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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98)화 (99/121)

97화. 불온한 바람 (1)

“당신은 악몽도 안 꾸나요?”

투정하는 듯한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소티스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다 지워지지 않은 퀘렐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예 안 꾸진 않지만…… 글쎄요, 최근에는 딱 한 번 꾸었던 것 같아요.”

“언제였는데요?”

“마차를 타고 황성에서 나왔을 때요.”

그 당시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던 게 떠올랐다. 고작 한 계절 전의 일이었건만,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인지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그때를 제외하고는 그리 크게 악몽을 꾼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쁜 기억에 전신을 찔린 것처럼 놀라서 깨어나는 퀘렐라를 보고 적잖이 놀랐고, 동시에 슬펐다. 한평생 무언가를 원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삶이 어떻게 괜찮겠는가.

식은땀에 젖어 깬 퀘렐라가 정신을 완전히 차리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신경질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소티스가 끌어안고 나서야 그녀의 슬픔은 누그러졌다.

저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소티스는 어떤 고민을 하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다. 본능적으로 고른 낱말들에 가까웠다. 퀘렐라는 머뭇거리다가 소티스를 마주 안았다. 이상하게도 소티스는 그 손길에 위로받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때 말고는 없었어요.”

“딱히 악몽을 꿀 만한 일이 없어서……는 아니겠죠.”

다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이따금 무의식 속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드러내곤 했다. 퀘렐라의 경우 긴장이 느슨해진 밤에, 특히 잠들 때면 그런 일이 종종 생겼다.

퀘렐라는 제 짧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이 마르면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꼼꼼한 소티스가 그 모습을 보더니 제가 덮고 있던 담요를 양보했다.

스카우터의 검은 눈동자가 한때는 황후였던 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감정이 제게 흘러와 스며들고 있었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안에는 오래도록 켜켜이 쌓인 상처가 있었다. 다만 소티스의 상처는 퀘렐라의 것과는 달라서, 그녀의 무의식을 뚫고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오래 묻어 두었고, 너무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소티스는 선선히 웃었다. 퀘렐라는 어쩐지 그 모습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슬픔을 슬픔으로 명명하지도 않는 건 미련한 걸까, 강한 걸까.

적어도 외로웠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왜…….”

퀘렐라가 작게 말했다.

“왜 당신의 세상은 그렇게 험난했을까요? 이만큼 다정한 사람은 둘도 없을 텐데.”

그러자 소티스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쉽게 살고 싶어서 착하게 군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당신 말이 옳아요, 퀘렐라. 화낼 일에는 화내야 하고, 슬픈 일에는 슬퍼해야 하지요. 묻어 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퀘렐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구보다 약한, 그러나 누구보다 곧은 물빛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럼, 언젠가는 악몽을 꾸게 될까요? 제게 소홀했던, 그리고 무정했던 사람들을 미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오늘의 제가 당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절 도와주는 건 어때요?”

퀘렐라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런 건 저보다 페리윙클 마탑주에게 부탁하지 그래요?”

소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퀘렐라 님께서는 싫으신가요?”

“…….”

순진무구하게마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결국 화가 부글부글 끓고 만 퀘렐라가 빽 소리쳤다.

“알았어요, 해 드릴게요! 할 거예요! 제가 그렇게 은혜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세요?”

“…….”

“나중에 제가 당신을 알뜰살뜰 챙겨 드린다고 레먼과 싸우지나 마세요!”

“푸훗, 하하. 그건, 아하하. 레먼이 저도 모르게 질투할 만큼 잘 챙겨 주겠다는 뜻…….”

“아니에요!”

“푸핫.”

“아니라니까!”

버럭 화를 내던 퀘렐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어쨌든 날이 밝았으니 움직여야 했다. 소티스의 몸이 다 낫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핀이 더 많은 악령술사들을 모으기 전에 그녀를 만나야 했다.

퀘렐라 에니드는 혼돈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전능할 정도의 힘을 얻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알았다. 지금은 힘을 모아서 소티스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겠지.

진짜 힘을 손에 넣는 순간, 그건 그저 지나간 착각에 불과하게 된다. 사람은 유혹에 약하고, 혼돈은 곧 그릇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만큼 달콤한 혜택을 선사한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이번에야말로 규율과 함께 싸울 것이다. 규율을 지켜 낼 것이고, 이전에 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해내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소티스의 시선이 제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슬퍼 보이면서도 한없이 맑은 푸른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울처럼 맑아 바닥이 보일 듯하면서도 바다처럼 깊은 눈이었다.

“소티스 님.”

퀘렐라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퀘렐라 님.”

혼돈조차도 진정으로 사랑할 여인이 웃고 있었다.

“함께 가요.”

***

소티스 메리골드와 퀘렐라 에니드가 국경 지역에 도착했을 즈음, 두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워졌다.

퀘렐라는 선심을 쓰듯 레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고, 소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청했다.

