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02)화 (103/121)

102화. 마녀의 복수 (2)

“폐하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 저를 마녀라고 부르셔도 상관없고, 불에 태워 죽이셔도 상관없어요. 그런다고 한들 절대로 혼자 죽지 않을 거예요. 폐하를, 그리고 제 아버지를 산산조각 내기 전에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에요.”

술잔을 앞에 둔 셰릴이 서늘하게 웃었다. 무시무시한 내용을 말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녀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건 폐하의 잘못도 있어요.”

에드먼드가 곰곰이 생각하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내 잘못이 있다.”

“네. 평소 폐하께서 현명하셨다면 사람들이 무어라 했겠어요? ‘그럴 리 없어.’ 분명히 그랬겠지요.”

셰릴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

“‘그럴 줄 알았다.’”

에드먼드는 그 말에 화내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겠다는데도 그의 얼굴에 노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결과를 당연하게 수용하려는 듯한 태도에 가까웠다.

“황제의 재목은 아니었지. 제 열등감조차 억누르지 못하는 이가 황국을 어떻게 다스리겠나.”

“…….”

“협상과 양보, 거래를 통해서만 이루어 낸 자리라는 게 비참했을 뿐이다.”

아마 은연중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후가 그를 아끼지 않았더라면, 적자인 아벨이 황위에 관심을 두었더라면, 소티스가 그를 곁에서 돕지 않았더라면 몇 번이고 물러날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그건 에드먼드의 힘으로 이루어 낸 업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해 보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맞아요. 폐하께는 과한 자리예요.”

“그래.”

“소티스 언니도 폐하께 아깝고요.”

“그랬지.”

“저를 죽이신다면, 귀신이 되어서도 복수할 거예요.”

“그래 보이는군.”

“그러니까 이쯤 하고 져 주세요.”

“그럴까.”

에드먼드가 쓰게 웃었다.

“그럼 어떻게 될까.”

“제가 어떻게 알아요?”

셰릴이 손을 뻗어 술병을 쥐었다. 그녀는 넘치도록 따른 술잔을 다시 호쾌하게 비웠다.

“저도 몰라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냥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에 세상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뿐이에요.”

“…….”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따지고 보면 더 나은 선택지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그리 똑똑하지 않으니, 언제나 최고의 선택만을 할 순 없어요. 그리고, 설령 이게 최악의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복수하지 않을 수도 없었고요.”

“그래.”

“그래도 살게 돼요.”

그녀가 술병에 남아 찰랑거리는 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깊은 절망을 보고 온 물빛 눈동자에 호박색 빛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가 멀어졌다.

“이제 더는 메리골드 공녀로 살 수 없을 거예요. 제 아버지가 저지른 더러운 짓도 상단 사람들을 써서 전부 세상에 풀어내 버렸거든요. 사람들은 저를 악마의 딸이라고 손가락질하겠죠. 혹은 아비의 등에 칼을 박은 마녀라고 할 거고요. 그래도 살아갈 거예요. 어떻게든 살아가겠죠. 제가 저지른 일의 대가로부터 도망치지 않고요.”

“그러니 나 또한 그렇게 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간 누리던 것은 내려놓으셔야죠. 값을 치르려면.”

“나 때문에 그대의 인생이 망가졌으니까?”

“그것도 맞고요.”

셰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우리 둘 중 더 나았던, 더 훌륭했던, 더 다정했던 소티스 메리골드마저도 불행하게 했으니까.”

“…….”

“아무리 미워해도 우리 언니거든요.”

그녀가 술병을 기울여 에드먼드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속삭였다.

“평생 내 팔로 먼저 끌어안아 본 혈육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내 언니를 불행하게 만들었으면 당신도 행복하면 안 되지.”

저 대신 발탁되어 거머쥔 자리였다면 행복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더 훌륭하지 못해서, 대단하지 못해서 불행해진 거라고 이해하는 시늉이라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어떤 길을 택해도 불행하기만 했을 뿐이라면? 아무리 피나게 노력해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비참하고 구차한 삶을 살았어야 했다면?

셰릴은 자신의 마지막 희망과 동경마저 짓밟았던 에드먼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행복해질 자격이 없어.”

셰릴이 악의에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평생 언니에게 지독한 열등감이나 가졌던 당신도, 내 행복을 뺏긴 것처럼 굴었던 나도, 은혜를 원수로 갚은 그 빨간 머리 여자도. 전부 다 불행해져야 공평하지. 안 그래? 소티스 메리골드의 눈에서 눈물을 그렇게 뽑아 놓고, 우리만 행복하게 웃으면 불공평하잖아.”

“…….”

“설령 언젠가 행복해질 수 있더라도 아직은 아니에요. 저 진창에서 다 같이 뒹굴면서 기다리자고요.”

물빛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을 담은 눈물이 넘실거렸다.

“혹시 알아요? 마음 착한 언니가 본인의 행복을 찾은 뒤 나눠 주러 오실지도. 아니,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또 꾸역꾸역 와서 제 몫의 볕을 나눠 줄 테죠.”

그 말이 꼭 우는 것처럼, 후회하는 것처럼, 고해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에드먼드는 생각했다.

