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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11)화 (112/121)

111화. 규율을 위하여 (2)

영혼이 없는 붉은 머리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건 단순한 불행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삿된 존재였으며, 악한 것이라기에는 내지르는 소리가 가여웠다.

악에 받친 여자는 불처럼 타오르는 복수심을 꾸역꾸역 쏟아 냈다.

“혼돈은 다시 태어난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네가 나를 죽여도, 아니, 우리 모두의 힘을 빼앗아 으깨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희생은 오만하고 헛되니, 너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불행은 끊임없이 생겨날 거야!”

알베스는 소티스의 몸을 강화하는 주문을 걸어 주었다. 정교한 마법이 소티스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스며들었다.

그가 가진 거의 모든 마력을 사용한 마법이었다. 그는 기력을 다해 정신을 잃는 순간마저도 웃고 있었다. 그만한 부담을 견디기에 노쇠한 육신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후회나 망설임도 없었다.

핀의 영혼을 뭉쳐 만든 검에는 레먼의 마력이 실렸다. 그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뜨거워서 다친 손바닥이 쉴 새 없이 욱신거렸다.

소티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대단한 검술을 보여 주지도 못했고, 정교한 마법을 구사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났고, 목을 졸리면 뿌리쳤다.

“시궁쥐처럼 도망이나 치다니!”

혼돈이 소티스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마녀의 공격을 흘려 내려던 그녀의 몸이 휘청 기울어졌다.

“도망치다뇨?”

소티스가 외쳤다. 그녀는 쥐고 있던 검으로 제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버렸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가닥가닥 흩날렸다.

“정말 도망치고 싶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두고, 저는 쉬운 일만 골라서 했겠죠!”

“입만 살았구나.”

혼돈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규율은 언제나 오만해. 그래서 더 역겹지. 왜? 세상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라도 들었나? 눈물겨운 위인 나셨군! 실은 영웅이 되고 싶었니? 아니면 성녀? 모두가 칭송하는 신?”

“아니에요!”

소티스가 사납게 소리치며 혼돈의 어깨에 단도를 찔러 넣었다. 가죽과 살을 찢고 들어서는 감각이 너무도 불쾌해서 절로 몸이 떨렸다.

“제가 약하고 초라하다는 건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세상을 구한다고? 그녀는 오래도록 사랑하던 한 남자의 마음조차도 돌리지 못했다. 소티스는 자신의 현명함이 그저 이론에 불과했다는 것도,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저는, 그냥…… 제가 선택한 사람들이 웃길 바랐어요.”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가여워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따뜻하게 여겼으면 했다. 힘들고 괴롭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고 생각했으면 했다.

그럼 자신이 슬플 때, 아플 때, 그리고 힘들 때 그 세상이 저에게도 온기를 나눠 줄 것 같아서. 그녀의 삶도 그렇게 살아 볼 만한 것이 되었으면 해서.

“그리고 제 마음이 위선이면 뭐 어때서요? 나 혼자 불행해지기 싫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까지 괴롭게 만드는 것보다 백배는 나아요! 저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진심이었어요! 그게 나쁜가요?”

소티스의 검이 혼돈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잘라 냈다. 육신에 깃들어 있던 혼돈의 기억 역시 한 줌 잘려 나갔다.

“빨간 머리는 재수가 없단 말이야.”

“그 소문 못 들었어? 빨간 머리 여자는 마녀래. 대대로 그랬대.”

“정말? 재수도 없지!”

“저리 꺼져!”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너는 절대로 몰라!”

혼돈이 쏘아 낸 구체가 소티스의 가슴팍을 때렸다. 재빨리 검을 들어 제 가슴 앞에 내리찍어 그것을 깨뜨렸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눈앞이 어지러웠고, 입 안에 피 맛이 감돌았다. 배꼽 아래를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아픔이 더욱 심해졌다.

“부족한 게 없다고요? 그럴 리가 있었겠어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혼돈이 그녀의 몸을 짓누르듯이 올라타 앉았기 때문이었다. 매서운 손바닥이 뺨을 후려쳤다.

소티스의 얼굴이 돌아갔다. 결국 혀를 씹어서 피가 났다. 소티스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흐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희 아버지보다 손이 매우시네요. 핀도 이렇게 때리셨나요? 아니다. 손찌검할 만큼 키우기나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

“……당신들은 부모 실격이야.”

소티스의 머리채가 다시 잡혔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티스는 단도를 휘둘러 그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귀 근처에 겨우 닿을 정도로 짧아졌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처럼 엉켜서 싸웠다. 머리를 잡아당기고, 비명을 지르고, 마법을 써서 서로를 상처입히고, 다시 뺨을 때리며 소리쳤다.

