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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13)화 (114/121)

113화. 규율을 위하여 (4)

핀은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세상은 도무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 사실이 딱히 슬프지는 않았다. 이 세상이 정말로 제 소원을 들어주려거든, 처음부터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다.

“세상이 불행해진다면 네 불행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닌 게 돼.”

친모의 말은 낙인처럼 가슴에 새겨져 지워지는 일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고초를 겪을 때마다, 당연하게 자신을 멸시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좌절할 때마다 핀은 생각했다.

이 세상이 불행하다면 내 불행 역시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 되겠지.

혼돈은 그녀의 불행을 먹고 자랐다. 핀은 그토록 싫어하는 존재에 가까워지는 자신에게 염증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그 분노와 원망을 정당화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났다.

태양을 빚어 만든 듯한 여인이었다. 눈부시고 강인했으며, 다정했고 올곧았다. 태어나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핀은 소티스의 눈동자를 처음 들여다보았을 때 처음으로 경외가 어떤 감정인지 이해했다.

그런 여인이 제게 손을 내밀었을 때.

제게 이름을 알려 주었을 때.

그리고 제 이름을 물었을 때.

“핀, 핀……. 예쁜 이름이네요.”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 삶이 불행만으로 가득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 불행의 구덩이에서 자신을 끌어올려 준 그 하얀 손이야말로 제 삶에 다가온 최고의 행운이자 눈부신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황성으로 가요, 핀.”

그건 감히 말하건대, 구명 이상의 어떤 자비였다.

어쩌면 소티스는 그저 불쌍한 여자를 하나 구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자비는 사람과 상황을 가리는 법이 없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녀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자비로운 여자라는 사실도 좋았다. 한낱 미물에게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애정을 쏟는 것이 바로 소티스 메리골드의 대단한 점이라서, 그런 그녀의 볕을 쬐는 데 어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날 때부터 행복에 감겨 자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것일까? 핀이 보기에 소티스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으니, 그 넘치는 사랑을 가여운 이들에게 한 조각씩 베푸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듯했다.

그렇구나. 삶이 온통 불행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이 온통 행복했던 사람도 있겠구나.

이 사람의 곁에 있으면, 나도 저 행복을 나눠 가질 수 있게 될까?

“꼭 그렇게 제멋대로 굴어서 황실을 우습게 만들어야 속이 풀리겠습니까?”

하지만 소티스에게 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냉대와 타박이었다.

황제 앞에 선 그녀는 아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초라해 보였다. 순식간에 생기를 잃은 물빛 눈동자는, 끝도 모르게 깊고 맑은 바다가 아니라 눈물을 굳혀 만든 것처럼 보였다.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죄송합니다.” 따위의 사과를 연신 내뱉는 소티스를 보며, 핀은 그 무력감이 아주 오래도록 계속됐던 것임을 알아차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마땅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티스는 불행해 보였다.

핀은 이 사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분노마저 느꼈다.

왜?

왜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가 불행하지? 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과는 태생부터 남다른 것 같은 이 여인이 거울 속의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불공평하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이런 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했다. 소티스에게는 그럴 자격이 차고 넘쳤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를 함부로 하는 이들 사이에서 깎여 나가고 있지 않은가.

“폐하, 왜 황후 폐하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처음부터 에드먼드를 사랑할 생각은 없었다.

“글쎄…… 그냥, 소티스를 아무리 봐도 별로 심장이 안 뛰어서.”

“그럼 제게는 심장이 뛰세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사랑이 뭔지도 모른다. 사랑과 정열을 헷갈렸고, 동경과 열등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 무지는 현명한 사람을 상처입힐 뿐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생각했다. 아, 당신도 나와 같구나.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을 힘들게만 하겠지.

그래서 핀은 충동적으로 에드먼드를 끌어안았다.

그럼 우리끼리 있자. 불행한 사람들끼리 함께 살자. 평생 그 죗값을 치르며 쓰레기끼리 진창에서 뒤엉킨 채로 영원히 뒹굴어 버리자.

