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97)화 (98/121)

96화. 혼돈을 위하여 (4)

“근데 왜 헤어지시는 거예요?”

진지한 이야기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자, 퀘렐라는 등에 메고 왔던 가방을 내려놓더니 챙겨 온 것들을 소티스에게 건넸다. 얇은 모포와 갈아입을 옷, 수건, 그리고 말린 과일과 물 몇 병이 이어졌다.

“제가 해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

“생각해 보면, 저는 늘 남들의 도움을 받았거든요. 황후가 된 것도, 전남편에 대한 사랑을 그만두게 된 것도…… 그곳에서 벗어나 진짜 세상을 보고, 자유를 꿈꾸고…… 마법사가 된 것조차도요.”

다른 사람들의 선의로 인해 가장 불행한 순간에서 걸어 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어떻게 보면 도움을 받는 게 당연했다. 자신은 약했고, 누구도 세상의 모든 일을 홀로 해낼 수는 없었으니.

그러니까 더욱 성장하고 싶은 거다. 그 사람들 없이도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의지하는 것도 좋지만, 의존하기는 싫었다.

“레먼에게 떳떳해지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었고요.”

퀘렐라는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소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낱낱이 살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어쨌든 제게는 희소식이네요. 제가 페리윙클 마탑주를 좋아했던 건 아시나요?”

퀘렐라의 뾰족한 목소리가 얄밉게 올라갔다.

“이 물건들은 헤어지신다니까, 감사 인사 대신 드리는 거예요.”

소티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는 이미 제 소식을 듣자마자 물건을 챙겨서 왔다. 두 사람이 헤어진다는 말은 탑에 오고 나서야 알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이제 퀘렐라는 레먼을 좋아하지 않는다. 소티스는 그녀처럼 타인의 감정을 읽어 내는 마법 같은 건 부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어린 퀘렐라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지금은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았고, 그것에 일생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었다. 그녀를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퀘렐라 님은 거짓말에 영 재주가 없으시네요.”

그녀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속는 척이라도 좀 해 주시지.”

“제가 속아 드리면 제 안의 당신은 남의 불행을 기회라고 생각하며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데, 어떻게 그래요?”

“…….”

“고맙습니다.”

소티스의 감사 인사에 퀘렐라의 귀가 붉어졌다.

숱한 아이들을 구했지만, 고맙다는 말에는 도무지 익숙해지기가 어렵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길 잘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고 직접 하길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떼어 놓고 보면 소티스 메리골드는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올곧고, 솔직했으며, 당연한 것처럼 다정했다. 유약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으나 자신의 약함을 마주 보며 올곧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같지 않았다.

퀘렐라는 소티스를 끌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더께처럼 내려앉은 먼지를 꼼꼼히도 털어 내더니 거기에 지친 소티스를 앉혔다.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와 그녀와 마주 앉고, 물과 음식을 쥐여 주자 소티스는 창백한 얼굴로도 애써 웃어 보였다.

소티스는 제가 할 수 있다며 만류하려 했지만, 밀물처럼 밀려드는 탈력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퀘렐라도 들어가서 눈 좀 붙여요. 옆방에도 침대가 있었잖아요.”

“됐어요. 그러다 밤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요?”

“그건…….”

“같이 있기로 했는데 허투루 챙기면 제가 사람들을 무슨 낯으로 봐요?”

그녀가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 정도면 좋은 거예요. 길바닥에서 자는 일이 얼마나 흔한데요.”

퀘렐라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소티스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너무 도움만 받는 것 같아요.”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네요. 저는 지금 빚을 갚는 중이거든요.”

“네?”

잠깐의 침묵 후에 퀘렐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떻던가요?”

이별을 받아들이기에는 사실 아직 일렀다. 하지만 퀘렐라는 제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든 이해했다. 적어도, 테스타멘에게 삶이 형벌이며 죽음만이 자유라는 사실을 힘겹게나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펐으나, 그 아버지가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편히 눈감을 수 있게 한 건 소티스였다. 엘디카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이 역시 소티스였다.

처음에는 왜 이방인인 소티스가 그 중요한 역할을 전부 도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알면 알수록 그녀만이 적임자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테스타멘 님은…….”

소티스가 제 기억을 신중하게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후련해 보이셨어요.”

“…….”

“아주 오래도록 자유를 그리워하셨고, 이내 그걸 손에 넣으신 것 같았어요. 기뻐 보이셨고…….”

“그래요.”

