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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01)화 (102/121)

101화. 마녀의 복수 (1)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완벽한 황제여야 했다.

소티스와 결혼하게 되면서 느꼈던 선택권에 대한 박탈감, 열등감, 혈통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것이 뭉쳐 그의 집착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감정이 병들며 그를 그 꿈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대가 없어도 완벽한 황제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감히 황제보다도 더욱 현명한 여인이 곁에 있어서, 그래서 자신에게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제게 옳은 길을 알려 주는, 세상에서 더없이 귀한 이정표인 줄도 모르고.

“차라리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괴롭지나 않았을지도 모르지.”

에드먼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부렸던 고집이 멍청하고 하찮은 종류의 것이었으며, 소티스를 선택하지 않은 게 얼마나 한심한 선택이었는지 이제는 알고 있다. 여태 몰랐다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였다.

소티스가 제 곁을 떠난 이후로 서서히 깨닫게 된 그 현실은, 이따금 차라리 몰랐으면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혹했다.

왜 그랬을까.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타인을 부정해야만 얻어 낼 수 있는 자긍심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소티스.”

왜 사람은 빈자리 앞에서 지나간 것의 위대함을 알고, 허전함을 깨닫고,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일까.

왜, 사람은 끝까지 어리석지 못하고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정신을 차려 자신의 허물을 보고 마는 것일까.

왜.

“대답해 줘.”

에드먼드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대는 자비롭고, 현명하잖아.”

네 사랑이 얼마나 컸고, 얼마나 따뜻했고, 그게 얼마나 손에 쥐기 어려운 기적인지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알고 있다. 무용한 후회였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소티스 메리골드를 생각했다.

끝없이, 그리고 사무치게.

“폐하.”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하루가 일 년 같았고, 한 달이 한 시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제 생각 속에 갇혀 있던 그가 눈을 떴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왔다. 시종장이었다.

“저…… 늦은 시간에 죄송하오나, 메리골드 공녀께서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뭐라고?”

에드먼드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어울리지도 않게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까지 오도록 어찌 연락도 없었지?”

아무리 인접국이라 하더라도 베아툼과 멘데즈의 거리는 멀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소티스가 움직였다면, 이미 접경 지역에 다다랐을 때부터 보고가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별도 없이, 땅거미가 진 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 갑자기…….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에드먼드는 벼락처럼 찾아온 현실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소티스가 아닐지도 몰랐다.

메리골드 공녀는 소티스에게만 부여된 호칭이 아니었으니. 그저 소티스를 생각하느라 그 이름에 반응했을 뿐이다.

“……그래.”

잠시나마 차올랐던 환희에 가까운 당혹감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에드먼드는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자로 잰 듯 반듯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여인은 셰릴 메리골드였다. 어깨 근처에서 잘린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흔들릴 때마다, 에드먼드의 시선은 그 언저리를 정처 없이 헤매며 자신이 그리워하는 여인을 찾았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알아챈 듯, 셰릴이 삐딱하게 웃었다.

“누굴 기다리시기라도 했나 봅니다, 폐하.”

“…….”

“혹시 제 언니를 생각하셨나요?”

명백한 힐난이 담긴 어조였다. 이어진 침묵 속에서 셰릴이 차갑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아, 에드먼드는 작게 탄식하며 셰릴을 바라보았다.

닮은 곳을 찾았다.

그 물빛 눈동자는 꼭 세상의 가장 오래된 슬픔만을 빚어 만든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더라도, 폐하께서는 그러면 안 되시지요.”

“…….”

“무슨 자격으로요.”

“……그래, 그렇군.”

에드먼드는 자신의 현실을 자각했다.

현재 멘데즈 황국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황비였던 피니에 로즈우드가 아기를 가진 게 거짓임을 밝히고 도망친 이후로, 멘데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문제가 터져 나왔다. 각 지역 곳곳에서 흉년과 기근, 귀족들의 행패가 모두 황실의 책임이라고 울부짖기 시작했으며 몇몇 지방 귀족들은 아예 세납을 거부하고 국무를 제대로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퍼진 소문은 그 모든 상황에 노골적으로 불을 지피고 있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현 황제의 소생이 아니라는 것. 황후가 바깥에서 낳은 아이로, 에드먼드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결혼에 승낙했다는 소문이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공작뿐이라고 생각했다.”

소티스는 소문이 퍼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애당초 그것을 비밀에 부쳐 주는 조건으로 황후가 된 사람이지 않은가. 이제 와 해묵은 복수를 하고 싶은 거였다면, 베아툼으로 떠날 게 아니라 이곳에 남아서 에드먼드를 끈질기게 괴롭혀도 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소티스를 황후로도, 하다못해 황비로도 만들지 못한 공작의 짓일 것이다. 접경 지역에서 소티스를 빼돌리지 못한 공작이 더는 에드먼드를 황제로 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일 터.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소문은 일축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악의적인 이야기일 뿐이니까. 하지만 상황이 나빴던 데다 너무 빠르게 퍼졌다.

