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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12)화 (113/121)

112화. 규율을 위하여 (3)

그건 신의 뜻이었을까?

삿된 힘을 사그라뜨리는 빛이 홀로 그 적막을 견디는 소티스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또한, 제가 단죄하여 숨을 거둔 이를 슬픈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 같기도 했다.

소티스의 손이 혼돈의 명치 근처를 어루만졌다. 채 굳지 못한 붉은 피가 묻어났다. 어떤 온기나 떨림이 묻어나지 않아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정말로 죽었구나.

알고 있다. 그건 피니에 로즈우드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거다. 혼돈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두 사람의 위치는 바뀌어 있었을 테다. 망설임의 대가로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목숨이 더 희생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괴로웠다. 그 얼굴이 그토록 지켜 주고 싶었던 여인의 얼굴이어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표정이 너무 후련해 보여서. 이 모든 상황이 가엾어서…….

그때, 깨어져 나간 기억 하나가 소티스에게 속삭였다.

[제가 이 여자를 사겠습니다.]

[제 이름은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예요. 당신은요?]

[핀, 핀……. 예쁜 이름이네요.]

[이 여인에 대해 조사하십시오. 황후의 직권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함께 황성으로 가요, 핀. 그곳에 가면 당신은 추위에 떨 필요도, 굶주릴 필요도 없어요.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만, 이 모진 불행으로부터는 지켜 주고 싶어요.]

너무도 작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들은 언젠가의 자신이 핀에게 했던 말들이었다. 그 말은 작았으나 따뜻했고, 유약했으나 너무나도 다정했다.

[……폐하.]

[소티스 폐하.]

금방이라도 꺼져 갈 듯 위태롭고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당신을 따라 황성에 가면, 소티스 폐하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건가요?]

그때 무어라 대답했더라. 아마 그 질문의 의미를 잘못 알아듣고 애먼 대답을 돌려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지금은 쓰지 않는 손님용 방을 내어 주겠다고 했던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지나 버린 지금, 이제야 그때 핀이 듣고 싶어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요…….”

소티스가 울먹이며 말했다.

“같이 지내요, 핀.”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 관계는 좀 달라졌을까?

“…….”

시간이 흘렀다. 한낮처럼 밝았던 동굴도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안식 같은 어둠이 숨을 거둔 이들의 위에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찬란한 호박색 빛무리도, 희미한 붉은 빛무리도 점점 작아지며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이여.”

소티스는 사라지는 빛을 보며 속삭였다.

“제게 이 순간이 운명처럼 부여된 거라면, 제게 이 순간을 이겨 낼 힘도 주세요.”

이대로라면 레먼과 핀의 영혼이 사라질 것이다. 육신이 죽은 핀이 되살아날 수 있을지…… 레먼은 영혼을 잃고 천천히 시들어 가듯이 죽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도와주세요.”

싸늘한 침묵 속에서 소티스가 애원했다.

“도와주세요…….”

그러자 어떤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렇게 부르셔도 신은 응답하지 않아요. 여기는 인간의 터전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도와줄 수 있다, 마지막 규율이여.]

[대가가 필요하겠지만…….]

소티스가 규율들에게 대답했다.

“핀과 레먼을 구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엘디카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레먼 페리윙클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당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여, 그의 영혼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기만 하면 되거든요.]

“하지만 저번에 말씀하시기를, 영혼이 한번 연결되면 다시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건 소티스 님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레먼의 선택이고, 결과 역시 그의 몫이지요.]

엘디카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못해 차갑게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문제는 피니에 로즈우드를 살리는 일입니다. 영혼이 너무나도 잘게 조각나 있어요. 복구한다고 해도 아주 일부뿐입니다. 되살아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 이렇게 망가진 영혼을 잘못 이끌면, 도리어 영혼 마법사의 마력이 상하기도 하지. 다시는 마법사로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게까지 해서 구해 낸다고 해도, 신의 인도를 받은 것은 아니니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규율들은 웅성거리며 의견을 교환했다. 소티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절반 이상이었다.

[그래, 이렇게 하는 게 낫겠어요.]

엘디카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피니에 로즈우드의 영혼을 삼키세요.]

“……네?”

