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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06)화 (107/121)

106화. 일몰의 시간 (3)

쏴아, 쏴아아…….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울렸다. 이따금 거센 바람에 휘말리듯이 다가온 바닷물이 몇 방울 튀기도 했다.

소티스는 지독한 한기 속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탓에 억지로 정신을 차린 것에 가까웠다.

“일어나세요, 소티스 님.”

핀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이자, 소티스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체온이 너무 많이 떨어졌어요. 더 주무시는 건 위험해요.”

“……핀.”

사방은 이미 어두워 사물의 윤곽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소티스는 더듬거리며 뻗은 손으로 핀의 팔을 쥐었다.

앙상하고 차가운 팔이었다. 한겨울의 나뭇가지를 만진다면 그런 느낌일까. 바다에 빠져 몸이 식은 자신만큼이나 차갑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게 와닿았다.

“왜 여기에 계세요?”

“기다렸어요.”

핀이 작게 속삭이듯이 대꾸했다.

“소문이 퍼졌을 테니까요. 그럼 소티스 님께서는 분명히 저를 찾아 주실 것 같아서,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런 방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지만…….”

“…….”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하셨어요.”

소티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퍼졌다.

“하지만 제가 이리 올 것을 알고 계셨잖아요.”

“소티스 님이라면 가장 안전한 길이 아니라, 가장 확실한 길을 찾으실 것 같았으니까요. 악령술사들의 시선을 피해서 이쪽으로 돌아오실 거라 믿었어요.”

바위에 등을 기댄 소티스는 뻣뻣하게 식은 손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짰다. 다행히도 여름이라 해가 지고 난 뒤에도 크게 춥지 않아서,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좀 견딜 만했다.

“퀘렐라.”

문득 자신이 잃어버린 일행을 떠올리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핀, 혹시 제 일행은 못 보았나요? 당신처럼 붉은 머리에 조금 차가운 인상이고, 눈이 검어요. 얼음 조각을 타고 떠내려갔을 텐데…….”

“감정 마법사라면 아마 잘 도착했을 거예요. 스카우터가 국경을 넘어간 다른 대마법사와 합류했다는 보고를 들었거든요.”

대마법사? 대마법사들이 아니라? 그렇다면 레먼과 알베스가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티스 님은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악령술사들의 눈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조심해서 다니신다면 며칠은 괜찮을 거예요.”

핀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니 조심하세요. 그들은 평생 기다리던 일을 앞두고 굉장히 예민해져 있어요. 소티스 님을 해치기 위해 과격한 방법도 불사할 거라는 뜻이에요.”

“평생 기다리던 일…….”

그건 분명 혼돈의 강림을 말하는 거겠지. 준비한 영혼들을 제물로 바쳐, 가장 위대한 악령술사를 불러오는 것. 그리하여 태어난 혼돈을 앞세워 세상을 망가뜨리고 복수하는 것까지가 그들의 소명이었다.

복수. 그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을 미워했다. 저들을 버린 베아툼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에게 서슴없이 비정해지는 멘데즈조차도 철저하게 망가뜨리려는 거다.

“핀.”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는 혼돈은 붉은 머리의 여인이 되어 나타났다.

피니에 로즈우드, 그 불행한 여자가 그들의 숙원을 이루어 줄 그릇인 셈이다.

하지만 그 그릇은…….

“저랑 가요.”

소티스가 황급히 핀을 붙잡으며 말했다.

“악령술사들은 광신도와 같아요. 그러니 온전한 혼돈을 불러내기 위해 당신을 망가뜨릴 거예요. 저는 당신이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도 알아요.”

핀의 손이 다가와 소티스의 손을 쥐어 천천히 떨어뜨렸다.

“지금은 비록 순종적인 그릇인 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악령술사들은 저를 믿지 않아요. 최악의 수를 가정해야 할 수도 있어요. 물론 그렇다고 도망치지는 않을 거예요. 제게도 물러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핀, 이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녀는 한 명이고, 악령술사는 여럿이다. 만일 핀의 기억을 지울 마법을 완전히 복원해서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무엇을 위해 자신이 악령술사를 모았으며 혼돈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조차 잊고 말 것이다.

“저랑 같이 가요. 함께 가서 마법사들을 설득하고 방법을 찾아봐요, 네?”

“소티스 님.”

그녀가 소티스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제가 소티스 님의 곁에 있는 건, 당신의 행복을 해치는 일이에요. 거대한 불행이나 마찬가지인 저를 왜 거두려고 하세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자신의 삶을 불행이라 말하는 그 어조가 너무나도 태연해서, 그래서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팠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겠어요?”

핀이 간절하게 속삭였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는 기대감과 열망으로 가득했다.

“제가 더는 자신이 아니게 되는 때가 온다면, 소티스 님께서 직접 저의 목숨을 거둬 가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들렸다.

