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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00)화 (101/121)

99화. 불온한 바람 (3)

“저는 멘데즈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소티스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상한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세상이 흔들리고 자신의 지위가 위태롭지 않았다면, 에드먼드는 저를 찾았을까요?”

레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티스가 제 몫으로 마련된 정당한 분노를 쏟아 내도록, 잠잠히 기다릴 뿐이었다.

“제가 폐하를 아직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무례한 부탁이에요. 하물며 그 마음을 거둔 지금, 터무니없죠. 저는, 더 이상 약하지 않아요. 그런 걸 모른 척 속아 줄 만큼 우유부단하게 사는 건 질렸어요.”

호의도 건넸을 때 어느 정도 의미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여태껏 최선을 다할 때마다 그녀의 성의를, 진심을, 그리고 노력을 흙발로 짓밟기만 했던 게 바로 에드먼드였다.

“퀘렐라와 이야기하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소티스 님.”

“제가 저 자신을 하잘것없게 취급하면, 그게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이자 결례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이해했어요.”

레먼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역시 소티스가 스스로를 아끼길 바랐다. 누구에게나 다정한 그녀를 사랑했고, 그런 그녀였기에 지난날 제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눈부신 호의가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건 싫었다. 잘해 주었던 일을 후회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슬펐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다만 그 이야기를 소티스에게 직접 하지 않은 이유는, 진심으로 깨달은 후 자신의 의지만으로 결정하길 바라서였다.

“에드먼드 폐하께서 그 자리에서 쫓겨난 건 본인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입니다. 설령 제가 돕는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그 사람은 누가 책임져 줘야 할 아이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렇겠지요.”

“나라는커녕 곁에 있는 여인 하나 돌보지 않았어요. 핀이 아무리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걸 열 달이 되도록 몰랐단 말이에요?”

“정말로 배가 부르기는 했었던 모양입니다. 악령술사가 상상 임신 증상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반쪽짜리 마력이니, 진짜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겠지요. 그 대가로 의사도 죽었고요.”

“하지만 태동은 없었을 거잖아요. 마법이 아니라 악령술이었다면 더욱 그래요. 제가 지어 준 약을 먹고 유산이 아니라 월경을 한 거였다면, 다른 의사를 통해서도 진찰했어야지요. 장차 황위를 이을 아기였는데 어떻게 외부에서 온 의사만 믿고 맡긴단 말이에요?”

그건 무관심이다. 소티스는 에드먼드를 잘 알았다. 결과만 만족스럽게 나와 준다면 과정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그 차가운 무관심. 한철 변덕에 눈이 멀어 잠시 품었다가도, 이내 배가 불러 잘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하니 흥미가 뚝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게 가짜 아기가 아니라 진짜 아기였다고 해도, 에드먼드는 핀을 책임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움직였으니까.

한 꺼풀 덮어 두었던 맹목적인 사랑을 거두고 나니, 그제야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의 무정함이 오롯이 보였다.

소티스는 화가 났다.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감정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게 얼마나 지독한 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사랑이 식어 욕망만이 남은 관계라고 해도, 책임은 졌어야지. 핀이 제 인생을 통째로 도구로 삼을 때까지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 에드먼드가 미웠다.

이번에도 그는 나쁜 남편이었다. 제게 그랬듯. 저를 버려 가면서까지 선택한, 제가 구한 여인에게조차도.

“그가 미워요.”

소티스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저한테는 있잖아요, 그 사람을 미워할 자격.”

“물론입니다.”

“절대로 가지 않을 겁니다. 재차 제 의사를 물어보거든, 다시는 그런 제안을 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이 일이 끝나면 저는 베아툼으로 망명할 거예요. 특별한 일이 없거든 그쪽 땅을 밟을 일조차도 없겠죠.”

“이미 그렇게 희망하실 거라 전해 두었습니다.”

레먼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조심스레 쓸었다. 엄지로 구겨진 미간을 꾹 눌러 주자 소티스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화내서 죄송해요.”

“아뇨, 화를 내셔서 보기 좋았어요. 소원을 이룬 기분입니다.”

“…….”

“부당하고 억울한 일에 체념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화를 내고 언성을 높였으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했어요. 소티스 님께서는 너무 오래도록 참기만 하셨으니까요.”

“……레먼.”