혼돈이 걷어차거나 때릴 때마다 소티스는 몇 번이고 단도를 놓쳤다. 그러나 그녀는 아득바득, 네 발로 기어서라도 다시 주웠다.

그 육신의 본래 주인이었던 핀의 영혼을 잃어 불안정한 혼돈은 검으로 찔릴 때마다 제힘을 잃어 갔다. 레먼의 모든 마력이 모여 그들의 영혼을 불태워 소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소티스와 혼돈의 자세가 바뀌었다. 알베스의 강화 마법 덕에 소티스는 다리를 모아 혼돈의 가슴팍을 차 날리고는 그 위를 짓눌렀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찰박, 다 굳지 못한 피가 사방으로 튀며 방울방울 흩날렸다.

“나를 죽여도 소용없단다, 규율.”

혼돈이 허공을 손가락질하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는 소환된 모든 힘을 깨뜨리고, 세상을 떠돌고 있던 내 영혼을 부술 수 있겠지. 하지만 불행의 씨앗은 세상으로 널리 퍼져 나갈 거야. 너는 핀을 죽이지 못했으니까. 그 씨앗이 언제 모여서 다시 혼돈이 될까?”

“…….”

“불행은 영원해. 인간은 태어난 이상 불행할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 어찌 네가 그 거대한 흐름을 잘라 낼 수 있겠니?”

“아니야…….”

양손으로 단도를 들어 올린 소티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핀은 강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의 방법이 잘못되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끊어 낼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요.”

“…….”

“불행이 영원하다면, 그 불행을 이겨 낼 힘도 영원할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세상은 어떤 한 가지 논리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잖아요.”

“아쉽구나, 아쉬워.”

혼돈이 탁한 눈으로 소티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매개를 잃지만 않았어도 이런 애송이에게 당하지는 않을 텐데.”

“잊으셨어요? 그 매개를 당신 손으로 부수었잖아요.”

그녀가 울듯이 웃으며 덧붙였다.

“한 번이라도 핀을 품어 주려고 했다면, 그 나비를 그렇게 맥없이 깨뜨리지는 않았을 테지요.”

“나라고 날 때부터 잔혹하고 비정했던 것 같니?”

“아닌가요?”

“…….”

혼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음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을 내보였을 뿐이었다.

소티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숱한 싸움으로 혼돈뿐만 아니라 자신도 지쳐 있었다. 이 이상 무리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

만일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훌륭했다면, 이 사람들조차 구해 낼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신도, 하다못해 규율의 힘을 자유자재로 쓰는 마법사도 아니었으므로.

그저 자신이 직접 숨을 거두는 이가,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행복해질 거라고 기대하지 마.]

칼에 찔린 심장이 마지막 생명을 뿜어내며 속삭이고 있었다.

[차라리 기대하지 않으면 비참하지 않을 거야.]

[로즈우드 후작은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함부로 속삭였지…… 아가야, 나는 그 말만을 철석같이 믿었단다. 날 닮아 아름다울 너를 데리고 가면 로즈우드 후작이 나를, 아니, 적어도 너만은 거두어 주리라고. 후작가의 하녀가 되어도 내가 줄 수 있는 삶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고, 그렇게…….]

[명심하렴. 믿음은 배신당하고, 기대한 만큼 불행해질 거고,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는단다.]

[사막에는 비가 와도 꽃이 피지 않아.]

[핀.]

[차라리 이 세상이 모두 불행해진다면, 네 불행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야.]

소티스는 꺼져 가는 생명을 자신의 시야에 가득 담았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혼이 사라지거나 다쳤는지 알 수 없었으니. 그만큼 잔인하고, 세상을 망가뜨릴 악으로 거듭날 이였다.

어쩌면 사람들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혼돈은 영혼이 없는 마녀에 불과해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즐거워할 거라고. 기어이 이 세상을 불행의 구덩이에 밀어 넣고 나서야 만족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조차도 언젠가는 인간이었던 때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소티스는 망설임 없이 혼돈의 심장을 찌르면서도 속이 아팠다.

“당신의 영혼은 사라져 다시는 태어날 수 없겠지만…….”

[상관없어.]

혼돈이 말했다.

[나는 신도, 다음 생도, 언젠가 찾아올 행복도 믿지 않는단다. 내게 필요한 건…….]

“안식.”

소티스가 울면서 대답했다.

“당신을 더는 불행하게 하지 않을 안식을 드릴게요.”

제 소명을 다한 레먼의 영혼과 핀의 영혼이 산산이 부서져 동굴을 가득 메웠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이 가득한 그곳을 태양 같은 빛이 다정하게 굽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무리가,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소티스를 위로하듯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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