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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15)화 (116/121)

115화. 용서와 자유 (2)

소티스 일행이 마차를 타고 황성에 도착했을 때, 에드먼드는 미리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한 표정을 보니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이는 레먼이었다. 그는 혼돈과의 결전에서 돌아온 이후로 이전보다 더욱 지극하게 소티스를 챙겼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염려하는 손길과 눈길로 그녀를 대하곤 했다.

주변을 둘러본 레먼은 에드먼드를 본 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중하면서도 단정한 인사였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소티스의 한쪽 팔을 부드럽게 받쳐 잡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가볍게 감싸 마차 아래로 내려주었다.

“소티스.”

그 모습을 잠잠히 바라보고 있던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불렀다. 그 작은 부름은 그녀에게 나비처럼 날아가 닿았다.

“…….”

소티스는 지금의 현실을 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제게 적잖이 놀랐다.

에드먼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그 이름을 오롯이 부르고 있었다. 작은 음성은 조금 떨리는 것 같았으나 이제 또렷해졌다. 어떤 경멸도, 분노도, 냉대나 짜증도 어려 있지 않은 순수한 부름이었다. 한때의 자신이 한평생 기다렸던 바로 그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소티스는 그의 부름에 더는 떨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것을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 제 이름을 재차 불러옴에도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한 점 동요 없는 차분한 영혼이 그를 응시했다.

그랬기에 웃을 수 있었다. 아직은 차마 추억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는 사내에게, 소티스는 소담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폐하.”

때때로 사라져야만 완벽한 마음이 있다.

이제 소티스 메리골드는 안다. 정말로 사라질 운명이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음을, 그리고 미련이었음을. 그리하여 그 소멸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내고 말았음을.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소티스가 담담하게 건넨 말에는 수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오는 길에 멘데즈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의 흐름을 파악했고, 에드먼드가 그것을 막기는커녕 그것에 부러 불을 지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제야 그다운 선택을 한다고 생각했다. 소티스는 구김 없이 웃으며 에드먼드에게 다가갔다. 가지런하고 맑은 미소에 에드먼드가 움찔했으나, 그는 물러서는 대신 소티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북부로.”

에드먼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웰트 대공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쉽게도 도끼술을 전승할 수는 없겠지만, 공작가의 일을 돕고 북부를 보살필 수는 있겠지.”

“그렇군요.”

어느 정도 예상 안의 대답이기는 했다. 소티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렉투스 상단과의 교역은…….”

그건 아벨과 렉투스가 합심하여 이루어 낸 성과였다. 에드먼드가 웰트 대공령으로 넘어갈 경우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대로 진행하게 됐어.”

“다행이네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에드먼드는 줄곧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게 곧 용무이기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좋은 표현을 찾지 못한 것 같기도 했고, 할 말을 다 골라냈으나 염치가 없어 건네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예전의 소티스라면 그 의중을 꼼꼼히 파악하고 그의 말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소티스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독이 쌓여 버거운데, 이만 물러가도 괜찮을지요.”

“그래. 방은 일전에 그대가 머물던 곳으로 준비했다.”

그렇게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보내 주는 듯했다.

하지만 돌아선 소티스가 손을 뻗어 레먼의 팔을 잡기 직전,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소티스.”

“…….”

그녀가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에드먼드가 간절히 말했다.

“뒤뜰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게 아니야. 그대가 떠난 이후, 물론 믿지는 않겠지만…… 나는 염치라는 것을 천천히 깨달았고, 이제는 그대에게 돌아와 달라고 부탁할 만큼 몰상식한 인간으로 남지는 않게 되었지. 그냥…….”

“…….”

“무의미한 말이라도 좋다. 너무 늦었다는 비난을 사도 어쩔 수 없어. 다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잠깐이면 된다. 한 시간, 아니, 그 반절. 고작 몇 분이라도 좋으니까.”

그러자 커다란 손이 다가와 소티스의 손을 다급히 쥐었다.

레먼이었다. 그는 절박하게마저 느껴지는 시선으로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호박색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뜻보다는 소티스의 뜻이 중요하여, 차마 가지 말라는 말조차도 하지 못한 채 우뚝 굳어 그녀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소티스의 손이 레먼의 손등을 조심스레 감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에 그가 숨을 삼켰다.

