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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07)화 (108/121)

107화. 혼돈 (1)

소티스 메리골드는 거칠거칠한 바위를 짚고 디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구름이 하늘을 가린 탓에 새벽이 되도록 세상은 어두웠다. 불빛 하나 없이 궂은 길을 나아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위를 짚은 손은 이곳저곳 까져 욱신거리고, 바닷물에 젖어 달라붙은 옷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는 걸어갔다. 아무리 휘청거려도 다시 일어나는 소티스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몸을 낮추거나 무릎을 바닥에 대고 기어야 한대도 전혀 상관없었다. 그런 수고는 어떤 고초조차 되지 못했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소티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제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디작은 목소리였으나 또렷하고 단호했다.

피니에 로즈우드를 구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 길고 파괴적인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포기하고 두려워하기만 하는 삶은 지긋지긋했다.

이제 무엇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믿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끝없이 다짐하며 발을 옮겼다. 앞으로, 더 앞으로.

그녀의 비정한 고국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흐린 날이어도 기어이 태양은 떠올랐고, 세상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굴…….”

먼발치에 작은 동굴이 보였다. 당장에라도 가서 부르튼 발을 조금 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소티스는 고개를 얼른 흔들어 나약해지는 마음을 떨쳐 냈다.

“동굴이 보여도 들어가지 마세요. 밀출국한 악령술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아니더라도 국경을 몰래 넘어 다니는 이들 중 질 나쁜 이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 되도록 누구도 만나지 않는 게 좋아요.”

핀의 조언을 들어서 나쁠 게 없을 듯했다. 핀은 악령술사들과 합류하러 갔으니, 이제는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의식의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소티스 님. 제물을 다 모았거든요. 곧 피와 영혼을 밟고 혼돈이 태어나겠지요.”

헤어지기 전, 핀은 혼돈의 탄생에 대해 빠르게 설명했다.

혼돈은 세 번의 각성을 통해 진정한 힘을 손에 넣는다. 자신이 세 차례의 각성을 통해 선대 규율들의 힘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비슷했다.

첫 번째 각성에서는 운명을 깨닫고, 두 번째 각성에서는 그들의 모든 지식과 힘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세 번째 각성을 통해서는, 그 모든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제가 자아를 잃고 그들의 도구로 전락한다면, 반드시 소티스 님께서 저를 막아 주셔야 해요.”

핀은 이제 세 번째 각성만을 기다리고 있다. 혼돈은 불안정한 존재로, 세 번째 각성을 위해 ‘의식’이 필요하다. 깨진 그릇을 막기 위해 수많은 영혼을 집어삼키고, 혼돈의 강림을 기원하는 악령술사들의 마력마저 흡수한다.

모든 것을 다 쥔 채 추락하려는 거다. 그럼 악령술사들이 더는 혼돈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을 망가뜨릴 수 없으니 모든 것이 무탈할 것이다.

“소티스 님.”

핀이 건넸던 모든 말이 머릿속에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서 괴로웠다.

“혹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소티스 님께서 자책하시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꾸역꾸역 이어 가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치미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은 정말 많은 일을 해냈어요. 적어도 한 명의 삶을 통째로 바꾸셨지요. 소티스 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제 어머니처럼 살았을 거예요. 온 힘을 다해 세상을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며 저열한 만족감을 느꼈겠지요.”

하지만 핀은 이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비록 지금껏 살아온 삶이 불행했으며, 자신과 얽힌 이 역시 불행해진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더욱 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보여 주고 싶었고, 증명하고 싶었다. 당신은 불행 따위가 아니라고.

당신에게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고, 기어이 행복해지고 말 거라고.

“…….”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뭍으로 나왔다.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니, 배를 띄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주문하러 온 이들로 붐비는 곳이 보였다.

소티스는 제 행색을 보고 놀란 이를 붙잡고 간절하게 물었다.

“혹시 빨간 머리의, 제 또래 여자를 못 보셨나요? 잿빛 단발머리의 노인이나…… 아니면, 긴 갈색 머리의 남자와 함께 있을 수도 있어요. 분명히 이쪽 길로 왔을 거예요.”

“글쎄, 모르겠는데…….”

몇 명에게 물어보아도 경계심 어린 눈빛만 돌아올 뿐 필요한 정보는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티스는 끈질기게 사람들을 붙잡으며 물어보았다.

