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96)화 (97/121)

100화. 불온한 바람 (4)

“소원이 있어요.”

그 말에 소티스는 괜히 곱게 그러겠다고 하기 싫어서, 평생 해 본 적도 없는 심술을 부려 보았다.

“제가 왜 레먼의 소원을 들어줘야 해요? 연인도 아닌데요.”

그 말에 레먼이 잠시 슬픈 표정을 지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이내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헤어지자는 말에 동의해 놓고, 말로만 동의했잖아요. 행동도 표정도 전혀 아닌걸.”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레먼이 재빨리 변명했다.

“헤어지자고 했지, 좋아하지 말라고는 안 하셨잖아요.”

“…….”

확실히 그랬다. 애당초 그들의 이별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고, 사실상 일시적인 휴식일 뿐이었다.

그러니 좋아하지 말라고 하지 못했다. 그건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그러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의심할 바 없이 선명했으니까.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줄까.

결국 소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뭔가요? 당신 소원이.”

“무릎베개를 해 주세요.”

소티스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새삼스럽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 대신 자세를 조금 바꾸었다. 그녀가 옆으로 비켜나자, 레먼이 옆으로 웅크리듯이 누워 그녀의 허벅지에 제 머리를 누였다.

흔한 자수 하나 없는 흰 치마에 레먼의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그는 만족한 듯 웃으며 소티스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따뜻하네요.”

“…….”

“오늘만이잖아요, 소티스 님. 해가 뜨기 전까지만요.”

그러더니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 눈을 감고 만끽하는 것이다.

어딘가 얄미우면서도 귀여운 행동에 소티스는 손을 뻗어 레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쩌다 보니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처럼 되었지만, 실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녀도 기뻤다.

사락, 사락. 작은 소리가 소티스의 손끝을 타고 흘렀다. 평화로운 적막이었다.

“잠들었나요?”

레먼이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아뇨, 아직요.”

“자도 돼요.”

“아직 아니에요. 잠은 어차피 앞으로도 실컷 잘 수 있으니까요.”

소티스는 레먼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되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려던 순간, 그가 눈을 반짝 뜨고 소티스를 올려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속이 고스란히 비쳐 보일 것처럼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동공이 살짝 가늘어진 것 같기도 했다.

“부적이 있으면 저를 더 강하게 생각할 수 있겠죠?”

“갑자기 생각은 왜요?”

“생각은 곧 힘이거든요. 영혼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마음의 힘입니다. 더욱 강하게 생각할수록, 간절하게 떠올릴수록 강해지는 게 마법이니까요.”

레먼의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차분한 어조에 비해 내용은 이해하기 퍽 어려웠다. 소티스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레먼이 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새파랗게 빛날 정도로 잘 벼려진 날에 그의 옆머리가 한 줌 잘렸다.

“레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티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날 뻔했다. 레먼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눕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잘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쥔 레먼이 낮게 웃으며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넣은 뒤, 고대어로 된 문장 몇 개를 외웠다.

“제가 보고 싶을 때 보세요. 아무래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아무리 그래도 머리카락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라는걸요.”

그녀는 건네받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기쁘기는 했다. 그를 추억할 만한 물건이 있다면, 떨어져 있을 때의 그리움을 견디는 데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 탓이었을까? 소티스는 어쩐지 이것이 단순한 선물이 아닌 것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간절한 레먼의 눈동자를 내내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소티스 님.”

“네, 레먼.”

“꼭 기억해 주세요.”

그가 손을 뻗었다. 소티스는 고개를 숙여 주었고, 이내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던 손이 마른 뺨을 가만히 쓸었다.

그리고 그 손길이 내려와 곧은 목덜미를, 정확히는 그 목에 걸린 목걸이를 천천히 매만졌다.

그건 일전에 소티스가 레먼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였다. 너무 화려한 것을 걸고 다니면 불필요한 시선이 몰릴까 걱정되어 진주는 떼었지만, 레먼과 알베스의 마력이 담긴 호박색 보석은 여전히 걸려 있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 있을 겁니다.”

레먼의 손끝에서 작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그녀의 호박색 목걸이가 그에 반응하듯이 빛났다. 마치 그의 마력을 자연스레 빨아들인 것 같았다.

“당신의 이름을 부를게요.”

소티스가 작게 속삭였다.

“최선을 다한 뒤에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때는 반드시 제가 당신을 먼저 생각할 거예요.”

“네, 소티스 님.”

레먼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고단한 듯 눈을 감은 그가 소티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이 와요.”

참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잠들었을 뿐인데 왜 그가 어디론가 멀리, 그리고 깊이 가라앉아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른다.

소티스는 가물가물 감기는 그의 갈색 속눈썹을 응시했다. 눈꺼풀 뒤로 숨어 버린 그의 눈동자를 찾다가,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레먼.”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소티스는 그를 다시 불러 보았다.

