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일몰의 시간 (2)
“너희들은 혼돈의 강림을 방해했다. 그건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다.”
사공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는 가장 순수한 신을 모실 자격이 있다. 그리하여 온전한 혼돈이 이 세상에 내려앉았을 때, 우리는 너희들의 이기적인 낙원을 파괴할 것이다. 누구든 불행 앞에 평등하다. 너희는 사무치는 슬픔에 집어삼켜질 의무가 있다.”
그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티스와 퀘렐라는 반사적으로 배의 끝까지 물러났는데, 사공이 한 걸음 다가오자 배가 크게 출렁이며 한쪽으로 기울었다.
소티스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몸 하나 숨길 곳 없는 처지를 새삼스레 실감하고 나니 두려움이 배로 커졌다.
“그래요. 제가 규율이에요.”
소티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주춤거리며 일어나자 퀘렐라가 소티스의 손을 얼른 잡아당겼다.
“뭐 하는 거야, 언니!”
“……저 애는 혼돈과도, 규율과도 아무 관계가 없는 일행일 뿐이에요. 제가 세상 물정을 몰라 국경 너머까지만 동행해 달라고 했어요.”
퀘렐라라도 살려야 했다. 소티스가 간절하게 말했다.
“저랑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당신과도 어떤 상관도 없을 테지요. 꼭 당신이 이곳에서 죽어야 할까요? 그게 아니라면…… 저 애를 국경 너머로 데려다주세요.”
이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마법을 써야 할까. 그녀의 머리가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력 운용이 아직 서투른 그녀가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라면, 단순하면서도 명확해야만 했다.
그동안 연습했던 게 뭐가 있었지? 어떤 마법에 성공했었지? 급박한 상황에 처하니 오히려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이 어찔하고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소티스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덧붙였다.
“저 애는 이미 한평생 불행했어요. 소중한 걸 다 잃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더는 괴롭히지 마세요.”
“규율의 일을 돕는 것만으로도 중죄다. 내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기껍다. 이것은 순교나 마찬가지다. 내 죽음은 이 세상의 어떤 죽음보다도 값지고 숭고하게 기억될 것이다!”
소티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아뇨! 죄 없는 자를 해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순교인가요? 당신의 그 알량한 자부심이, 남은 삶 동안 누릴 가능성보다 위대하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이건 모두 가장 순수한 신을 위해서다. 너는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해. 그래. 마법사들이 무슨 수로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겠나?”
“그래요. 당신들은 마법사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혼이 망가지고 삶이 불행해졌겠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나요? 불쌍한 여자를 제물로 바쳐 소환한 신이 세상을 평등한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면, 당신의 슬픔에 위로가 되던가요?”
그건 소티스가 그 남자에게 하는 말이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행복해져야죠. 슬펐던 만큼 치열하게! 더 나은 것만으로, 더 좋은 것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가득 채워야죠. 왜 포기하고 사라지나요? 그 삶은 그대로 끝나 버린다고요!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고, 사라져 버린 삶을 기억하는 건 타인뿐이잖아요!”
“불행한 삶 따위 기억해서 무얼 하겠어!”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치더니 성큼 다가와 소티스의 멱살을 쥐었다.
“너는 몰라. 그래, 모를 수밖에 없지. 소티스 메리골드, 저주스러운 규율의 후계자! 네가 불행에 대해 무얼 알지? 배를 곯아 본 적이 있나? 부모에게 버려져 길바닥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고 바닥을 기며 구걸한 적은? 귀족들이 가래침을 뱉으며 욕설을 한 적이나 있었던가?”
“그래서, 제가 모든 걸 다 가졌다 생각하나요? 한평생 행복하기만 했을 것 같은가요?”
소티스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누구나 삶은 힘들어요. 불행의 종류만 다를 뿐, 누구나 자신의 삶과 치열하게 싸우며 행복을 거머쥐기 위해 노력한다고요!”
“…….”
“누구나 상대가 자신보다 나을 거라고 믿죠. 어둠보다 빛을 먼저 찾는 게 사람의 본능이니까요!”
철썩, 높게 솟아오른 파도가 배를 덮쳤다. 차가운 물이 세 사람의 옷을 적셨다.
소티스는 이를 악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배를 대기로 한 곳이 먼발치에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헤엄쳐서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게다가 물살이 빨라서 육지에 닿기도 전 어디로 휘말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하고 빠져 죽을 수는 없다.
“궤변은 집어치워!”
사공의 앙상한 손이 소티스의 멱살을 더욱 바투 쥐었다. 그녀는 옷 때문에 목이 졸려 켁켁거리면서도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아는 것은 많았다. 각성을 통해 선대 규율들의 지식을 대부분 받아들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단기간 소화해 내기에 너무 방대했다.
“아무리 잘난 듯 떠들어도 이제 끝이다, 규율. 넌 여기서 나와 얌전히 수장당하는 거야.”
“……퀘렐라, 물에 뛰어들어!”
퀘렐라가 등 뒤에서 빽 소리쳤다.
