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08)화 (109/121)

108화. 혼돈 (2)

“마지막 규율이여.”

그건 누군가의 입에서 누군가의 귀로 전해지는 음성이 아니었다. 뇌리로 직접 파고드는 목소리는 진중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목소리가 반복해서 말했다. 경고하듯이 차가운 음성이었다.

“규율이여.”

“작은 규율이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서!”

소티스는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 사실, 이걸 ‘정신을 차렸다’고 표현해도 좋은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고민이 필요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차디찬 현실이 아니라, 수십 명의 규율이 그녀를 외쳐 부르는 무의식 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디카 님…….”

가장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단연 엘디카였다. 소티스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엘디카가 엄격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요. 혼돈이 곧 완성됩니다. 순수한 악이 되어 세상을 망가뜨릴 거예요.”

“…….”

“그들은 당신의 피를 뽑아 마지막 주문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다 그리고 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돼요.”

가장 최근의 기억을 짚어 보던 소티스가 놀라서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죠? 세 번째 각성! 저도 그걸 통해 완전한 규율로 거듭나야 하나요?”

그러자 일순, 그녀의 주변에 먹먹한 적막이 감돌았다. 폭풍 전의 고요처럼 섬뜩한 느낌이 들어, 소티스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저…….”

“소티스 메리골드.”

엘디카가 말했다.

“역대 규율들이 왜, 한 명도 빠짐없이 사라졌는지 알고 있나요?”

“그야…… 혼돈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런 이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소티스는 신중한 태도로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규율은 세 번째 각성을 통해, 선대 규율들의 영혼을 받아들입니다. 가장 위대한 마법사들이 직접 깃들어, 자신이 평생을 쌓아 만든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이는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의 불행을 막아 낼 수 없었던 초대 규율이 고안한 방법이라며 엘디카가 덧붙였다.

“혼돈과 달리 규율은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쌓인 힘을 찾아오기 위해 누군가의 피도, 희생도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대가 없이 힘을 빌려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소티스가 홀린 듯이 대답했다. 씁쓸한 어조였다.

“규율 자체가, 일종의 제물이 되는 거군요…….”

“그래요. 자신의 영혼을 제물로 삼아 모든 규율과의 영혼을 연결하고, 그들을 강림시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침묵하던 다른 규율들이 거들었다.

“본디 한번 연결된 영혼은, 웬만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 무사히 분리될 확률은 거의 절반 정도. 그 확률이 수십 번씩 곱해진다면…….”

그제야 소티스는 왜 역대 규율들이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초기의 규율들은 힘이 모자라 혼돈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그 이후의 규율들은 세 번째 각성에서 영혼이 융합되어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건 죽음보다 더욱 비정한 소멸이었다. 사라져 버린 규율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영혼 상태로 끝없는 시간을 헤아렸다.

이윽고 그 운명이 소티스의 앞에 당도했다.

“소티스. 기회는 한 번뿐이다.”

필멸의 운명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저들이 그대의 피를 제물로 하여 혼돈을 강림시키려 한다면, 그것을 역이용해 두 사람의 영혼을 연결하면 됩니다.”

“그래. 그렇게 되면 혼돈은 다시 태어나지 못하겠지.”

“이 지난하고 긴 싸움도 드디어 끝나는 날이 오는구나…….”

“그러니, 마지막 규율이여. 그대의 영혼을 대가로 걸고 우리의 강림을 허락해 다오.”

“세상을 위해서는 때때로 희생이 필요한 법.”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사형 선고가 되어 소티스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온전한 마지막을 꿈꾸고 있다고 하였지. 그리하여 그대가 바라는 것이 당도하였다.”

규율들이 그녀에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베아툼의 모든 규율이 소티스 메리골드에게 고결하고 고귀한 죽음을 요청하는바.”

“규율이여, 사라져 다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규율들은 그들의 마지막 동료가 결단을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소티스가 약간의 절망과 불안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영혼을 연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엘디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과하듯이 대답했다.

“우리를 생각해 주세요.”

그건, 한 남자가 그녀에게 했던 말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세요.”

“우리는 언제나 그대의 곁에 있고.”

“그리하여 그대가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반드시 응답할 것입니다.”

***

정신이 들자마자 느껴지는 건 지독한 피비린내와 피부로 와 닿는 습한 공기였다.

소티스는 눈을 뜨고 주변을 조심스레 살폈다. 반쯤 녹은 양초 몇 개가 켜켜이 쌓인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습기로 인해 무거워진 공기를 이겨 내지 못하고 툭, 무언가에 짓밟히듯이 사그라졌다.

