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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09)화 (110/121)

109화. 혼돈 (3)

붉은 피와 짙은 어둠, 그리고 끈적이는 광기와 비탄이 도처에 가득했다.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쳐 만들어진 끔찍한 풍경은, 일전에도 본 적 있었던 것이었다.

“또 이렇게…….”

알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오래전, 엘디카를 비롯해 너무나도 많은 이들을 잃었던 그 날. 그런데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죽는다는 선택조차 하지 못했던 날. 그날 죽음이 휩쓸고 갔던 그곳에 알베스는 홀로 서 있었다.

그 지독한 상실은, 마치 어제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생생한 악몽으로 그의 영혼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죽음이 뒤덮은 페리윙클 마탑 속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알베스는, 이제 그 지독한 역사가 시작되었다던 바닷가에 와 있었다.

“안 늦었을 거예요.”

퀘렐라가 주먹을 휘둘러 제게 달려드는 악령술사를 후려쳐 날리며 다부지게 대답했다.

“저는 언니를 믿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견딜 거예요.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겠죠.”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잃기만 하는 건 싫어요. 그건 알베스 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먹을 꽉 쥐고, 어둠 속을 헤매며 동굴 안으로 들어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숱하게 흐른 피와 삿된 죽음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켜켜이 쌓인 피로로 온몸이 무거웠다.

사실 두 사람은 수색 마법을 펼치며 이곳까지 오느라, 그리고 앞을 막아서는 악령술사들과 싸우느라 마력을 바닥까지 사용한 채였다. 언제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회조차 없이 잃었던 엘디카와 수많은 동료 마법사들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신이 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알베스 님!”

그때, 동굴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핏줄기가 터져 나온 것 같은 불안한 빛이 번쩍이자 두 사람은 그곳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동굴 안에는 그들이 그토록 찾았던 두 여인이 있었다.

“소티스!”

“언니!”

바닥에 쓰러진 소티스의 양손에서는 피가 묻어 있었다. 날카로운 것이 베고 간 듯 손가락을 타고 붉은 피가 방울방울 맺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그녀의 피로 인해 완성된 마법진에서 눈이 시큰거릴 정도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알베스 님, 퀘렐라.”

소티스는 찌르는 복통과 구역감을 느끼며 몸을 옹송그렸다가, 힘겹게 말했다.

“핀이…….”

피투성이 손이 허공을 가리켰다.

그녀의 떨리는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불행을 빚어 만든 혼돈이 서 있었다.

“완성되었구나.”

제 어미의 유해에 어린 원념과 규율의 피, 그리고 숱한 신도들의 목숨을 먹고 태어난 혼돈.

마지막 의식을 통해 모든 힘을 제 그릇 안에 욱여넣은 핀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핀의 마른 입술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 아주 오래도록.”

녹색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소티스를 전혀 알아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적개심, 희열, 복수심, 파괴 본능 따위로 얼룩진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핀!”

소티스가 그녀의 이름을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나 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냉혹한 시선으로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던 소티스와, 그런 소티스를 부축하기 위해 뛰어오는 두 개의 그림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규율이로군.”

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틈에서 적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기억해. 언제나 우리의 목표를 방해했고, 우리를 가장 처참하게 죽였지.”

피투성이 발이 움직였다. 어떤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 터벅터벅 걸어가다 세 사람의 앞에 멎었다.

소티스는 다급하게 퀘렐라와 알베스의 앞을 막아섰다. 핀의 손끝에 검붉은 마기가 몰려드는 것을 본 소티스가 입을 열었다.

“핀, 이러지 말아요. 절 잊었어요? 저예요, 소티스 메리골드. 당신의 은인이잖아요.”

“…….”

“제게 와요. 저랑…… 떠나요. 이번에는 정말로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갈게요. 제가 숨겨 줄게요, 네?”

소티스가 간절하게 말했다.

짐승과 인간의 피를 밟고 선 혼돈은 공허하고 메말라 보였다. 그 녹색 눈동자는 상대를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허공에 정처 없이 흩어졌다.

소티스는 연한 금빛을 두른 손으로 핀의 손을 쥐었다. 그러나 그 차가운 손을 쥐었을 때, 닿은 부분이 검게 녹아내리는 것 같은 환각과 통증을 느끼고 깜짝 놀라 물러났다.

어둠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세상을 잡아먹고자 태어난 농밀한 불행이.

“내 딸을 찾니?”

혼돈이 말했다. 그녀가 앙상한 손을 허공에 뻗어 보이자, 그 위에 힘없이 날개를 늘어뜨린 붉은 나비가 보였다. 그것은 이내 쨍그랑, 작은 파열음과 함께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핀의 영혼이었다. 소티스가 이를 꽉 악물었다. 그토록 구하려 애썼던 영혼이 눈앞에서 허무하게 조각나는 것을 보자, 자신과 평생은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화가 났다. 부조리한 상황에 억울했다. 저 잔혹함이 미웠다. 일말의 동정심조차도 없는 저 건조한 질문에 소름이 끼쳤다.

“엘디카 숙모님의 원수…….”

퀘렐라가 이를 빠득 갈며 함께 나섰다.

“당신 딸은 어떻게 했어?”