소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언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 들었다. 가혹한 부탁을 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제게 그런 부탁을 하는 핀이 무정하게만 느껴졌다.

“제가 어떻게 그래요.”

소티스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내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어요. 그 마음만으로 당신을 거두었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제 손으로 당신 목숨을…….”

그러자 핀이 낮게 웃었다. 그녀는 소티스의 손을 끌어다 제 배 위에 가만히 얹어 보였다.

거짓 생명이 지나간 곳은 납작했다. 풀 한 포기 견뎌 내지 못하는 황무지처럼 버석버석하고 서늘한 촉감만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소티스 님을 위해 사는 것이 저의 행복이에요.”

“…….”

“전, 정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제가 두려운 건 마녀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것도 아니고, 처참하게 불타 죽는 것도 아니에요. 소티스 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당신의 삶에 납작한 고난으로만 기억되는 것만이 두려워요.”

핀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소티스도 알았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무력감. 그것 때문에 그녀 또한 이 거친 뱃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지 않았던가.

“제가 당신의 태양이라 하셨지요.”

“네, 소티스 님.”

소티스가 슬프게 웃으며 물었다.

“제가 당신의 삶을 정말로,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나요?”

괜히 안 구하느니만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소티스는 이따금 그런 나약한 생각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했다.

황성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핀은 그냥 평범하게 살지 않았을까. 은혜를 갚겠답시고 이렇게 거짓말하고 도망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제 알량한 호의가 당신을 더욱 선명한 불행으로 내몰았다면…….”

소티스는 말끝을 흐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한 줌뿐인 별빛에 의존해야만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었다. 그걸 어둡다고 느끼는 건, 낮 내내 세상을 비추던 태양을 기억해서였다.

세상이 밝지 않았더라면, 어둠이 두려울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아뇨.”

그러나 핀의 대답은 그런 소티스의 상념을 내몰았다.

“저는 이제 그 어떤 불행도 두렵지 않아요.”

핀의 목소리는 아주 가늘고 위태로운 환희로 떨리고 있었다.

“저는 태양을 보았어요. 아주 잠시지만, 볕을 쬐었던 삶은 그게 없었던 삶과는 달라요.”

“……핀.”

“소티스 님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소티스 님께서 건네주신 호의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눈부셔서, 당신이 없는 세계가 얼마나 비정하고 차가워질 수 있는지 알게 됐어요. 태양이 저물고 난 뒤의 어둠이 더욱 지독하고 두렵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하지만 핀은 소티스가 단순한 빛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가 건넨 마음에는 친절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타인을 구하는 동시에 본인도 강해졌다.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자신을 긍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옳은 길로 이끈다. 더 온전한 선의를 위해 고민하고 성장하며, 기어코 자신의 불행마저도 보듬는다.

그러니 믿는 것이다. 찰나에 불과한 것 같은 이 행복으로 어떤 불행이든 헤쳐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녀처럼 산다면, 결국 스스로 행복해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어두워도 괜찮아요. 이튿날이면 다시 해가 뜰 테니까.”

핀이 열띤 음성으로 속삭였다.

“제 삶이 가장 어두웠을 때 소티스 님을 만났어요. 한평생 저를 기다리는 건 암흑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태양이 있었던 거예요.”

“…….”

“저는 여기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제가 아니면 못 할 일을 할 거예요. 소티스 님이 들으시면 분명 슬퍼하시겠지만요.”

붉은 머리의 여인이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불행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답니다. 불행은 다른 불행을 끌어모으지요. 그러니까 분수도 모르고 당신을 갉아먹던 나쁜 것들은, 모두 제게 주세요.”

그 가혹한 말에 소티스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 당신의 행복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핀이 잠시간 침묵했다. 그녀는 슬픈 듯, 기쁜 듯, 감동한 듯, 미안한 듯……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결을 세세히 헤아리듯이 가만히 앉아 소티스의 마음을 삼켰다.

“제가 없어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소티스 님. 당신은 절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셨잖아요.”

그건 너무나도 완고한 거절이라, 소티스는 더는 그녀를 데려가겠다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저 간절하고 슬픈 눈으로 어둠 속에 숨은 핀을 찾고, 또 찾을 뿐이었다.

“밤이 아무리 어두워도 이튿날이면 태양이 떠오르고, 세상은 결국 밝아질 거예요. 제 주변이 공허했던 건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 숨어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정중했으며 자신이 믿는 어떤 신을 향해 기도하듯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소티스는 침묵 속에서 핀의 앙상하고 차가운 손을 쥐고, 치미는 감정을 겨우겨우 삼켜 냈다.

“가세요.”

핀이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제 약속을.”

“…….”

“저를.”

“…….”

“당신을 집어삼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 불행을 기억해 주세요.”

붉은 머리의 불행이 울듯이 속삭이고 있었다.

“비록 나쁜 방식이었지만…… 이게 저의 최선이었어요.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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