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99)화 (100/121)

98화. 불온한 바람 (2)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파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수평선이 소티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태어나 처음 보는 바다는 압도적일 만큼 눈부시고 푸르렀다.

두 사람은 역사서에 적혀 있던 절벽과 그 사이에 숨은 작은 동굴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 다만, 거친 해안선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절벽 사이에서 원하는 것을 정확히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 해가 질 시간이니까…… 일단 숙소를 알아보자. 저쪽으로 가면 내가 예전에 묵었던 여관이 나올 거야.”

소티스는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식은땀 때문에 축축해진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불쾌했다.

지친 말들을 데리고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나아갈 수 없어, 두 사람은 내려서 마을까지 걷기로 했다. 소티스가 고삐를 쥔 손을 조금 느슨히 하는 순간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언니!”

퀘렐라가 한달음에 달려와 소티스의 어깨를 받쳐 안았다. 온몸이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뜨거웠다.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 마력과 지식 때문에 여전히 몸이 견디지 못하고 고통과 탈력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용할 정도였다.

“역시 하루 더 쉬고 움직여도…….”

“그러면 늦어.”

소티스는 얕은 숨을 힘겹게 이어 가며 웃었다.

“난 후회하기 싫어, 퀘렐라. 아직 움직일 수 있어.”

퀘렐라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게 화를 참을 때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챈 소티스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대신 내일 해가 뜰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쉴게. 응?”

“…….”

“퀘렐라, 화났어?”

“화났지, 그럼!”

결국 그녀가 노기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러다가 나중에 레먼을 만나면 뭐라고 하냔 말이야! 내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쩔쩔매는 꼴이 보고 싶어?”

“그건…….”

소티스가 변명하듯이 대답했다.

“그래도 여관에서 당장 레먼을 만나지는 않을 거잖아?”

퀘렐라는 소티스가 조금쯤 위기감을 가지는 게 좋다고 판단했는지, 팔짱을 낀 채 깐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야, 소티스 언니. 혹시 모르지. 갔는데 레먼 페리윙클이 정말 있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래?”

“에이, 설마 그러려고?”

***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구나.

문가에 어정쩡하게 선 소티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저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이별답지 않은 이별 후 나섰던 길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내내 그가 그리웠다. 마음 같아서는 제 바보 같은 부탁은 아무래도 좋으니, 잡아 달라 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보고 싶었다. 눈앞의 이가 헛것인가, 잠시 눈을 의심했을 만큼.

“소티스 님.”

소티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반사적으로 그에게 달려가려던 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레먼과 알베스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마법사들은 소티스 일행보다 먼저 도착한 듯, 짐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앉아 통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 놀란 기색은 아니었는데, 아마도 이곳에 머무르다 보면 언젠가 두 여인을 마주칠 것을 알았던 모양이었다.

혹은, 기다렸거나.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요.”

레먼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그는 굉장히 기뻐 보였다. 다만 이걸 내색하는 것조차 소티스에게 폐가 될까 염려했는지, 어물거리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알베스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소티스를 살폈다.

“……두 번째 각성이 있었다고 들었다. 괜찮으냐?”

“네, 지금은 한결 나아졌어요. 괜찮아요.”

그 말에 얌전히 서 있던 퀘렐라가 팔짱을 끼며 깐깐하게 말했다.

“괜찮다고?”

“…….”

“언니, 들어가면 어떻게 하기로 했지?”

“퀘렐라…….”

소티스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시선을 보냈으나, 퀘렐라는 매정할 정도로 넘겨 버리며 대답했다.

“음식은 주문해서 방으로 올려보낼게. 들어가서 쉬어.”

싫다고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열 때문에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발이 질질 끌렸다. 끈질기게 견뎌서 무사히 도착했을 뿐 괜찮은 게 아니었다.

소티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담아 불쌍하게 보였으나, 퀘렐라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어떤 말과 행동에도 약해지지 않기로 단단히 다짐한 듯했다.

그러나 소티스는 방으로 바로 올라가지 못했다. 계단을 하나쯤 밟았을 때,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숨어든 대화를 무심코 들어 버린 까닭이었다.

“당분간은 이 마을을 떠나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

“그러게……. 귀족들만 들고일어나는 게 아니라, 평민들도 기회만 보고 있다면서?”

