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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16)화 (117/121)

116화. 용서와 자유 (3)

“나를 용서한다고…….”

실로 당황스러운 발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누가 들어도 반응은 비슷했을 것이다.

용서한다니. 소티스가 에드먼드를? 왜? 도대체 어떻게?

에드먼드는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악담을 들었을 때보다 심장이 더 아프게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소티스는 나를 용서하지? 삽시간에 거대해진 의문은 제 숨통마저 틀어막는 듯했다. 그는 손을 뻗어 소티스의 무릎을 움켜쥐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참아 내지 못한 속마음이 울컥 치솟았다.

“말이 안 돼.”

“그렇겠죠.”

소티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실 만도 해요. 너무나도 폐하를 위한 대답이니까. 마치 일부러 최선의 대답을 준비한 게 아닌가 의심할 만큼.”

에드먼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건 당신을 위한 일이 아니에요.”

단호하다 못해 일견 냉정하게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녀가 몸을 살짝 틀어 에드먼드를 바라보고 앉았다.

“이건 저를 위한 거예요. 제 마음을 위해서. 당신을 미워하는 것도 괴롭고, 불행하기를 내내 바라며 감정을 소모하는 것도 싫어요. 그러다가 정말로 당신이 제 바람대로 불행해졌을 때, 고소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누군가의 불행으로 기뻐하고 후련함을 느끼는 비정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아요.”

“…….”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할 수는 없겠죠. 어쩌면 노력한다고 해도,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할 거예요.”

“소티스.”

“그래도 해낼 거예요. 당신의 존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로워질 거니까요.”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다. 그 사실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용서라는 이름으로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소티스는 기꺼이 에드먼드에게 얽혀 있던 제 감정의 잔재를 모두 털어 내고 말 것이다.

“내가 그대의 마음을 조금도 갉아먹지 못하고 완전히 나가 버린다면, 그대가 편해질까.”

“네. 그렇게 될 거예요.”

“그래.”

에드먼드가 고개를 숙였다.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울 것 같은, 그러나 웃을 것 같은, 일그러지고 구겨진 얼굴을 들키기 싫었다. 그의 섬세한 전 부인이 이런 표정마저도 기억하여 마음 쓰지 않기를 바랐다.

표정을 재빨리 갈무리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용서해 줘, 소티스. 그대를 위해서.”

“…….”

“마음이 변하면 나를 증오해도 좋다. 몰락하기를 바란다면 그래도 좋고, 그러다가도 용서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하루에 열 번씩, 아니, 서른 번씩 마음이 바뀌어도 좋아. 그게 그대의 뜻이라면. 그리고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한 번도 무언가를 제대로 해 주지 않았던 삶이었다. 수년을 약혼자로, 부부로 살면서도.

그러니 단 한 번. 평생에 단 한 번,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면.

에드먼드는 기꺼이, 기쁘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하나만 약속해 줘.”

“무엇인가요?”

“나는 그대가 죽는 날까지 그대만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어.”

소티스는 너무나도 남을 위해서만 살았다. 한평생 사랑했다던 저를 위해 헌신하느라, 이기적인 부모의 꿈을 이루느라,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혼돈을 위해…….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녀가 없어도 세상은 흐른다. 흐르지 못한다고 하여 그녀를 망가뜨려 맞출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대단한 신도, 성녀도, 영웅도 아니었다.

그러니 소티스 메리골드가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여인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제 마음껏.

“사라지지 마.”

소티스가 적막 속에서 입을 열었다.

“이혼한 사이라는 건…… 남보다 못한 사이겠죠.”

“그렇지.”

“저는 어쩌면 평생 당신을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괜찮아.”

“그래도 용서하겠다는 말을 한 건, 당신을 사랑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예요. 당신을 나쁘게 말하면, 그간 당신 하나만 보고 살았던 제가 너무 불쌍해지니까.”

“왜?”

에드먼드가 쓰게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소티스.”

“…….”

“내가 나쁜 인간이었다고 해서, 그대가 가엾어지는 건 아니야.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지. 하필이면 형편없는 인간을 사랑해서.”

“…….”

“선택에 책임을 지는 건 좋지만, 나를 사랑했던 그대까지는 미워하지 마. 그대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에드먼드.”