“레먼.”

깊이 잠든 듯, 이어지는 것은 부드러운 침묵뿐이었다.

소티스는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온기가 남은 듯 보석은 따뜻했다. 꼭 무언가 빨려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소티스는 레먼을 믿기로 했다.

“…….”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소티스는 어느새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잠들었는데, 뒤척거리는 와중에도 레먼은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이 자고 있었다.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창 너머를 응시했다.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레먼.”

소티스가 레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언제나 당신을 생각해요.”

그건, 언제나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제게 당신만큼 좋은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함께하지 않아야만 하는 일도 있는 거다.

“저는 약하고, 어쩌면 제 생각보다 더 무능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단 하나만큼은 직접 하고 싶었어요.”

쓸데없는 고집이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간절하고 절실했다.

핀만큼은 제 손으로 구해 내고 싶었다.

자신의 운명이고, 자신의 싸움이었다.

소티스는 몸을 일으켰다. 피로가 서려 있던 표정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단호해졌고, 짐을 챙겨 옮기는 걸음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방에서 나오자, 문 옆 벽에 기대 서 있던 퀘렐라가 허리를 폈다.

“갈까?”

“응.”

소티스가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있던 머리를 위로 올려 묶었다. 결연한 표정은 마치 전쟁터로 나서는 기사를 연상케 했다.

두 사람은 어떤 대화도 없이 여관을 나섰다. 바닷가 특유의 짠 바람이 두 사람의 뺨과 머리카락을 스치며 흩어졌다. 서늘하고 축축한, 어딘가 불온한 느낌마저 드는 바람이었다.

혼돈이 다가오고 있었다.

***

카나리아는 한 번을 제대로 지저귀는 법이 없었다. 그저 마치 한평생 화려하고 비좁은 곳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신세에 실망한 듯, 체념한 듯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그 새가 지저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새는 뭐지?”

“황후궁에서 태어난 새입니다. 본래 소티스 님께서 돌보시던 새인데, 지금은 시녀들도 궁을 떠나 버려서 돌볼 이가 없기에…….”

“두고 가거라.”

시종을 시켜 배불리 먹이고 마시게 했으며, 볕이 잘 드는 뒤뜰에 몇 번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짝을 지어 줄까 하다가, 카나리아는 다루기 힘든 데다 수컷을 붙여 두면 잘 울지 않는다 하여 홀로 지내게 내버려 두었다.

그 작고 연약한 새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에드먼드는 소티스가 남기고 간 흔적처럼 느껴지는 그 새를 돌보았다.

어쩌면 그 새를 소티스 대신에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새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온전한 가락 하나 부르는 일이 없었고, 뿌리 잘린 식물처럼 서서히 시들듯 기력을 잃어 갔다. 그는 새를 키워 본 일이 없었으므로, 카나리아가 정확한 가락으로 노래하는 어미를 보고 자라야만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새와 꽃을 가져다 두었는데도 황제의 집무실은 황량했다.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그의 자질과 출신을 의심하는 서류들 때문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에드먼드는 황폐한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주제에 안 맞는 짓이었지.”

이깟 새 한 마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하더라도 네가 내게 돌아오는 게 아닌데. 아니, 이 생각조차도 오만하다. 애초에 이 작은 짐승조차도 불행 속에 빠뜨리는 것이 자신이었다.

“소티스, 네가 히아신스라고 생각했어.”

겸손한 사랑을 의미한다던 그 보랏빛 꽃인 줄로만 알았더니.

“아니구나. 카나리아였구나.”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나리아는 환경에 예민하다. 탄광에 카나리아를 데려가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카나리아가 살지 못하는 곳은, 결국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땅이 된다.

소티스가 떠난 멘데즈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게 얼마나 멍청한 후회인지 이제는 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아집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그녀를 미워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그 새장에 든 게 카나리아가 아니었더라도 에드먼드는 그것을 보며 소티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지나가는 꽃 한 송이, 시녀가 옮기는 그릇에 담긴 이파리 하나를 보고도 떠나 버린 소티스를 생각할 것이다.

몰락하면 몰락할수록 소티스의 부재는 크게 느껴졌다. 그녀가 떠받치던 것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했다. 동시에, 그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조차.

무슨 마음으로 기회를 청한 걸까. 에드먼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감히 마지막 기회를, 사람의 마음을, 너그러운 자비를 구걸한 걸까.

하지만 그녀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아무도 자신을 구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끔찍한 사람이었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왜 그렇게, 잘못된 길인 줄도 모르고 성난 송아지처럼 치받아 대기만 했을까.

자격 없는 후회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노래하지 않는 새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 소티스.”

네게 속죄할 방법이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것만이라도 구걸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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