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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10)화 (111/121)

110화. 규율을 위하여 (1)

처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레먼은 소티스를 홀로 둘 사람이 아니다. 헤어졌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떨어져 있고 싶다는 말에 그 결정을 존중해 주었지만, 그의 의지로 멀어지거나 외면하는 일은 없었다.

레먼은 며칠 전, 소티스를 두고 먼저 잠들었다. 그는 잠귀가 밝아 소티스가 조금이라도 뒤척거리면 귀신같이 알고 머리를 쓸어 주거나 당겨 안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의미심장한 대화. 어디론가 떠나는 듯한 그 말투.

그로도 모자라 레먼은 사라졌다. 소티스가 이곳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익숙한 마력이 목덜미에 내내 걸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레먼이 선물한 그 목걸이에서부터 느껴졌다. 원래 그의 마력이 들어 있기는 했지만, 레먼과 헤어진 이후부터는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는 이해한다.

레먼은 떠난 게 아니다. 처음부터 소티스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언제든지 자신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어떤 힘이든 선뜻 빌려주기 위하여.

“당신은 정말로 미련해요.”

소티스는 한 손으로 단도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품에 넣어 두었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레먼이 잘라 주었던 갈색 머리카락이 담겨 있었다.

그걸 조심스레 쥔 소티스는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까지 뜯어내 버렸다. 가느다란 줄이 끊어지며 차락, 보석에 줄이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레먼.”

그는 언제나 곁에 있다.

그러니 그를 생각하고, 부르기만 하면 된다.

“제게 와서 힘을 빌려주세요.”

처음에는 이 지독한 싸움에 그를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이미 혼돈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그에게 더한 희생을 요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것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것을 잃도록 두는 일이었다. 독립하겠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서 떠나 버린다는 건, 레먼의 삶에 상처를 새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라지지 마세요, 폐하.”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면.

“당신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결한 죽음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 그를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서.

“이 일이 끝나면 저는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은 저를 위해 사는 거예요.”

그러자 어디선가 부드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운이 좋기를 바라야겠네요.]

목걸이에서 호박색 나비 한 마리가 나오더니 소티스에게 스며들었다. 이내 누군가의 영혼이 제게 단단히 연결된 것이 느껴졌다.

[잠시 실례할게요, 소티스 님.]

소티스의 자세가 낮아졌다. 레먼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검을 쥐는 방법부터가 달라졌다. 국경 지대에서 그가 보여 주었던 단검술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금빛 마력에 호박색 마력이 둘려, 태양 같은 빛이 터져 나왔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핀이 손을 뻗었다. 새카만 마기가 탄환처럼 쏘아져 나왔다.

소티스는 레먼이 이끄는 대로 칼을 움직였다. 카가각, 검게 굳은 마기를 단도가 반으로 갈라냈다.

그녀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혼돈이 노성을 터뜨리며 손을 뻗어 소티스의 팔을 쥐었다. 시커멓게 눌어붙듯이 옮겨붙는 마력을 제 금빛 마력으로 태운 소티스가 다시 앞으로 성큼 나섰다.

“쓸데없는 짓인지 아닌지는 겨뤄 봐야 알죠!”

소티스가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힘을 레먼이 인도했고, 이내 영혼을 소멸시키는 마법이 단도에 단단히 달라붙었다.

혼돈은 지체하지 않고 소티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뻗어져 나온 수많은 검은 그림자가 뾰족하게 제 모양을 바꾸더니 빛살처럼 쇄도했다.

소티스가 그것을 차분하게 쳐 내는 사이, 옆에서 남은 마력을 긁어모으던 퀘렐라와 알베스가 빈 부분을 메워 가며 도왔다. 퀘렐라가 혼돈의 움직임을 읽으면 알베스는 희게 빛나는 화살을 쏘아 혼돈을 방해했다.

“레먼, 영혼을 소멸시킬 수 있겠어요?”

[해 봐야죠. 제가 영혼 마법사라 다행이죠?]

“…….”

[그래도.]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혼돈이 손을 뻗었다. 소티스는 얼른 뒤로 물러나며 단도를 바투 쥐었다.

[저를 선택해 주셔서 고마워요. 소티스 님을 지킬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절대 모를걸요.]

대답 대신 소티스는 몸을 바삐 움직였다. 자신의 것인 듯,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움직여지는 모든 감각이 묘하게 낯설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반쪽짜리 마법을 썼구나!”

혼돈이 분노해서 고함을 내질렀다. 동굴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악령술사의 마법은 실패했다. 그들의 마력으로 대마법사 엘디카의 기억 제거 마법을 온전히 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악령술사들은 저들의 목표에 방해가 될 핀의 기억을 제거하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핀의 영혼 자체를 신체에서 완전히 분리해 버리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빈 몸에 내려앉은 영혼과 힘은 불안정했고, 레먼은 그 틈을 잡아 벌려 완전히 유리시킬 셈이었다.

