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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03)화 (104/121)

103화. 마녀의 복수 (3)

‘신입 마법사’는 접경 지역을 하루 정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소문을 주워들었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후드를 내리는 일이 없었고, 스카우터의 뒤편에 서서 타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질문을 몇 개 던지거나 잔심부름을 도와주는 정도만 했다. 자신의 신분은 물론이고 이름마저도 철저히 숨겼다.

“네 말이 맞았어.”

소티스가 퀘렐라와 걸음을 맞추느라 숨을 조금 몰아쉬며 말했다.

“사람들은 이질적인 존재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구나.”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한 나름의 기준을 넘어선, 평범하지 않은 존재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의 나약한 평화를 흙발로 짓밟을까 두려워하던 탓이다.

지금은 그나마 베아툼에 소속된 지역이라서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히면 적당히 대우받을 수 있지만, 멘데즈 쪽으로 넘어가면 이마저도 조심해야 했다.

퀘렐라가 능숙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소티스는 몇 번이나 곤란한 상황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감정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퀘렐라가 그녀에게 호의적인 이들을 찾아 접근해 정보를 얻어 오곤 했다.

“언니가 그나마 대외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지금 사람들은 악령술사들만큼이나 멘데즈의 사람들도 의심하고 거부하는 상태거든.”

멘데즈라는 이름에 소티스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멘데즈의 사람들은 왜? 그, 그래도 큰 다툼 없이 잘 지내던 인접국이었잖아.”

“그랬지. 마법사들에게 썩 좋은 고국은 아니었지만, 이웃 나라로는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어. 안정적이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했으니까.”

“응.”

“피니에 로즈우드가 도망치기 전까지는.”

소티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핀이 도망치고 나서 멘데즈의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다. 안 그래도 터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태기는 했지만, 셰릴과 렉투스가 거기에 기름을 붓고 불씨를 댕긴 셈이었다.

멘데즈 전역은 물론이고 인접국인 베아툼까지 퍼진 소문 탓에 사람들은 이제 에드먼드의 국무 능력은 물론이고 혈통마저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랜 굶주림과 가난에 지친 이들은 더는 잃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다소 과격한 방법마저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메리골드 공작은 적이 많아. 지방 귀족을 여럿 밀어냈으니까. 그들이 모두 병력을 모아 기회를 노리고 있어. 지금 공작은 친황제파 귀족들의 우두머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귀족들이 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황제와 메리골드 공작을 한꺼번에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이는 곧 반역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방 곳곳에서 귀족들의 알력 다툼이 생겨나겠지.

싸움에 휘말려서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다른 나라로 도망치고 싶어 할 것이다.

“핀은 이걸 예상했을까…….”

“반역까지 내다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라 전부가 들썩일 때까지 기다렸을 것 같아.”

“…….”

“그렇게 심란한 표정 지을 것 없어, 언니.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정말로 선황제의 아들이 아니라면 쫓겨나는 게 당연하잖아?”

퀘렐라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한평생 핍박하던 황후를 내쫓고 정부 출신을 들였더니 홀랑 속기나 하고. 나라는 돌보지도 않고, 귀족들이 싸우고 있어도 중재 한번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지. 그뿐인가? 언니가 떠나고 나서는 인접국들과의 교역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

“……알아.”

다만 일련의 분위기가 거북한 것은 사실이었다. 소티스가 고초를 겪고 베아툼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단순히 폭군 아래에서 희생당하기만 했던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삶이 한 갈래의 슬픔 속에만 갇히는 것은 싫었다.

“퀘렐라. 악령술사들이 어디에서 모이는지 알 것 같아?”

“아무래도 이쪽 해안선이 아닌 것 같아. 몰래 국경을 넘은 이들이 있다는 것까지는 들었는데, 분위기만 뒤숭숭할 뿐 큰 소란은 없네.”

현실적으로 모든 악령술사들이 문제없이 국경을 넘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대부분이 나가고 있다는 뜻이지. 들어오는 게 아니라.”

퀘렐라가 한숨을 내쉬며 바다를 눈짓했다.

“밀입국하는 뱃길을 알아. 작은 배 한 척을 사서 빙 돌아가야 하고, 길이 험해서 잔뼈 굵은 뱃사공을 매수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야. 어른 둘에 아이 한 명이 타기에도 좀 아슬아슬한데, 어른 셋은 괜찮을지 모르겠다.”

“바다를 건넌다고? 꼭 그렇게 돌아가야 해?”

“지금 멘데즈에 갔다가 언니 신분을 들키기라도 하면 분명히 피곤해질 거야. 위험하더라도 돌아가는 쪽이 나아.”

소티스는 이 주변을 많이 오간 퀘렐라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의 자신보다는 더 나은 선택을 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출발할 거야.”

“응.”

“여기서 기다려. 먹을 걸 좀 사 올게. 사공도 구해야 하고.”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리 퀘렐라가 실전에 강하고 야무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도움을 받는 동료일 뿐이다. 보호자처럼 기대서는 곤란했다.

이래서는 그저 레먼에게서 떳떳해지기 위해 퀘렐라의 그늘로 숨어드는 꼴이 아닌가. 소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이 부근에 일어난 이상한 일 같은 건 없는지, 우리처럼 멘데즈로 넘어가려는 악령술사들이 있는지 찾아볼게.”