“나를 용서하기 전에, 그런 그대를 먼저 용서하는 게 좋겠군. 내 처분은 그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소티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눈앞이 흐려지더니, 물빛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투명하고 뜨거운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가 턱에 맺혀서 툭,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책망의 말은 쓰디썼다.

“최선을 다했는데.”

“…….”

“당신의 사랑은 고사하고, 신뢰라도 받기 위해서 온종일 종종거렸는데.”

“그래.”

“끝까지 제 선택을 우습게 만들었잖아요.”

“……맞아.”

“차라리 제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상관없었겠죠. 그때의 당신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을 테니까.”

“미안해.”

“당신은…….”

소티스가 울먹이며 말했다.

“정말 나쁜 사람이었어.”

에드먼드가 무릎 꿇은 채로 말했다.

“그대는 좋은 사람이었어.”

“장담하는데, 쉽게 용서할 수는 없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게.”

“그 약속을 어떻게 믿어요…….”

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믿지 않아도 좋다. 증명하는 건 내 몫일 테니까.”

“…….”

“그대만 괜찮다면, 서신을 쓸까 해.”

“서신이라고요.”

“그래. 일종의 증거인 셈이지. 내가 바르게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대에게 마음 깊이 속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안 받고 싶으면요?”

“상관없어.”

“받았는데 답장 같은 건 안 하면요?”

“그대가 그러길 바란다면 얼마든지.”

“생각해 볼게요.”

소티스가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별로 내키지 않아요.”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더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더 이어 말하지 않았다.

못다 한 말 또한 제가 응당 치러야 할 값이리라.

“시종장.”

“예, 폐하.”

에드먼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가 통하지 않은 다리가 저릿저릿해 자연히 휘청였으나, 그는 탁자를 짚고 버텼다.

“가서 페리윙클 마탑주를 불러오도록. 소티스의 몸이 좋지 않으니, 함께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예, 알겠습니다.”

에드먼드가 먼저 자리를 뜨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레먼이 도착했다. 그는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망연히 앉아 있는 소티스를 보자마자 팔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소티스 님.”

소티스가 그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레먼.”

“…….”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 마세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게 아니었어요.”

레먼이 그녀를 안아 들며 말했다.

“그냥, 어떤 식으로든 당신이 상처받을 것이 두려운 거예요.”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상처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가 곤란한 낯으로 침묵하자 소티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늘어뜨렸다.

“에드먼드 폐하와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냥 지난 일을 사과하셨고, 괜찮다는 말은 하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용서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요.”

레먼은 소티스를 안은 채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흔들릴세라 팔에 힘을 단단히 준 채였다.

소티스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아직은 에드먼드 폐하와 함께 있는 일이 버거워요. 하지만 언젠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지나 와야 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락,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춤을 추듯 나부끼는 연보랏빛 짧은 머리카락과 갈색 머리카락이 한데 뒤엉켜 섞였다가 가라앉았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저는 괜찮아요.”

“저도…….”

레먼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소티스 님을 사랑해요.”

“얼마나요?”

“평생 같이 살고 싶을 만큼. 함께 살고, 함께 늙어 가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손을 맞잡고 싶을 만큼.”

그러자 소티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당겨 안았다.

“누가 프러포즈를 이렇게 갑자기 해요?”

“……이상한가요?”

“네, 조금요.”

“…….”

소티스가 그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그래도 무척 좋아요.”

“…….”

“레먼.”

“네, 소티스 님.”

“우리…… 베아툼으로 돌아가면 결혼할까요.”

그러자 레먼이 소티스를 잠시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 맞추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의 그 어떤 환희도 그의 호박색 눈동자 앞에서는 무색할 정도로 레먼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좋아요.”

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소티스 님. 돌아가자마자 결혼해요. 화관을 머리에 쓰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티스 님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시겠지요. 그리고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일 거고요.”

레먼은 연인의 이마에 손등을 대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아프지 마세요. 저와 오래오래 살아 주셔야죠.”

“……노력해 볼게요.”

소티스가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약속한 거예요.”

“네, 소티스 님.”

소티스가 환히 웃어 보였다. 어떤 시름도 보이지 않는, 희고 맑은 미소였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하고 찬란해 보여서,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어서.

그래서 레먼은 몸을 일으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 여인을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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