[당신이 마지막 혼돈의 영혼을 모두 이끌어 삼키면, 이내 혼돈과 규율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혼돈의 영혼을 소멸시키지 않고 다음 생을 주고 싶다면, 이 방법이 최선이겠어요.]

“…….”

어려운 이야기였다. 소티스는 이마를 감싼 채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다른 규율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단, 조건이 있네.]

“무엇인가요?”

[다시 태어난 그 영혼이 불행해지면, 세상에 혼돈은 다시 생겨날 걸세. 그대가 하기에 따라 이 오래된 싸움이 끝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게 무슨…….”

[그대는 행복해질 의무가 있다는 뜻이에요. 지금은 이 말들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억하기만 하고, 낱낱이 따지려 애쓰지 마세요. 자, 시간이 없습니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소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께 앞으로 양손을 모아 잡았다. 엉망으로 다친 손은 이제 감각이 없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한데 모았다.

애나를 구할 때와 같았으나 조금 달랐다.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이번에는 조금 더 과감했다. 소티스는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마법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꺼냈다. 마력이 바닥나며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소티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꼭 잡은 손에서 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며 정처 없이 흩어져 있던 빛을 끌어당겼다.

호박색 빛 한 송이가 소티스에게 날아왔다.

다시 한 송이가 날아왔다.

그리고 한 송이, 또다시 한 송이.

조그마한 빛들은 모여 이내 유약한 날개를 느리게 움직이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었다.

“레먼.”

소티스가 나비에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왜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을 자처했어요?”

그러자 레먼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사라지는 일이 두렵지 않으니, 이는 위험한 일이 아니라 용감한 일입니다.]

“…….”

[당신이 세 번째 각성에서 규율들과 함께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저를 선택해 주기를 바랐어요.]

설령 실패해서 자신의 영혼이 소티스에게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소티스는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레먼은 소티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행복하기를 바랐다.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소티스가 손을 뻗어 나비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제가 행복해지려면 당신이 필요해요.”

[소티스 님.]

“이제 제가 당신의 길을 열어 드릴게요. 그러니까, 길을 잃지 말고 꼭 잘 돌아가서…… 언제나 그랬듯, 제게 와 주시겠어요?”

[……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소티스가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당신을 위해서 살 거예요.”

[사랑해요, 소티스 님.]

레먼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뒤이어 그녀의 마력이 일러 준 길을 따라, 호박색 나비가 너울너울 동굴 밖으로 날아갔다.

이제 동굴은 아까보다도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삶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정적 속에서 소티스는 가쁜 숨을 내쉬며 마지막 정신력을 끌어모았다.

소티스는 맞잡았던 손을 풀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피투성이 손이 두려움과 걱정으로 움찔 떨렸다.

“핀.”

그녀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이리 와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붉고 작은 빛 하나가 소티스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으나, 그것은 너무나도 처참하게 부서져 있어 어떤 말도 소티스에게 전해 주지 못했다.

“이제 함께 있어요.”

핀의 행동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핀은 소티스를 위해 행동했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건 소티스를 위한 최선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평생을 제 삶이 불행이라 믿었던 사람이었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살았을 사람이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건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지난 일을 이제 와 따지는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더는 얽매이지 않을 과거의 잘잘못 따위는.

“신이여…….”

어느새 정신을 차려 비척비척 일어난 퀘렐라는, 붉은 빛을 모으는 소티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어렸을 때, 숙모였던 엘디카가 제게 일러 주었던 베아툼의 성서에 적힌 내용이었다.

“가장 가엾은 것을 굽어보소서.”

무릎을 꿇은 채 빛을 인도하는 소티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태양처럼 보여서, 아주 오래도록 잊었던 그 구절이 자연히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당신의 품에서 모든 존재의 죄를 전부 씻게 하시고.”

죄를 지은 이들을 내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죄를 짓지 않아도 좋을 세상을 만들어 주시옵고.

“그리하여 아무도 슬프지 않을 내일을 주소서.”

소티스가 붉은 빛무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맥없이 일렁이던 희미한 빛은 잠시 망설이다가 소티스에게 천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핀.”

소티스가 울며 핀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그녀가 아는 가장 악하고 가여운 여인을.

“핀…….”

그녀가 기도하듯이 말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당신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곳으로 와 주세요.”

가장 어두운 밤을 밝힐 여명이 떠오르는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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