그녀가 제 연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맞추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레먼.”

물빛 눈동자에는 단호한 애정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애정은 이미 뚜렷한 방향을 따라 흐르고 있었으니, 누구도 감히 흔들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올곧은 시선이 레먼을 응시했다. 마치 안심시켜 주듯이.

“……네.”

레먼이 소티스를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잠깐의 포옹 후에 보이는 미소는 아까처럼 불안정하지 않았다.

레먼과 퀘렐라, 알베스는 처소로 향했다. 소티스는 긴 여행 때문에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에드먼드를 따라 뒤뜰로 걸어갔다.

***

두 사람이 탁자 앞에 앉자 시종이 다과를 내어 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티스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허기를 느끼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내키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먹지 않았다는 표현보다 먹지 못했다는 쪽이 어울렸다.

“……의사를 부를까?”

에드먼드가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소티스는 손을 급히 내저으며 몸을 숙였다. 차마 대답할 수도 없었다. 긴장을 조금만 늦추어도 신물을 토해 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구역질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다. 탈력한 몸을 이끌고 먼 거리를 오는 내내 속이 수없이 뒤집혔다가 괜찮아지기를 반복했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몸을 추스를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훨씬 나았다.

“괜찮아요. 조금 견디면 괜찮아집니다. 차는…….”

“다 치우거라.”

에드먼드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사람들을 불러 탁자 위의 것들을 모두 치우게 했다. 차와 과자는 물론이고 꽃조차도 남기지 말라 명령한 뒤 몸을 일으킨 그는 손수건을 꺼내 소티스에게 내밀었다.

“토할 것 같으면 차라리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돌아서 있을까.”

“그 정도는 아니에요.”

소티스가 힘겹게 웃어 보였다. 전남편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에드먼드의 얼굴이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대의 몸도 썩 좋지 않으니, 빨리 끝내는 게 좋겠군.”

그렇게 말한 그는 숨을 크게 내쉬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다시 소티스를 내려다보았다. 짧은 침묵 속에서 그의 만감이 교차했다.

이윽고 에드먼드가 몸을 내렸다. 숱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간 그의 얼굴은 어떤 결의를 다진 사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채였다.

“…….”

그가 소티스의 앞에 무릎 꿇었다.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는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의 그녀가 정원 앞에서 그랬듯, 무거운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다.

“용서를 구하는 일조차 비겁하고 치졸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 내가 그대에게 주었던 상처는 무엇으로도 감히 보상할 수 없을 것이고, 나는 내가 쌓은 죄의 무게를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어.”

“폐하.”

“그대를 욕보였던 것, 그대의 마음을 짓밟았던 것, 그대의 신뢰를 무참히 부서뜨린 것. 그대를 우습게 만들고, 슬프게 했던 그 모든 것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에드먼드의 검은 눈이 소티스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불행하기를 바란다면, 그대가 불행했던 만큼 나 역시 불행해지는 게 옳겠지. 그대가 더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그대의 삶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소거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해내겠다고 맹세하지. 그러니…….”

“…….”

“그대가 행복해지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줘, 소티스.”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소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은 채, 제게 무릎 꿇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의 모습에 놀란 마음도 금세 잠잠해졌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따지고 싶은 것도, 힐난하고 싶은 일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건, 그렇게 악다구니를 쏟아 내느라 제 속이 다 긁히고 다치는 것조차도 싫어서였다. 더는 어떤 방식으로든, 에드먼드 때문에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깎여 나가는 삶이 아깝게 느껴질 만큼 소티스에게 에드먼드의 존재는 작아졌다.

“저는…….”

미워해도 괴롭고, 미워하지 않아도 괴로웠다.

에드먼드를 생각하는 내내 소티스의 속은 한 해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땅처럼 바짝바짝 메말라 갔다.

하지만 영원히 그 가뭄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난 사랑이지만, 사라진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지난날이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소티스가 말했다. 자비보다는 결의를 담은 음성은 작지만 단단했다.

“저는 당신을 용서할 거예요, 에드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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