“원래 배곯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법이거든. 멘데즈는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그러니까. 이러다 정말 대규모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멈칫, 난간을 쥔 소티스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반란? 반란은 무슨! 따지고 보면 애당초 황가의 핏줄도 아닌 자가 황제가 되겠답시고 들어앉은 건데. 그걸 어찌 반란이라 부르냐는 말이야! 본래대로 돌리는 거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멘데즈에 반란이라고. 결국 그렇게 손쓸 수 없는 곳까지 치닫게 되는 걸까.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함께 올려 달라고 했습니다.”

등 뒤에서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이어, 난간을 꽉 쥔 채 차갑게 식은 소티스의 손등 위로 큼직한 손이 포개듯이 겹쳐 왔다.

“같이 올라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소티스의 메마른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가 하게 해 주세요.”

“…….”

“제가 직접 설명하는 게 낫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요.”

소티스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자, 레먼이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대로 낡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와 미리 값을 치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얼굴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다면, 헤어지자고 말한 일을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깨에 팔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빈방이 거의 남지 않아 억지로 내어 준 방은 비좁고 낡아 있었다. 물론, 빈민가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던 소티스는 그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 벽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마룻바닥도 곰팡이가 좀 슬기만 했을 뿐 쥐나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팍팍하고 힘들었던 경험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는 날도 있다. 소티스는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레먼이 우유 잔을 받아 와 제게 내미는 것을 바라보았다.

“좀 드세요. 바로 음식을 드시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빵이나 스튜 같은 것을 씹어 삼킬 자신이 없었는데, 따뜻한 우유를 마시니 내내 울렁거렸던 속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소티스가 제 앞에 앉은 레먼에게 물었다.

“베아툼의 원로회를 소집했던 ‘국제 안건’이라는 게, 멘데즈의 반란이었군요.”

“그렇습니다.”

레먼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소티스야말로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이라고 생각했다. 멘데즈를 위해 한평생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 아닌가.

“곪았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겁니다. 흉년, 기근, 각 지방에서 이어지던 영주들의 횡포와 그 의견들을 묵살했던 황실의 태도. 그리고 아무리 악명이 높았다지만 절차도 없이 메리골드 공작가의 여식과 이혼하여 정부 출신의 여인을 황비로 올린 것. 그 황비가 아이를 품었다는 거짓으로 황실을 기만하고 도망친 것…….”

“…….”

“그리고, 황제가 황실의 적자가 아닌 것까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소티스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뻔했으나, 레먼이 재빨리 팔을 움직여 잔을 함께 받쳐 쥐었다.

수심 가득한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을 꼼꼼히 살피는 것을 느끼며 소티스가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움직이셨군요……. 혼란 속에서 얻어 낼 수 있는 게 없을 텐데요.”

“아마 아닐 겁니다.”

“……네?”

“멘데즈의 황제 폐하를 둘러싼 혈통 문제는 평민들이 제기한 겁니다. 소문이 퍼졌다는 뜻이지요. 그것도 수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말이지요.”

차라리 귀족들 사이에서 은근하게 말이 돌기 시작했다면 어떻게든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멘데즈의 어디에든 존재했고, 본래 말이라는 것은 물살보다도 빨리 흐르는 법이었다.

메리골드 공작가는 그렇게 소문을 널리 퍼뜨릴 만한 방법이 없다. 소문을 은근슬쩍 흘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걸 멘데즈의 전역에 꼼꼼히 퍼뜨리려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평민과 맞닿을 수밖에 없는, 조직적인 움직임.

“상단.”

그게 가능한 집단은 상단뿐이다.

그리고 멘데즈 황국에서 가장 큰 상단은 렉투스 상단이다.

“설마, 셰릴이 움직인 걸까요?”

“상단주보다는 공녀에게 더 명확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소티스만큼이나 셰릴도 많은 고초 속에서 살아왔다. 황후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온갖 모욕을 당했고, 소티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에드먼드의 냉대를 받았으며 귀족들 사이에서 숱한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런 셰릴이 황실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다. 에드먼드를 끌어내릴 수 있는 수단을 손에 넣었다면, 반드시 그걸 이용하려 들겠지.

“곳곳에서 폭동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멘데즈 황실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레먼이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멘데즈 황실에서, 정확히는 에드먼드 폐하께서 소티스 님을 찾고 있습니다. 한 번만 멘데즈로 돌아와 달라는 내용이 담긴 서신이 왕실 쪽으로 전달되었더군요.”

“……저를요.”

“예. 소티스 님을요.”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에드먼드 폐하께서는…… 소티스 님이 멘데즈 황실로 돌아와 주시기를 바라시는 걸까요?”

소티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안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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