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일몰의 시간 (1)
“기억 마법을 시전하는 해설법이야. 일부에 불과하지만, 분명해.”
종이를 보는 순간 퀘렐라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티스의 어깨를 잡으며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단순한 기억 마법이 아니야. 이건…… 숙모님께서 마지막으로 연구하시던 기억 마법이라고.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언니, 어디서 찾은 거야? 누가 가지고 있었대? 뭐라고 하면서 줬어?”
“퀘렐라, 진정해. 다 말해 줄 테니까.”
퀘렐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디카에 관련된 일이면 그녀는 곧잘 여유를 잃곤 했다.
“악령술사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야.”
“그 사람들이 기억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고?”
그녀는 나이 든 뱃사공에게 웃돈을 얹어 주며 잠시 주변에서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소티스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가방에서 깃펜과 종이를 꺼내 일부뿐인 주문을 역추적하는 퀘렐라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긴 침묵 속에서 주문을 분석하던 퀘렐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기억을 지우는 주문이야. 엘디카 숙모님께서 전대 혼돈에게 하려던 마법과 비슷해. 그것만큼 완벽하지는 않지만, 좀 더 파괴적이야.”
“파괴적이라는 건 무슨 뜻이야?”
퀘렐라는 모욕적인 것을 본 것처럼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종이를 갈기갈기 찢은 뒤 발로 밟았다.
“숙모님은 사람의 영혼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특정한 기억만 골라서 제거하는 방법을 연구하셨어. 하지만 이 마법은 그렇지 않아. 대상자를 보호할 수 있는 문자가 전부 제거된 것으로도 모자라…… 영혼을 상하게 하는 문구까지 있었어.”
“그렇다는 건…….”
“아는 거지. 피니에 로즈우드가 저들을 이용하고 버릴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혼돈을 부활시키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온 사람들이잖아. 핀이 방해한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핀의 기억을 지우는 거지.”
소티스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핀의 기억을 지우려 들다니. 그들이 바라는 세상에 인간 ‘피니에 로즈우드’ 같은 건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들은 그저 혼돈의 운명을 타고난 그릇이 존재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핀이 소티스를 구하기 위해 그들을 이용한다면, 그들은 혼돈의 기억을 없애 꼭두각시로 전락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건 안 돼!”
소티스가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기억이 전부 지워지고 나면, 그건 핀이 아니게 되잖아.”
“그렇지. 그냥 운명에 순응하는 혼돈이 되니…… 베아툼은 물론이고 멘데즈까지 위험해질 거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 가자. 아까 그 사람이 사공이야?”
“응. 이야기하는 걸 들어 보니 이쪽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투가 조금 낯설었어. 하지만 근방에서 배를 제법 몰았다고 하고, 다른 사공들보다 체구가 작아. 배가 작아서 세 사람이 타기에는 좀 빠듯하거든.”
소티스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퀘렐라를 끌어당겼다. 고민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빨리 바다를 타고 국경을 넘어, 핀을 만나 악령술사들의 움직임을 저지해야 했다.
“얼른 가자!”
퀘렐라는 불쑥 뻗어 나와 제 손을 잡은 흰 손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더없이 약한 듯하나 강인한 손이었다.
***
조각배는 금방이라도 파도에 휩쓸려 뒤집힐 것처럼 위태롭게 나아갔다.
담대한 성미의 퀘렐라조차도 불안한 기색으로 뱃머리를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니, 소티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백지장처럼 희게 질린 얼굴에는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시도 때도 없이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구역질을 참는 것만으로도 가진 인내심을 다 끌어 와야 할 판국이었다.
“얼마나 남았나요?”
“거의 다 왔습니다. 30분쯤만 더 가면 되겠네요.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하겠습니다.”
“그렇대. 언니, 조금만 더 견뎌 봐.”
“……우욱.”
멀미가 있는 체질인 줄은 몰랐는데, 유독 속이 메스껍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소티스는 몸을 웅크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꾸 신물이 올라 목이 홧홧하고 입이 썼다. 퀘렐라가 목을 축이겠냐며 물을 주었지만, 가죽 물통 특유의 냄새 때문에 오히려 속이 더 뒤집히기만 할 뿐이었다.
“응. 괜찮아. 아직 참을 수 있어.”
어차피 중간에 쉴 수 있는 곳 같은 건 없었다. 하필이면 유독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거친 날이라고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항로가 험난해 마땅히 배를 댈 곳이 없었다. 게다가 밀출국이었으므로 바다에 오래 떠 있어 봤자 좋을 것도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한 게 낫다. 소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퀘렐라를 위로하고자 웃어 보였지만,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인상을 구기는 것에 더 가까운 표정이 되고 말았다.
퀘렐라가 혀를 차며 그녀의 마른 등을 두드렸다.
“언니는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약하구나…….”
“이것도 많이 건강해진 거라면 안 믿을 거니?”
“당연하지. 이것보다 연약하면 종이라는 거야, 뭐야?”
“아하하.”