그의 손이 천천히 거두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피부에 온기가 남은 것 같아서, 소티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저는 당신의 뜻에 따를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

그녀는 입을 벙긋거렸다가, 꾹 다물었다가,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일단 식사를 해야겠어요. 거기 놓인 음식 좀 주실래요?”

“식었는데요, 조금.”

“상관없어요. 뭐든 먹어야 기운을 내죠.”

소티스는 트레이를 끌어다 무릎 위에 놓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입 안이 깔깔한지 이따금 씹다가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억지로라도 손을 움직이며 그릇을 비워 나갔다.

그녀는 강해졌다. 지금도 강해지는 중이다. 앞으로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자신의 부당한 상황에 화를 내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그리고 기어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향해 나아가겠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떳떳해지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제 두 다리로 멋지게 선 여인이 제게 사랑한다며 손을 내민다면, 그 순간은 얼마나 행복할까.

“저…….”

소티스가 물빛 눈동자를 치켜뜨며 조용히 물었다.

“레먼, 이마에 손이…….”

“아.”

미간을 찌푸리지 않고 있는데도 여전히 레먼의 손은 소티스의 이마에 닿아 있었다. 정확히는 동그랗게 굽어진 이마 전체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손끝에서 가볍게 새어 나온 빛은 소티스의 이마를 타고 천천히 스며들었다.

“이것만 하게 해 주세요. 마력이 너무 불안정해요. 이럴 것 같아서 스승님께 잔소리까지 들어 가며 배웠는걸요.”

실제로 레먼의 손길은 도움이 되었다. 엉망으로 날뛰던 마력이 조금씩 진정되었으니.

어떻게 미치지 않고 버텼나 싶을 정도로 위협적인 마력이었다. 아무리 각성을 통해 단시간에 마법사로 거듭난다지만, 사람의 그릇이 늘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부서지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레먼의 손길에 소티스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다가, 눈썹을 모으면서 천천히 떴다.

“레먼.”

그가 한숨을 쉬듯이 대답했다.

“네, 알아요.”

핑계였다. 마력을 안정시켜 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그렇게까지 다정스레 붙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짓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이러면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없잖아요.”

소티스가 작게 불평했다.

“레먼, 이렇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따로 움직인 거예요. 떳떳해지고 싶다고요.”

“압니다. 제게서 독립하고 싶으신 거죠.”

레먼의 얼굴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오늘만요.”

“…….”

“오늘만, 정말로 오늘만 소티스 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아침이 되면 더 이상 붙잡지 않을게요. 이렇게 요행을 바라며 기다리는 일도 없을 거예요. 아니, 그럴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럴 수도 없다니요?”

손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소티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레먼이 그녀와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저는 오늘이 지나면, 절대로 먼저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레먼?”

“하지만, 소티스 님. 이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저는 당신이 부른다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올 거예요. 당신과 함께하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행복이라는 사실만은 알아주시겠어요?”

“…….”

“압니다. 사랑은 위대하고, 사람을 가장 강하게 하지요.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걸어 나가고 싶은 걸 테죠. 사랑은 분명히 대단하지만, 그 힘으로만 나아가고 싶은 건 아니니까.”

“네.”

레먼이 소티스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구한, 당신의 사람인데. 소티스 님만이 누릴 수 있는 제 도움 또한 당신의 힘이 아닐까요?”

“…….”

“거창하게 말했지만, 실은 그저 저를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는 거예요. 우리는 내일이 되면 다시 헤어질 거고, 저는 다가가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소티스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찾아올 수 있어요?”

“그럼요.”

“작게 불러도요?”

“당연하죠.”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면…… 그래도 약하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레먼의 웃음소리가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소티스 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저는 언제나 곁에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네요?”

그 말은 여전히 깊이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다. 당신만큼 사랑할 여인은 없다고, 그러니 나를 사랑해 달라고, 나는 여기에 있다고.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할 거라고.

수도 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당신을 부를게요.”

소티스가 말했다.

“제가 조금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는데도 여전히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도움닫기를 통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는 꼭 이름을 부를게요.”

레먼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주 예전에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저는, 당신의 페리윙클이에요.”

페리윙클. 봄이 오면 베아툼 왕국에서 피는 새벽 같은 작은 꽃.

꽃말은, 행복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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