“기억만 깔끔하게 제거했으면 이런 하룻강아지에게 밀리는 일도 없을 텐데!”

혼돈은 금방이라도 소티스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듯 씨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빛의 검을 내찌를 때마다 성큼 뛰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후회할 거다!”

혼돈이 내찌른 마기에 소티스의 어깨가 깊이 베였다. 피가 옷을 적시고 팔을 따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고통에 굴하지 않았다.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소티스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레먼이 길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 모든 힘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후회하겠죠. 제게는 더 쉬운 길이 있었거든요!”

규율들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래서 모든 영혼을 이어 묶어 이 싸움을 완벽하게 끝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실패해 육신만 죽이고 영혼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혼돈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소티스는 작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었다. 악한 것을 뿌리치고 가장 가엾은 것을 구해 내기로 했다. 자신의 삶이 불행했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른 길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내일을 손에 얻고 싶었다.

아무리 깊은 어둠이 밤을 지배하더라도 결국 여명이 밝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마법사들의 입에 발린 이상주의는 이제 지긋지긋해!”

혼돈이 뻗어낸 마기에 세 사람이 날아가 피 웅덩이 위를 굴렀다. 소티스를 지원하던 퀘렐라는 결국 마력이 다해 기절했고, 알베스 역시 가물가물 감겨 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퀘렐라를 챙겼다.

열 걸음쯤 밀려 나가 동굴 벽에 부딪힌 소티스는 쿨럭, 밭은기침을 토해 냈다. 속에서 울컥 무언가 올라오더니 결국 피 한 줌이 토해져 나왔다.

“그래도 저는, 길을…….”

소티스가 힘겹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아 흐려지던 빛의 단도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보여 줄 거예요.”

위선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좋았다. 그래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세상에 불행뿐인 삶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아무리 궂은 길을 지나도 결국 행복한 순간은 온다고. 누구든 행복할 자격이 있으며, 당신 역시 그렇다고.

그 사실을 핀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당신의 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레먼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빈손에 호박색 빛이 가득 차올랐다.

처음에는 한 개의 빛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둘이 되었다. 둘은 넷으로, 여덟으로, 열여섯으로, 서른둘로.

점점 수를 불려 나간 작은 빛이 너울너울 퍼져 나가며 길이 되었다. 그것은 동굴을 가득 메우며 한낮처럼 밝게 만들더니, 이내 무언가를 찾듯 잘게 떨었다.

그 모든 빛이 길이 되어, 소티스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소티스는 입을 열었다. 피를 토해 낸 마른 입술이 한 이름을 작게 속삭였다.

“핀.”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것이여. 모든 것을 가져도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이여.

그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단 한 번만이라도 안아 줄 수만 있다면.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지.”

그녀가 손을 뻗으며 속삭였다.

“이제 그만 어둠 속에서 나와, 내 손을 잡아.”

수백 조각으로 부서져 날아갔대도 좋았다. 이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전부 찾아서 끌어안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절대로 저물지 않는 태양이 될게.”

[유언대로구나.]

규율들이 속삭였다.

[그대에게 이 오래된 싸움을 끝낼 자격이 있다면…… 가장 가여운 것이 가장 바른 것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신께서 바른 것과 가여운 것에게 이르시되.]

[서로의 삶에 손을 내밀어 맞잡으면 불행이 씻기리라 하셨으니.]

[스스로 모든 것이 되려 하지 말고,]

[부족한 것을 맞들어 메우라.]

이내 소티스의 손으로 붉은 빛이 한 송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나비의 날개가 아주 작게 찢긴 조각을 닮아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었던 붉은 빛 한 송이가 더 내려와 앉았다.

그리하여 한 송이 더,

다시 한 송이가.

하릴없이 찢겨 나갔던 영혼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모여들어, 이내 누군가의 머리카락처럼 붉디붉은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

“눈부신 영혼…….”

그 모든 광경을 보던 알베스가 홀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보았던, 그 눈부신 영혼이 그대였구나.”

오래도록 제 빛을 잃었던 영혼은 이내 다시 본연의 찬란함을 갖추었다. 스스로 모든 빛을 찾지는 못하였으나, 부족한 것을 맞들어 주는 존재와 서로 기대서서 이내 그 완전함을 찾았다.

붉은 검에 호박색 광채가 감돌았다. 레먼의 모든 힘이 그곳에 모였기에 소티스는 이제 자신만의 의지로 움직여야 했다.

혼돈이 핏발 선 눈으로 소티스를 노려보았다.

“너를 반드시 죽여서 멸망의 전조로 삼겠다.”

이내 전신이 새카맣게 물든, 영혼 없는 여자와 마지막 규율이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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