다정한 사람일랑 제 행복 찾아 떠나게 놓아주고.

[제가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다정한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누군가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좀 달랐을까요.]

자신이 없었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메마른 사막만이 펼쳐져 있어서, 이런 저를 이끌고 감히 그녀에게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운명을 원망하지 않았다. 소티스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고 사라질 수만 있다면, 설령 미움받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티스 님.]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 시간조차도, 한 번도 마음껏 솔직해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때때로 사무쳤다.

[저를 기억해 주세요.]

어찌 좋은 사람만으로 기억되길 바라겠는가. 이기적인 소원일지도 모르나, 그저 소티스의 삶에 제 자취를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저 욕심을 부리자면, 자신이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알아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대도 두렵지 않았다.

“핀.”

어디선가 온화하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슬픔으로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 와요.”

그 부름을 들었을 때, 핀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렇구나. 이건 주마등이었구나.

하지만 그녀는 죽음이 두렵지도, 억울하지도, 하다못해 서글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미지의 침묵이 기껍고 반갑게마저 느껴졌다.

“이제 함께 있어요.”

영혼이 된 핀의 조각은 너울너울 춤을 추듯 소티스의 곁으로 갔다.

[이제 같이 있을 수 있어요?]

사뭇 천진하게마저 들리는 목소리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할 이에게 날아가 스며들었다.

[이제 소티스 님은 행복해질 일만 남은 거지요? 제가 사라지고 나면…… 당신이 더는 불행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럼 저는 소티스 님의 안에서 죽은 듯이 살아가도 될까요?]

“…….”

[어떤 방식으로든 좋아요.]

이 세상에 단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준 이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이 행복해지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신이여…….”

감히 신보다 더 자비로웠던 태양이여.

“가장 가엾은 것을 굽어보소서.”

당신이 굽어본 이가 여기에 있어요.

“당신의 품에서 모든 존재의 죄를 전부 씻게 하시고.”

이 불행을 모두 씻어 내고 나면, 당신에게 모질었던 그 못된 것들이 저들끼리 엉켜 형체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한 덩어리가 되어 저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나면.

“그리하여 아무도 슬프지 않을 내일을 주소서.”

당신에게 완벽한 행복만이 펼쳐지기를.

가장 선한 것이 기어이 승리하고 마는 세상이기를.

[걱정하지 마세요, 소티스 님. 아무리 밤이 어두워도 태양이 떠오를 거예요.]

핀이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자신이 사라지고 있어서, 그녀에게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핀.”

[울지 마세요, 소티스 님.]

“핀…….”

[저 여기 있어요.]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당신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곳으로 와 주세요.”

그러자 핀이 정적 속에서 말했다.

[있잖아요, 소티스 님. 저는 이상하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그때는, 이 불행을 다 벗어던지고 당신처럼 살게요. 무엇도 원망하지 않고, 무엇이든 용서하면서, 그렇게 다정하게 살게요. 그러니까 당신이 도와주세요. 제 곁을 지켜 주세요.]

이제는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숱한 괴로움 속에서 매몰되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남아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소티스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핀은 이 시궁창 같은 삶이 기껍게 느껴졌다.

그러니 다음 생이 허락된다면, 그때는 꼭.

혼돈이니, 불행이니 하는 잔인한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그래서 어떤 시름도 없이 그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소티스 님.]

핀이 기도하듯이, 경배하듯이, 고백하듯이, 토로하듯이, 넋두리하듯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열렬하고, 서글프게.

[용서해 주셔서 고마워요.]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면서도 오점투성이인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그녀에게 핀이 말했다.

[만나서 행복했어요.]

그리하여 핀은 태어나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그건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는 소원도 아니었고, 소티스에게 제 말을 전해 달라는 간언도 아니었으며,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는 애원도 아니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그녀가 제게 주었던 꽃의 의미처럼.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당신이 반드시, 기어코, 언제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남은 생에 당신이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세상에서 가장 선했던 당신이 가장 행복하기만을 바란다고.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그 무엇보다도 간절하게,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온 영혼을 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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