마치 누군가가 이 순간만을 기다려 움직인 것처럼.

“적이 제 아버지뿐일 거라고 생각하셨다고요?”

셰릴이 물었다.

“저는 아버지와 달라요. 제 남편과도 다르죠. 두 사람은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소문을 퍼뜨린 것은 셰릴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렉투스 상단을 움직여 조직적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이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실패할 경우 자신의 안위도 위협받을 수 있을 정도로 큰일이었다. 그런데 이득을 바라고 움직인 게 아니라고?

“제가 바라는 건 오직 복수거든요.”

물빛 눈동자는 적대감으로 가득했다. 에드먼드는 그 사실이 낯설게만 느껴져 물끄러미 셰릴을 응시했다. 언제나 그것과 꼭 같은 색의 눈동자가 슬프게, 체념한 듯, 우울하게 저를 바라보았던 것만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술이라도 한잔 드시고 싶다는 표정이네요.”

에드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제가 어렸을 때 지겹도록 한 게 남의 눈치 보기라서요, 이제 표정만 봐도 그 사람이 무슨 마음인지 다 알 것 같아요. 보아하니 제 생각보다는 저를 그리 괘씸하게 여기시지는 않는 것 같은데…….”

셰릴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술 상대 해 드릴까요?”

“그대와 친해질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셰릴.”

“친해질 리 없죠. 폐하와 친해졌다가 펄펄 뛸 여자가 셋이나 있어서.”

그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내 투명한 찬장의 가장 안쪽, 그가 아끼는 술이 나왔다.

시종장을 다시 불러 유리잔과 얼음을 가져오게 하는 사이 셰릴은 먼저 소파에 몸을 내렸다. 정말로 그를 황제가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귀족 자제들을 대하는 것에 가까운 태도였지만, 에드먼드는 딱히 흠잡지 않았다.

호박색 액체가 유리잔에 차오르자, 그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호박색 눈…….”

이질적인 눈을 가진 남자, 레먼 페리윙클. 셰릴은 마법사를 잠시 떠올리다가 덧붙였다.

“저는 그 남자를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언니에게는 잘해 줄 것 같더라고요.”

명백히 에드먼드와 레먼을 비교하는 말투였다. 에드먼드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가장 처참한 건, 그에 반박할 말이 없는 자신이었다. 그는 술을 단숨에 마셔 버린 뒤 물었다.

“그 선택은 타당하게 느껴지던가?”

“당연하죠.”

“…….”

“그래도 황후 정도의 지위라도 따라왔으니 내버려 두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잖아요. 미련해 빠진 저희 언니도 드디어 본인의 행복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던 에드먼드가 물었다.

“비밀을 언제부터 알았지?”

“꽤 됐어요. 언니보다 먼저였죠.”

셰릴이 술잔을 절반쯤 비운 뒤 입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어렸을 때였어요.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피를 무서워하던 저는, 늦은 밤까지 공부하던 언니가 코피를 쏟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어요. 언니는 공부하던 것도 놓고 저를 찾아다녔지만…… 저는 응접실의 서랍장 뒤에 숨어 언니를 피했어요. 또 걱정 어린 표정으로 저를 보는 게 싫었거든요. 그리고 거기서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처음으로 언니가 불쌍해 보였어요. 가짜 황제와 결혼하기 위해 저렇게 사력을 다하는 언니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언니는 폐하께서 황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사랑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말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갈 길이라면, 비참하지나 말라고.”

“소티스를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네, 맞아요. 어쨌든 쓸모없는 자식 취급당하는 것보다는 황후 폐하 소리 들으며 사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언니가 미웠어요. 언니가 있어서 제가 더 쓸모없어진 것 같아서.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거죠.”

셰릴이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말했다.

“쓸모가 있는 사람도 외롭더라고요.”

“…….”

“아니, 쓸모가 있어야만 하니까 더 외로워야겠더라고요. 저는 얻어맞아 아픈 등을 부여잡고 잠든 날에도, 언니의 방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어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아무리 피곤해도…….”

“…….”

“우리 두 사람의 삶을 그렇게 양극의 지옥으로 처넣은 사람은 분명 아버지였어요. 그리고 그 중간에는 폐하도 계셨고요.”

그녀가 낮게 읊조렸다.

“언니와 제 인생을 바쳐서 원하는 걸 손에 넣었으니, 이제 내려오실 때가 됐잖아요?”

그 말에 에드먼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녀가 복수하러 올 것이다.」

아, 그렇구나.

에드먼드는 작게 탄식하고 말았다.

이건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존재로 인해 삶을 빼앗겼던 이들이 건네는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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