“위험…….”

퀘렐라는 반사적으로 말하려던 것을 꾹 참아 냈다.

위험하겠지. 소티스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다만 안전하게 보호받고자 했다면, 애당초 제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믿어 보자. 퀘렐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저를 믿었듯 이번에는 자신이 그녀를 믿을 차례다. 그녀의 선의에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있으니까.

“좋아. 정체를 들키지 않는 선에서 수소문해 줘. 악령술사들은 대개 개인적으로 움직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동료를 찾았을 가능성도 있어. 그리고 대개 움직임이 커지면, 발자국 또한 깊어지기 마련이거든.”

“응.”

“흔적을 찾을 수도 있을 거야. 정오에 저 나루터에서 만나자.”

“알겠어.”

소티스는 고민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물빛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결의로 반짝이고 있었다.

***

소티스는 악령술사를 찾지 않았다. 세간의 시선을 모르지 않을 그들이 자신을 곧이곧대로 악령술사라 알리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온전한 마법을 해낼 수도 없으니, 어쭙잖게 마법사라고 둘러대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숨어들었을까? 외지인을 곧잘 구분해 내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내걸 만한 핑계가 뭐가 있을까?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뜬 소티스가 향한 곳은 근처의 허름한 술집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아직 본격적인 장사를 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잠에서 막 깬 늙수그레한 남자는 두꺼운 천으로 잔을 벅벅 문질러 닦으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말투를 보니 멘데즈 사람이로군. 이런 곳에 적당히 뿌리 내리기에는 있는 사람들도 먹고살 게 없는 판국이니, 다른 곳이나 알아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이 근방을 지나간 순례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퀘렐라가 그랬다. 그들은 베아툼의 마법지상주의를 부수기 위해 모이고 있다고. 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혼돈을 숭배하며, 그들의 신념과 기대는 광적일 정도로 부풀어 있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법사도, 악령술사도 아니라 종교인으로 자신을 포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맞아요. 저는 멘데즈 사람인데…… 몸이 약해서 며칠 고생하던 사이 일행을 놓쳤지 뭐예요.”

“순례자?”

술집 주인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소티스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낡은 옷을 걸치고 있어도 행색이 반반한 데다가, 언뜻 보이는 목걸이가 무척 값져 보여서 썩 믿지 않는 듯했다.

소티스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며 덧붙였다.

“저는 부유한 상인 집안의 딸이었지만…… 죄를 지어 쫓겨났고, 신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전 대륙을 돌아다니고 있답니다. 비록 제 이름을 밝히고 예를 다할 수는 없지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은인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하고 신께 당신의 행복을 간청드리겠습니다.”

황후로 지냈을 때 순례자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 주느라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그때 들었던 말을 기억해 내 적당히 꾸며 말하자 그럴듯한 핑계가 완성되었다.

“하긴, 순례자들이 이따금 지나다니곤 하지. 가진 돈이 영 많지 않아 싸구려 맥주나 좀 마시고 가는 정도라 돈은 안 되지만. 아, 그런데 어쩐지 행색이…….”

후드 아래에 숨겨 두었던 소티스의 눈이 빛났다.

멘데즈는 유일신을 믿는 국교가 있다. 순례와 봉사를 미덕으로 삼는 종교였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른 인상의 이들이 저들을 순례자라 소개했다면, 높은 확률로 사교도이거나 악령술사일 것이다.

물론 평민들은 정교도와 사교도를 구분하지 않았다. 포악한 짓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굳이 따져 묻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체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런 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자연히 어물거리는 모습이 되었는데, 오히려 더 그럴싸하게 보였다.

“교, 교리상의 이유로 전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희 작은 신께서는 용서를 구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 하셨어요. 그래야만 신을 배알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할 수 있다 하여…….”

“거, 참. 신실하시기도 하군. 됐네, 됐어. 나는 태생부터가 신을 믿지 않는 유물론자라, 신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딱 잠이 쏟아진단 말이지. 며칠 전에 이 근방을 지나간 순례자들은 있었소. 뭐라더라, 신의 부활을 위해 준비하네 마네 하던데…….”

신의 부활. 혼돈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소티스가 탁자를 짚고 바짝 다가가며 외쳤다.

“맞아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어제 떠났지. 남은 주머니를 다 뒤져서 돈을 겨우겨우 내고 가더이다. 에휴.”

“뭐, 나, 남긴 거라도 없었나요? 두고 간 물건이나, 혹시 무슨 소식 한 자락이라도?”

“아까 내 말은 어디로 들은 거요? 난 종교인들만 보면 잠이 온다니까! 어차피 목이나 좀 축이고 금세 떠난 패거리라 들을 것도 없었겠지만…… 아. 종이!”

“종이?”

소티스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종이? 대체 무슨 종이지?

“알아볼 수 없는 말이 쓰인 양피지 쪽지를 하나 남기고 갔지. 뭐 아가씨는 같은 종교니 알 수도 있겠군. 조카 놈이 그걸 접어서 던지고 노는 걸 봤소. 잘못하다가는 손님들한테 맞겠다 싶어 뺏었는데…….”

찬장을 뒤적거리던 남자가 그녀에게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자, 가지시오. 어차피 쓸모도 없는 물건.”

소티스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곳에 적힌 건, 베아툼의 고대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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