지나친 학대와 불행, 기대와 실망 속에서 지쳐 버린 영혼이 속삭이고 있었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자비로운 여자니까.”

“…….”

셰릴 메리골드가 흐느끼고 있었다.

그건 겹겹이 싸여 있던 원망과 질투, 열등감과 분노 밑에 숨어 있었던 미안함이었다.

태양은 그늘을 만들지만, 결국 그 태양은 제 일생을 바쳐 자신이 굽어보는 모든 세계를 밝게 비춘다. 그래서 태양을 한평생 원망하면서도, 그 온기를 기억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에드먼드가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치는 술잔을 들어 올려, 그 내용물을 비운 뒤 말했다.

“값을 치르마.”

태양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빛의 술이 줄어 가는 밤이었다.

***

취기가 오른 에드먼드는 책상 앞에 앉았다. 말끔하게 비워진 책상 위에는 종이 몇 장과 깃펜, 그리고 작은 잉크병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파르스름하게 벼린 새벽빛을 받으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해야 했으나 하지 않았던, 때를 놓쳐 궁색해진 말을 적어 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에드먼드는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하나 집어 들었다.

「핀이 떠났다. 내 아이를 가진 것도, 나를 사랑한 것도 모두 거짓이었다고 폭로하고서. 사랑에 눈이 멀어 그대를 홀대했던 나는 사랑 때문에 얼간이가 되고 말았지.」

「누군가 내게 그랬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법이라고. 그러니 핀은 언제든 떠났을 것이라며.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꺼낸 말인지, 아니면 내 어리석음을 비웃기 위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소티스. 그대는 현명하니까…… 언제든 핀이 떠날 것 또한 알았을까?」

알았더라도 잡지 않았겠지. 소티스를 서글프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는 핀 또한 외롭게 했으니까. 핀의 삶에 자신이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면, 소티스는 핀을 도우면 도왔지 막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티스, 나는 여전히 그대를 생각해.」

잘못된 욕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 처음 자신을 보았을 때 반짝이던 물빛 눈동자,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서 치열하게 노력하는 모습. 이따금 제게 건네던 작은 꽃다발까지.

소티스는 언제나 자신을 사랑했고,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사랑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을 때조차도 여전히 인내하듯 사랑했다.

그런 그녀가 사라지고 싶어 했을 때, 잠든 듯 눈을 감고 다시 일어나지 않을 때의 자신은 어땠던가. 에드먼드는 이상하게도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그때의 자신은 핀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충동인지, 도피인지, 단순한 욕망인지는 몰랐으나 어쨌든 그랬다. 그녀를 사랑함으로써 소티스를 밀어내도 좋을 이유를 하나쯤 더 만들고 싶어 했던 것도 같았다. 그래서, 소티스의 부재로 인해 자연히 헤어질 수만 있다면 오히려 다행이라고까지 여겼다.

「그대의 슬픔을 생각해.」

에드먼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어 적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핀을 사랑했을까?

핀이 그렇게 떠나고 난 뒤 에드먼드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이란 뭘까. 그건 사랑이었을까. 오갈 곳 없는, 가엾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그럴싸한 자리를 내어 주며 품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랑일까?

그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신기하게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곁에서 피니에 로즈우드가 시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얄팍한 ‘사랑’은 소티스 메리골드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랑이 없어 말라 가던 그녀에게, 사랑이 있어도 딱히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현실을 보여 준 셈이었다. 그는 셰릴의 희망을 짓밟듯, 소티스의 희망 역시 짓밟았다.

“그래. 사랑은…….”

에드먼드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대가 내게 주었던 게 사랑이지.”

시들게 하는 게 아니라 피워 내는 힘. 돌아보는 게 아니라 나아가게 하는 힘.

“그리고 그대가 그 사람에게 주는 게 사랑이겠구나.”

떠나가기 하루 전 레먼과 소티스를 본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친밀하게 속삭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각자의 긴 머리가 바람을 타고 흐르듯이 나부꼈고, 레먼이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어 한 바퀴 빙글 돌기도 했다. 소티스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행복해 보였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소티스는 싱그럽고 예뻤다. 이제야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한 송이의 히아신스처럼, 지저귀는 법을 배운 한 마리의 카나리아처럼.

「소티스.」

글자를 가지런히 적어 내리던 에드먼드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이 편지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탓이었다.

「소티스.」

에드먼드의 글자가 조금 기울었다. 취기가 올라, 후회로 젖어 스러져 가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소티스, 미안해.」

「미안해.」

「우리는 다시 함께할 수 없겠지만, 나는 지키지 못했던 ‘부부의 서약’을 지키려 한다.」

멘데즈의 혼인 서약서에는 그런 말이 있었다. ‘부부는 한마음 한뜻으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에드먼드는 언제나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움직였다. 그간의 여정에 소티스의 행복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까.

「소티스, 그대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대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내가 속죄하는 것? 사는 내내 처절하게 후회하며 용서를 구걸하는 것? 불행하게 살며 내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 주는 것?

아니, 그렇지 않다. 그 무엇도 소티스의 행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는 누군가의 불행 속에서 안도와 후련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대의 행복을 위해…….」

에드먼드가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렸다.

“내가 사라져야겠구나.”

내가 사라져야, 그대의 행복이 온전해지겠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