열 명을 붙잡은 것도 같았고, 스무 명을 붙잡은 것도 같았다. 그런 사람은 본 적 없다는 대답이 반복될 때마다 소티스는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혹시 이쪽으로 온 게 아닌가? 하지만 거의 외길이었고, 소티스를 기다린다면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그이들은 무슨 일로 찾소? 생긴 것 외에 특이한 점은 없고?”

한 남자의 물음에 소티스가 얼른 대답했다.

“사람을 찾고 있을 거예요. 저처럼 수소문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연보랏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의 여자를 찾기 위해 이 근방을 돌아다녔을 거예요.”

“연보랏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의 여자…….”

그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무엇이길래?”

그 목소리에 속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불안한 기분이 더럭 들어 소티스는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

그러나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그녀의 몸은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어느새 낯선 이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짙은 색의 후드로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리고 있었고, 음험하게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령술사구나. 소티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되도록 아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걱정 마라, 소티스 메리골드.”

그녀에게 질문했던 남자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네 죽음조차도 이용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있지. 그러니 얌전히 따르도록 해. 그렇다면 네 시신의 사지 정도는 붙여 네놈의 가족들에게 보내 줄 테니까.”

“……나를 의식의 제물로 바칠 건가요?”

“그 여자가 이것저것 잘도 불어 둔 모양이군. 역시 만난 거지?”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웅성거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믿을 만한 여자가 아니라니까. 알량한 은혜를 갚겠다고 설칠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뭐, 상관없어. 필요한 건 그 여자의 껍데기뿐이니.”

“어차피 곧 죽일 건데 선심이라도 쓰자면, 그래. 제물로 바칠 거다. 숭고한 의식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넌 이 세상을 망가뜨릴 불씨가 될 거다.”

“이 정도면 볕은 실컷 봤겠지? 만끽해 두라고.”

사방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퍼졌다.

“이게 네가 보는 마지막 햇빛일 거다.”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소티스는 눈을 부릅뜨며 뒤로 물러났다. 손을 앞으로 뻗자 손끝에서 쏘아져 나간 빛의 탄환이 사내의 뺨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큭!”

그 광경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피 한 방울 못 보는 심약한 여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급하면 뭐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적당히 때려잡아!”

소티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마력을 끌어모았다.

멘데즈에서 베아툼으로 갈 때와는 달랐다. 그녀를 대신해 주변을 살펴 줄 애나도, 단도를 휘두르는 레먼이나 도끼로 적을 모두 해치워 줄 아벨도 없었다.

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물건을 챙겨서 일찌감치 멀리 피해 버렸고, 독이 바짝 오른 사내들은 그녀를 정말로 때려서 기절이라도 시킬 것처럼 굴었다. 누군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했고, 허리에 매어 두었던 단도를 꺼내 휘두르는 이도 있었다.

소티스의 손에서 빛살처럼 뻗어져 나온 것들이 악령술사들의 목덜미와 팔, 허벅지 따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빛이 다리를 관통했을 때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소티스의 젖은 옷에 튀기도 했다.

“계집 하나 잡는 데 왜 이리 시간이 걸려!”

곳곳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차피 제대로 된 규율도 아니다. 마력도 한 줌뿐일 텐데 뭘 겁내는 거야!”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섯 명을 쓰러뜨렸으나 세 명이 남았고, 소티스의 마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눈앞이 흐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안 되는데.

이대로라면 마력을 다 써서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지친 상황에서 마법을 쓴다고 해도 유효할 리 없었다. 그들 또한 불완전하나마 마법을 쓸 수 있었고, 아직 싸울 수 있는 이가 셋이나 남아 있었다.

여기서 끌려간다면 퀘렐라는 소티스가 이곳에 왔다 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다른 곳을 헤매며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리는 게 낫겠어.’

소티스가 손을 뻗었다. 남자들은 경계하면서도 저들 역시 주먹을 쥐었다. 그들의 전신에서 검은 마력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티스는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위로 향한 손은 허공으로 뻗어져 나가, 선명한 호박색의 문양을 허공에 퍼뜨렸다. 큰 폭죽 같은 소리를 내는 그 빛이 커다란 눈동자 형태의 표식을 그려 냈다.

페리윙클 마탑의 상징물, 주홍빛 눈동자.

이거라면 분명히 퀘렐라는 소티스가 이곳에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녀는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능숙하니, 여기 있던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것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찾아 줘, 퀘렐라.”

그 작은 애원을 끝으로, 소티스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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