눅눅한 공기에는 피 냄새가 가득했다. 마치 피를 흠뻑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었다. 소티스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몸을 비척비척 일으켰다.

훅, 어디선가 거인이 입김을 분 것 같은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소티스의 발밑이 붉게 타올랐다.

“……우욱.”

그제야 소티스는 자신이 무엇을 밟고 있는지 알아챘다. 그건 짐승과 사람의 피로 빚어 만든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붉었던 것은 이미 굳고 뭉쳐 검게 변한 뒤였다.

몇 개의 생명이 이 안에 녹아 있을까.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짙은 악의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소티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붉은 머리의 여인이 고개를 들고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이리 와요.”

소티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핀을 불렀다.

“핀.”

“…….”

공허해 보이는 그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이 슬퍼서, 소티스가 연신 손짓했다.

“……이리 와요, 핀. 구해 줄게요.”

그녀의 간절함이 전해진 걸까? 핀이 씁쓸하게 웃었다.

“소티스 님을 희생해서 저를 구해 주시는 거라면, 저는 싫어요.”

핀의 힘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일 뿐이에요. 저는 당신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걸요.”

소티스는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밧줄로 단단히 묶여 있어 일어나 앉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핀의 상황도 썩 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팔다리를 묶어 두지 않았는데도 일어나 서지 못하는 것을 보니 부상이 상당히 심한 듯했다.

어쩌면 다리를 아예 쓰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이제 곧 자정이에요.”

핀이 비척거리며 동굴의 구석으로 향했다. 반쯤 기어가는 그녀는, 소티스에게서 한 뼘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주문은 이미 완성됐어요. 이제 달이 가장 높은 곳에 걸리면…… 저는 모든 혼돈의 힘을 찾게 돼요.”

“핀, 당신의 기억을 잃게 될 거예요!”

소티스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마구 문지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접경 지역에서 ‘순례자’들이 보였던 행보를 떠올린 탓이었다.

“악령술사들은 당신의 기억을 모두 지우려고 해요. 당신이 그들을 이용했던 것처럼, 그들도 당신을…….”

“괜찮아요.”

핀이 정말로 후련하다는 듯이, 그리고 기껍다는 듯이 웃었다.

“퀘렐라 에니드와 알베스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두 사람의 마력이 느껴져요. 스카우터가 심어 두었던 이들이 이곳의 위치를 전달했을 테니까, 바깥을 지키고 있던 이들을 해치우고 소티스 님을 구하러 오겠지요.”

“…….”

“세 사람이라면, 저를 죽일 수 있을 거예요. 실패하시면 안 돼요, 알겠죠?”

“핀, 저는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

“소티스 님.”

붉은 머리의 여인이 소티스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저를 구해 주고 싶다고 하셨지요?”

“…….”

“좋아요. 구해 주세요. 저를 이 지독한 운명에서 꺼내 주시고, 더는 불행하지 않을 내일을 주세요. 무엇도 망치지 않아도 좋고, 무엇도 괴롭히지 않아도 좋을 안식을 제게 주세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해칠 줄 알고요…….”

“제가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제 영혼을 갈기갈기 찢으신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대신 소티스 님께서 다치지 않는 선택을 해 주세요.”

핀의 목소리에는 어떤 망설임도 묻어나지 않았다.

“자정이 되면 저는 마지막 각성을 통해 진정한 혼돈으로 거듭날 거예요. 지금 저희 주변에 있는 이들의 숨 또한 제가 거두게 되겠지요. 소티스 님의 피가 조금 필요할 테지만, 죽을 정도는 아닐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티스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끌어모아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구체가 수십 개의 작은 구슬로 변해 널찍한 동굴을 비추었다.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동굴의 전경은 끔찍했다. 피를 겹겹이 덧대 발라 그린 마법진의 모습은 불온하기 짝이 없었고, 반쯤 썩은 짐승의 사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정말로 두려운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빛으로 인해 숨어 있던 악령술사들의 존재가 드러났다. 수십 명의 악령술사들은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두 여자를 에워싸듯 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마를 땅에 박고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대로 돌이 되어 굳어 버린 것처럼,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기껍고 숭고한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발밑에는 그림자처럼 보이는 피 웅덩이가 조금씩,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이 모든 불행을 집어삼키고.”

그리하여, 마지막 혼돈이 규율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완벽하게 걸어 나가는 게 제 목표예요.”

“…….”

“믿어 주세요, 소티스 님. 저는 언제나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랐어요.”

두 여인의 삶에 다시는 없을 만큼 어두운 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