퀘렐라는 눈을 감고, 낡은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미소를 힘겹게 꺼냈다. 그리 많지 않은 추억은 빛바랜 나머지 본래의 감정마저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곱씹는 내내 웃을 수는 있었다.

“피니에 로즈우드는 아마 국경 지대의 바다로 갈 거예요.”

“바다…….”

태초의 혼돈이 태어났다던, 멘데즈와 베아툼 사이의 바다. 그곳에서 핀은 악령술사들의 힘을 모두 집어삼키고 진정한 혼돈으로 거듭날 것이다.

“국경 지대라면 제가 잘 알아요. 제집처럼 드나드는 곳이니까. 소티스 님은 스스로 해내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혼자 해내는 게 옳은 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소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길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좋아요.”

퀘렐라는 덤덤하게 대답하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핀이 당신을 위해 거짓말했다는 걸 몰랐을 때도, 구해 주고 싶어 하셨죠.”

“그랬죠.”

“왜요? 화나지 않던가요? 가지고 있던 걸 다 빼앗으려 했잖아요. 아기가 생겼다는 거짓말로 남편을 빼앗아 가고, 놀림거리로 만들고…….”

“화를 내는 일이 아까웠어요.”

퀘렐라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렇게 살면 누가 고마워하던가요? 당신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세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소티스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화낼 일에는 화내세요. 슬퍼할 일에는 슬퍼하시고요. 보답 없는 마음을 왜 계속 주나요? 그 사람들이 그런다고 뒤늦게 감명받고, 존중해 주고, 사랑할 것 같나요?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애당초 그러지 않았겠지요.”

“…….”

“분명 세간에는 착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남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뿐이죠.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받는다고요. 당신이 당신 자신을 아껴 주지 않으면 어떡해요?”

한마디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소티스는 차마 퀘렐라를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제가 물러나고 양보한다면, 자신만 사라진다면 모든 일이 말끔하게 해결될 것만 같았으니까. 누구도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건 그저 슬픔에 매몰되어서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다. 적지만 소티스의 곁을 내내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마리아네스가 그랬고, 시녀들이 그랬다.

이제는 거기에 사람들이 더해졌다. 레먼이, 알베스가, 애나가…… 그리고 퀘렐라가. 각자의 방식으로 소티스를 아끼고 존중해 주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소티스는 자신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저는…….”

소티스의 눈앞이 흐려졌다. 물빛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핀이 미워요.”

“…….”

원망스러웠다. 그 정열적인 붉은 머리의 여인이 야속했다. 눈앞에 있다면 어깨를 붙잡고 따져 묻고 싶을 정도였다.

핀, 당신이 미워.

“왜 나를 믿지 않았을까…….”

왜, 함께 도망치는 게 아니라 홀로 악랄한 가면을 뒤집어쓴 채 가라앉아 버리는 방법을 선택했을까. 제 삶을 통째로 제물로 바쳐서.

누군가의 삶을 짓밟아 날아오르는 자유가 정말로 마음 편할 리가 없는데.

“그리고, 왜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했을까.”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게 얼마나 비정한 일인지 알려 주기 위함이었을까?

“도와줄 수 있었는데.”

도와주고 싶었는데.

“분명 외롭겠죠…….”

소티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지만, 핀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도망치듯이, 제 종적을 지워 가면서 남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완벽한 죽음을 위해서.

그건 너무 쓸쓸한 여정이었을 것 같아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하루라도 빨리 핀을 만나러 가야 해요.”

퀘렐라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스스로를 제대로 갈무리하지도 못하는 지금, 누굴 위해서 움직인다는 건 오만에 불과해요.”

“…….”

“주무세요. 일어나서 제가 챙겨 온 음식을 다 드시고요. 길은 그다음에 안내할 거예요.”

“……알겠어요.”

두 사람은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티스는 꾸밈없는 퀘렐라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고, 퀘렐라는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소티스의 앞에서 편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대화의 반은 잔소리였다. 마리아네스와 달리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퀘렐라의 말은 뾰족했지만, 가시 같은 말 속에 숨은 진심 때문이었을까? 소티스는 꾸중하는 듯한 말에도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분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침대에 나란히 기대앉은 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따뜻하고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녀가 꼭 여동생처럼 느껴졌다. 셰릴하고도 이런 건 해 보지 못했는데.

언젠가는 셰릴과도 이렇게 솔직하게 대화하고, 고개를 맞댄 채 잠드는 날도 올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녀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니까.

하지만 어쩐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티스는 희망을 손에 움켜쥔 채로 스르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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