“미쳤어? 그대로 빠져 죽을 거라고!”
“내가 구해 줄게!”
소티스가 간절하게 외치며 눈을 감았다.
가장 단순한 마법이 필요했다. 그녀가 해냈던 마법 중 물에 뜰 수 있을 만한 것.
정답은 얼음이었다. 주변에 널린 것이 바닷물이었고, 속을 비운 얼음은 물 위에 뜰 것이다. 얼음을 만드는 마법은 몇 번이나 연습하지 않았던가.
망설일 시간이 없다. 고민하는 사이에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양손을 맞잡았다. 그대로 전신을 흐르는 마력에 집중했다.
이내 그녀의 전신이 햇빛 같은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났을 때였다.
“허튼수작을 부려도 소용없다!”
노인의 노성과 함께 몸이 기울었다. 사공이 소티스를 붙잡은 채로 조각배의 바깥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동시에 소티스의 얼음 마법이 완성되었다. 물에 뛰어든 퀘렐라의 젖은 몸이 다시 솟아올랐다. 그 밑에는 그녀를 태울 만큼 큼직한 얼음이 물살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언니!”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배가 뒤집혀 버렸다. 남자는 소티스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손을 놓았다. 거센 물살 너머로 보았던 그의 얼굴은 가라앉는 순간마저도 여전히 환희에 가득 차 있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소티스가 힘겹게 위로 손을 뻗었다. 파도를 뚫고 나온 흰 손이 애처롭게 허공을 더듬었다.
얼음, 여기서 얼음을 더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퀘렐라 몫을 만드느라 마력을 너무 많이 썼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니 평소라면 쉽게 되었을 것도 잘되지 않아서, 몇 번이고 손끝에 맺혔던 빛이 힘없이 꺼지기를 반복했다.
‘……레먼이 있었다면 나았을까.’
비겁한 생각인 걸 알면서도 레먼이 떠올랐다. 그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구해 주었을 텐데.
레먼. 그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깊이 그리워한 탓인지 목걸이를 걸어 둔 목덜미에 홧홧한 열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소티스는 그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입을 벙긋거리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차마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창피했다. 그와 떨어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위험해지다니. 그가 알면 무어라 할까. 왜 조심하고 의심하지 않았냐고 타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벌써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턱. 소티스의 손에 무언가 잡혔다. 차디찬 얼음이었다. 퀘렐라를 태워 보낸 것보다는 작고 얇았지만, 그래도 붙잡고 오를 수 있을 만큼은 단단했다. 그녀는 아득바득 그 얼음덩어리에 매달렸다.
“언니!”
저 멀리서 퀘렐라가 간절하게 소리쳤다. 퀘렐라는 소티스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몸을 띄우는 마법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거리가 멀어지며 효력이 떨어져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이름을 간절하게 외치는 것뿐이었다.
소티스는 거센 파도에 얼굴을 얻어맞으면서도 꾸역꾸역 얼음에 매달려 버텼다. 그나마 물살이 그들을 목적지로 데려가 주고 있었지만, 파도가 너무 높게 쳐서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대로 살아남아서 뭍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날것의 공포가 숨통을 조여 오는 듯한 기분에 소티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따라갈게!”
소티스가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바닷물이 자꾸 들어차 흐려진 시야에, 일몰하는 하늘이 어른어른 맺혔다.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럴 시각이었다. 누군가 흘린 피처럼, 혹은 어떤 마녀의 머리카락을 펼쳐 둔 것처럼 하늘이 한없이 붉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정신을 차리고 얼음 조각을 필사적으로 붙드는 것, 살아남기를 기도하는 것, 그리고 몇 번인가 아는 주문을 외우고 또 마력을 쏟아부어 필사적으로 쥐고 있는 얼음이 녹거나 부서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
하지만 소티스의 능력은 그 험한 바닷길을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 약했다. 십여 분을 그렇게 떠내려가던 그녀는 목적지를 그리 많이 남겨 두지 않았을 때쯤 그만 얼음 조각을 놓치고 말았다. 차가운 것을 부여잡느라 꽁꽁 언 손에서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입술은 파랗게 질렸으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 듯했다.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이 넘실거리며 그녀를 집어삼킬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구하기는 누굴 구해…….’
소티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제 목숨 하나 구명하지 못하면서, 정말이지 누굴 구한단 말인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력 고갈이 심했던 탓이다. 눈앞이 제멋대로 이지러지며 까맣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기절하면 정말로 죽을 텐데.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비정한 죽음이 손아귀를 뻗은 채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그러나, 소티스를 잡아챈 건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아귀였다. 차가웠으나 단단했고, 무정한 듯하면서도 단호했다. 우악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손길에는 요령이 없었으나, 세상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소티스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정신을 억지로 붙들고 눈을 뜨자, 시야에는…….
“안녕하세요.”
해 질 무렵의 사막 같은 여인이었다.
아,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여인이었다.
붉은 머리의 여인이 담담하게 속삭였다.
“나의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