언제나 다정하고 능숙해 보였던 레먼에게 실수가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간질간질하고 이상했다. 별것도 아닌 이유로 두 사람이 언성을 높여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싸우기도 하는군요. 제 앞에서는 화를 잘 안 내서 몰랐어요.”

“은근히 잘 욱하는 성격인데. 게다가 뒤끝이 얼마나 긴데요? 화내는 모습을 정말 못 보셨어요?”

“아, 보기는 봤는데…….”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처음으로 화낸 모습을 보았을 때는, 아마 소티스가 공작에게 붙잡혀 위협당할 순간이었을 것이다.

소티스가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웃자 퀘렐라가 혀를 찼다.

“보나 마나 소티스 님을 위해서 화냈겠죠.”

“아하하…….”

“그렇게 무안해할 것 없어요. 두 사람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마음은 요만큼도 없으니까.”

지친 말들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고삐를 느슨히 쥔 퀘렐라가 밤색 말의 갈기를 손으로 가볍게 빗어 달랬다.

“그래도, 신기하네요. 당신은 사랑이라면 아주 진절머리를 낼 줄 알았거든요.”

소티스가 흰 말에 살짝 기대며 웃었다.

“질려요, 사랑.”

그녀가 이마를 타고 앞으로 흘러 내려온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후 불어 날리며 덧붙였다.

“그 알량한 감정 때문에 인생이 얼마나 바보 같은 쪽으로 흘러갔는지 기억하면, 저만큼 그 마음을 지겨워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렇겠죠.”

에드먼드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소티스는 1년 더 일찍, 아니, 10년은 더 빨리 자유로워졌을지도 모른다. 불명예뿐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제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아등바등 애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매번 저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에드먼드에게 상처받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 시절을 견디는 일이 조금은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사랑의 잘못인가요?”

소티스가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알고 있다. 그건 사랑의 잘못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나약해진 자신의 잘못인 것을.

요령 없는 첫사랑만 탓하는 건 비겁한 일이다.

“저한테는 기회가 필요했어요.”

소티스의 고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짜 사랑을 배울 기회가 절실했어요. 사랑은 무언가를 끝없이 견디고 포기하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꺼이 해내고, 이루고, 강해지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마음이라는 걸 몰랐거든요.”

그리고 레먼 페리윙클은,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소티스는 물빛 눈동자에 퀘렐라를 가만히 담으며 말했다.

“그래서 사랑했어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은 남자와, 사랑을 해야 했던 여자.

퀘렐라는 자신이 가장 많이 원망했던 두 사람을 생각했다. 그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래도록 사랑했던 남자가 눈앞의 이 여자를 사랑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당신이 그저 약하다고만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랬어요.”

소티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가닥가닥 흩날렸다.

“그래도 이젠 그렇지 않아요. 저는 강해질 거고, 떳떳해질 거고, 그래서 한 점 부끄럼 없이 대등한 존재가 되어 레먼을 사랑할 거예요. 제가 레먼을 구해 주었고, 레먼이 저를 구해 주었으니…… 더는 무엇도 빚지지 않고 제 숙명을 완수한 뒤에.”

그런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살아남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어진다면.

“그때 돌아가서, 정말로 후회 없이 사랑할 거예요. 그건 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저를 불행하게 했던 사람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해요.”

“…….”

“그리고 당신도 그런 사람을 반드시 만나겠죠. 레먼 페리윙클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퀘렐라는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대답했다.

“참 이상한 일이에요.”

그녀의 고집스러운 입술이 달싹였다.

“전 사람을 잘 믿지 않아요. 정확히는, 그 사람이 가진 감정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거죠. 그런데도…… 소티스 님이 그렇게 말하면, 꼭 그 말대로 될 것 같아요. 믿게 되고, 믿고 싶어져요.”

“그럼 믿어 봐요.”

소티스의 흰 얼굴에 태양 같은 미소가 어렸다.

“저는 약하지만, 틀린 적은 많지 않았거든요.”

퀘렐라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당신 같은 언니가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요?”

“음…… 글쎄요, 셰릴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화를 냈겠는데요. 그럼 자기 인생은 뭐가 되는 거냐고 펄펄 뛸 거예요.”

소티스가 하하, 하고 작게 웃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전 여동생이 두 명이면 좋을 것 같아요.”

퀘렐라가 입술을 꾹 깨물며 대답했다.

“그 말, 취소할 생각 마세요.”

“그래요.”

“정말 괜찮다고 했어요.”

“네.”

“전 이제 혼자 남겨지는 건 지겨워요. 아무도 놓치지 않을 거예요.”

“알겠어요.”

“사라질 생각 같은 건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게 혼돈이든 뭐든, 저는 절대로 지지 않아요. 만일 이번 싸움이 끝나면…….”

“퀘렐라.”

소티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소티스의 손이, 퀘렐라의 눈가를 가만히 훔쳐 주었다.

“네가 날 도와줄 텐데 내가 왜 사라지겠어?”

“…….”

“어디든 같이 가자. 국경까지 얼마나 남았어?”

퀘렐라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들판만 넘어가면 돼,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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