한 삶을 직접 사시면서 처음부터 배우시는 거예요. 시작은 견습 기사부터겠네요. 어차피 웰트 대공작께서는 정정하시니, 에드먼드 전하께서 굳이 직접 나서서 다스리실 필요도 없을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시는 거예요. 늦게 시작했으니, 분명히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할 거예요. 그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셨는지 제게 보고하세요. 당신이 여태 놓쳤던 것, 그리고 모자랐던 것은 무엇이든.”

“그렇게 하지.”

에드먼드가 기꺼이 대답했다.

“다만 보고할 내용이 보잘것없을지도 몰라. 처음 몇 달은 그 추위에 적응하느라 시간을 흘려보낼 것이고, 무기와 갑옷을 손질하는 자질구레한 일만 할지도 모르니.”

“상관없어요.”

소티스가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것부터 시작하셔야죠. 전하께서는 평생 부족한 것 없는 삶을 누리셨으니, 이제는 그러지 않은 삶을 겪으실 차례예요. 미진하면 미진한 대로, 대단하면 대단한 대로. 남은 삶은 직접 쌓아 올려 보세요.”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저는 혼란스러워요, 전하. 그래서 전하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상관없어.”

“그렇다고 보고를 게을리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겠다.”

“멘데즈는 제게 따뜻한 고국이 되어 주지는 못했지만…….”

소티스가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래도 제가 한평생 일구었던 나라가 불행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반드시 그렇게 하지.”

에드먼드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티스.”

“네, 전하.”

“우리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여름의 바람이 소티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듯이 흐트러뜨렸다. 히아신스나 새벽하늘, 그리고 페리윙클 같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정처 없이 흩날렸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언제 머리가 짧아졌더라. 혼돈과 싸우면서 잘리기라도 한 걸까. 그 짧은 머리가 언뜻 익숙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이제 다시 만날 수 없겠지.”

무언가를 기대하고 건넨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저 현실을 알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소티스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될 거예요.”

“미안했어.”

“저는 괜찮지 않아요, 전하.”

“그래.”

“전하를 보고 싶어 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래도 나는 그대를 생각할 거야. 그건 아마도 미련은 아니겠지. 굳이 따지자면…… 회한일까.”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저는 자유로워질 거예요. 당신을 용서해서라도.”

에드먼드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 입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다가 이내 쓴웃음 한 조각을 힘겹게 올려 보였다.

“그대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될 거예요.”

에드먼드의 시선이 소티스의 뒤편에 선 사내에게 향했다.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린 마법사는 깐깐해 보이는 무표정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에드먼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다.

그러다 소티스가 레먼을 돌아보았을 때, 남자의 얼굴이 변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르르 펼쳐졌다. 마치 봄철 볕을 쬔 꽃망울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그 다정한 미소가 옮은 듯 소티스가 눈을 접어 웃었을 때, 에드먼드는 자신의 값싼 질투와 동경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안녕, 소티스.”

그걸로 이별은 끝이었다. 에드먼드는 장식 하나 달리지 않은 작은 마차에 몸을 구겨 넣었다. 여름을 벗어나 차가운 땅으로 향할 마차는 어떤 존경 어린 배웅조차 없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다만 딱딱한 등받이에 고개를 대고 생각할 뿐이다.

시간을 되감을 수 없다면, 그리하여 과거로 돌아가 어떤 일도 바꿔 낼 수 없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망쳤던 여인이 행복하기만을 비는 것이 최선이라고.

“……안녕, 소티스.”

한평생 그를 사랑했던 여인을, 그가 불행하게 했던 여인을, 그러나 기어코 사라지지 않은 여인을.

그렇게 행복의 품으로 보내 주어야 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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