“치웠단다. 더는 무의미하지 않니.”

찰박, 찰박. 검붉어진 발밑에서 누군가의 피가 튀었다. 제게 힘을 실어 준 대가로 죽은 이들을 발로 밀어 치우는 행동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혼돈은 오로지 소티스를 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너를 죽이고, 네 힘을 삼킨 뒤.”

“…….”

“세상을 잡아먹을 거란다.”

“…….”

“그때처럼 내 기억을 지운다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저는 엘디카 님과는 다르니까요.”

혼돈의 곁에 서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마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티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핀의 영혼이 부서져서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해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혼돈을 막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그녀를 동굴 밖으로 내보낸다면 세상은 그 이름대로 혼돈에 빠질 것이다.

“저를 이 지독한 운명에서 꺼내 주시고, 더는 불행하지 않을 내일을 주세요. 무엇도 망치지 않아도 좋고, 무엇도 괴롭히지 않아도 좋을 안식을 제게 주세요.”

그 말을 기억했다.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소티스는 그리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 마법으로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머리로는 알지만 손이 따라가지 못한다.

[마지막 규율이여.]

[우리를 불러.]

[우리 또한 이 순간을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어.]

[우리를 받아들여요, 소티스.]

[완벽하고 고귀한 죽음을.]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힘으로…….]

엘디카가 소티스에게 간절하게 속삭였다.

[우리 모두의 힘을 합친다면 아직 영혼을 연결할 수 있어요.]

[핀의 영혼은 깨졌지만,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으니…… 엘디카가 이끌면 마지막 혼돈의 생령도 가둘 수 있겠지.]

[그래야만 전쟁이 완벽하게 끝날 수 있어.]

하지만 소티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죽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규율들의 말대로라면, 영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엉킨 혼돈과 규율은 그대로 소멸한다고 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핀도.

자신의 한평생이 불행뿐이었다는 이의 마지막이, 다음 삶조차도 없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건 너무 슬퍼서.

그러나 망설임은 오만이었다. 혼돈이 차갑게 웃더니, 그대로 손을 뻗어 소티스의 목을 쥐었다. 거미 다리 같은 싸늘한 감각이 목을 옥죄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빙글 돌아갔다.

쾅! 등과 머리가 동굴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일순간 구역질까지 몰려왔다. 소티스는 앙상한 팔목을 양손으로 쥔 채 컥컥거렸다.

“그렇게 비참하게 불에 타 죽은 이후로, 고민했단다. 그 저주스러운 규율을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까.”

“컥, 허억…… 큭.”

“지난 규율, 그래, 엘디카라던가? 그 여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슴팍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까? 아니면 목을 졸라 높은 곳에 매달까? 아니면…….”

“…….”

“너무 억울하게 생각 말아. 어차피 온 세상이 네 뒤를 따를 거란다.”

“그렇게, 하면…….”

소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새하얗게 질렸다.

“당신, 은, 행복해지나요?”

“행복?”

“…….”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불행했단다. 우리가 불행해진 데 어떤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도 이유가 필요하지 않아.”

버둥거리는 소티스를 보며 혼돈이 웃었다.

“대단한 사연은 필요하지 않단다. 악은 단순하되 파괴적이지.”

“…….”

“너도 누군가를 미워해 보면 알아. 대단한 이유가 없어도 미워하는 건 쉬워.”

쾅! 그녀의 몸이 벽에 다시 부딪혔다. 이번에는 소티스도 발길질을 했다. 앙상한 손목을 쥔 손가락에 손톱을 세우고, 크게 버둥거리며 혼돈의 몸을 찼다.

그녀의 전신에서 금빛 마력이 뿜어져 나오자 혼돈이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타 소티스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요, 미워하는 건 쉽겠죠. 망가뜨리는 건 한순간이고 고치는 건 한평생이니까요. 누가 그걸 몰라서 열심히 노력하면서, 착하게 살아요?”

“…….”

“맞아요. 저도 당신이 미워요. 제가 그렇게 구하려고 애쓰던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차지하고 부서뜨리는 게 싫어요. 얼마나 힘들게 데려왔는데 당신은 자기 딸을 그렇게 대해요? 부모라면 자식을 사랑해야죠! 왜!”

문득 왕성에서 보았던 어린 핀이 떠올랐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외로워 보이는 옆모습이.

낙인찍힌 불행에 짓눌려 한평생 그런 표정으로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왜 핀을 혼자 뒀어요! 도대체 왜 그런 이름을 붙여 줬나요? 본인의 복수심을 위해서 아이에게 끔찍한 운명을 물려줬잖아요. 일부러 불행한 삶을 살도록 버린 거예요?”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소티스는 양손을 모아 가슴께 앞에서 깍지를 껴 잡았다. 그리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소티스의 손에서, 가장 밝은 빛을 뭉쳐 만든 듯한 단도 한 자루가 생겨났다.

“저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 그래서 그 반쪽짜리 영혼이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소멸시킬 거예요. 분명 어렵겠지만, 할 수 있어요. 아뇨, 해야 해요. 제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술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안에 스며들어 있던 규율들이 자신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소티스는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그녀가 떠올린 이름은, 얼굴은, 존재는 규율이 아니었다.

“레먼 페리윙클. 저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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