두 사람이 소곤거리며 웃자 노를 젓던 사공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게, 귀한 집 아가씨들인 것 같은데 왜 멀쩡한 길을 놔두고 이리로 돌아서 올라간답니까? 이 길은 뒤가 구리거나 수상한 놈들이나 올라타는 길인데.”
퀘렐라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신분을 밝히기가 어려워서요. 하지만 급하게 넘어가야 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목숨까지 걸 정도로 급한 일이랍니까?”
그러자 소티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요한 일이에요.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일이거든요.”
지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결연한 어조였다.
사공이 힐끔, 후드에 가려진 소티스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급한 일이라고 이쪽 길로 향하는 이들이 많더군요.”
“저희 말고 또 최근에 넘어가는 이들이 있었나요?”
“그럼요, 있고말고요. 가장 순수한 신을 모시러 가는 순례자들이 바닷길에 올랐지요.”
순례자. 그 말에 소티스가 움찔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은 악령술사들이 저들의 신분을 속일 때 쓰는 핑계였다. 타인의 사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길 만한 말.
하지만 이 나이 든 남자는 ‘순례자’라는 낱말에 어떤 자부심을 가진 듯했다. 열정으로 들뜬 말투를 듣자면, 그들을 바다 너머로 데려다주는 일에 기쁨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철썩. 거센 파도가 배를 한차례 때렸다. 끝없이 출렁이는 바닷물이 떠밀려 오고, 흘러가고, 다시 떠밀리고 흘러가는 일을 반복했다.
“언니, 조심해. 여기가 도착하기 전에 가장 파도가 거센 길이랬어.”
“……응.”
퀘렐라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는지, 바람부터가 조금 달라졌다. 불길하게 웅웅거리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맴돌자 소티스의 안색이 더 하얗게 질렸다.
후드 안에 숨겨 두었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몇 가닥 새어 나와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그녀는 황망한 손길로 머리를 정리해 다시 밀어 넣었다.
“이곳에서 빠지는 이들은 시체조차 찾지 못해. 바다는 깊고 넓어서, 모든 것을 욕심껏 집어삼키고 무엇도 돌려주지 않거든.”
별안간 사공의 말투가 변했다. 두 사람은 긴장 어린 표정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언니.”
“……뭔가 이상해.”
퀘렐라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동그란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감돌더니, 이내 신중한 눈길이 사공을 훑어내렸다.
누군가를 대할 때 그의 감정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는 것은 퀘렐라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내고 그들이 위협적인지 호의적인지 확인했다.
이 남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다른 이들보다 조금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그의 영혼에는 숨길 수 없는 환희가 가득 차올라 넘실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이 험난한 바다를 뛰어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이 바닷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 더없이 기쁘다고.
다른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배를 타기 직전에는 약간의 긴장이나 초조함이 읽히기도 했다. 얼굴을 거의 다 가린 소티스를 아주 잠깐 의심하기도 하기에 내버려 두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이곳에 오기만을 기다렸지.”
사공은 여전히 기뻐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기대감이 밀물처럼 밀려와 퀘렐라를 불쾌할 정도로 뒤흔들었다.
이걸 기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왜소한 노인의 눈은 위험할 정도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마치 사냥감을 살피듯 두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는 바다를 젓는 대신 무기처럼 그의 양손에 단단히 잡힌 채였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환하고 섬뜩한 웃음이었다.
“나는, 신을 배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그래.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나는 이곳에서 죽어도 좋다.”
“무슨…….”
“너.”
사공이 길쭉한 노를 들어 소티스를 가리켰다.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임을 느낀 소티스가 주저앉은 채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다 불어온 거센 바람에 후드가 뒤로 홱 젖혀졌다. 주홍빛으로 조금씩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로 보랏빛 머리카락이 휙 날렸다.
“그래. 네가 바로 규율이로구나.”
“…….”
“새벽 같은 머리카락에 눈물 같은 눈동자. 그리고 태양 같은 영혼을 가진 여인이라지.”
악령술사들은 핀의 기억을 지우고, 그들의 온전하고 순수한 신으로 만들려 했다. 그 힘으로 온 세상을 망가뜨리고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들에게 소티스는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자, 반드시 대적해야 할 상대였다. 혼돈의 천적인 것으로도 모자라 핀이 은혜를 갚기 위해 악령술사들을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공은 그 자신도 악령술사였으며, 저들을 ‘순례자’라 일컫는 이들을 밀출국시키는 일을 도맡고 있었다. 혼돈의 강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에 그는 한시도 기쁘지 않은 순간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오늘, 규율을 해치울 기회마저 손에 넣은 것이다.
사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새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소티스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퀘렐라의 팔을 쥐었다.
이곳은 바다 위였다. 도망갈 곳이라고는 없는, 비정하리만큼 깊고 차가운 물로 사방이 가득한 바다.
“너희는 오늘, 이곳에서 나와 함께 죽는다.”
사공이 팔을 뻗었다.
풍덩. 노가 바닷속으로 추락했다. 마치 그들의 미래를 미리 보여 주기로 작정한 것처럼, 낡은 나무 막대는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