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혼돈을 위하여 (3)
퀘렐라가 전한 서류에는 지금의 멘데즈가 쑥대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명료하게 적혀 있었다.
피니에 로즈우드가 도망쳤다. 황성을 벗어나기 전 그녀가 남겨 둔 서신에는 아기에 관련된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물론 그 거대한 연극을 혼자 해낸 건 아니었다. 의사를 매수했으니.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의사는 악령술사였다.
황비의 전담 의사는 손이 검게 물들어 죽은 채 발견되었고, 황비는 도망쳤다. 붉은 머리의 여인은 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제 ‘마녀’가 되는 일이 두렵지 않다.」
「멘데즈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고, 가장 중요한 이를 잃었다.」
「규율이 떠난 자리에 혼돈이 남았다.」
「나는 기꺼이 혼돈이 될 것이다.」
“황실을 능멸했으니 죄를 묻기 위해 추적했던 모양이지만, 수도를 벗어난 이후로 종적이 묘연해졌다더군요.”
소티스가 서류를 거의 다 읽은 것을 확인한 퀘렐라가 말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도망친 흔적을 지웠을 겁니다.”
“조력할 이가 있을까요? 귀족들은 후환이 두려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평민들에게는 핀을 도울 이유가 없어요.”
그러자 퀘렐라의 검은 눈동자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있어요. 후환이 두렵지 않고, 혼돈의 존재를 기다리는 이들이.”
“……악령술사들과 벌써 결탁했다는 뜻이군요.”
“맞아요. 그리고 이건 비공식적인 정보입니다만, 지금 멘데즈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각 지역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고, 베아툼에 있던 몇몇 악령술사들이 국경을 넘어서는 행보를 보이고 있어요.”
단순히 황비가 도망쳤다는 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아마 소티스의 손에 들린 서류에는 언급되지 않은 문제들이 더 있겠지만, 황실의 치부로 직결되어 쉬쉬하는 단계일 것이다.
“반란, 같은 게 일어나려는 건 아니겠죠…….”
아무리 그녀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지는 못한 나라라고 하여도, 근 서른 해를 살아왔으며 힘껏 돌보았던 곳이다. 제 고국이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퀘렐라는 상대를 위해 적당히 꾸며 말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볍게 코웃음 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라가 언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죠. 멘데즈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고 싶진 않지만…… 인접국인 만큼 대비할 필요는 있으니까요.”
“…….”
“피니에 로즈우드는 자신이 혼돈이라는 사실을 드러냈어요. 아마도 악령술사들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함일 겁니다.”
소티스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떻게 움직일지 가늠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시는 건가요?”
“정보원을 심었거든요. 비슷한 처지로 베아툼에서 방출된 아이들이 제 후원을 받는 대가로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 있어요.”
“……방출?”
미묘한 단어였다. 그러니까, 후원이 필요할 정도로 어린 아이들이 베아툼에서 멘데즈로 쫓겨났다는 말인가?
“죄를 지어서 쫓겨난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퀘렐라가 날 선 말투로 대답했다.
“그 애들이 잘못한 건 없습니다.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죄는 다른 사람들이 지었죠!”
“……죄송해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티스는 퀘렐라의 안색을 살짝 살피다가, 자신의 옆자리를 향해 손짓했다.
“말해 주세요. 그럼 정말로 잘못한 사람은 누군지. 악령술사들은 왜 베아툼과 대립하게 되었는지도요.”
퀘렐라는 짜증스러운 눈길로 소티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따지고 보면 공연한 화풀이였다. 그녀가 구한 아이들이 불행한 삶에서 힘겹게 빠져나온 것은 맞지만, 그게 어디 소티스의 잘못이겠는가.
해묵은 원망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건만, 역시나 쉽지 않다. 퀘렐라는 숨을 천천히 고른 뒤 소티스의 옆에 몸을 내렸다.
그녀가 현명하다는 사실은 이미 보고 겪어 알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믿어 보자.
“아시다시피 베아툼 왕국은 마법사의 나라입니다. 마법사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타국에서 버려진 이들일지라도 이쪽 길을 걷는다면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며 보호하지요.”
소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멘데즈 황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멘데즈는 마법이 가진 힘을 신기하게 여기지만,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힘을 두려워한다. 오랜 평화에 무뎌진 사람들은 고요한 일상을 깨뜨릴 만한 변수를 반기지 않았다.
“그건 베아툼의 매력이자 장점이잖아요.”
퀘렐라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이 되기도 했지요.”
“…….”
“마법사는 선천적인 재능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베아툼의 사람들은 누구나 마법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다 될 수 있는 게 아닌 거군요.”
소티스는 퀘렐라의 말 몇 마디로 베아툼의 단점을 파악했다.
마법사의 힘에 의존하는 작은 나라. 조그만 사회에서 정의처럼 통하는 어떤 가치를 지나치게 숭배하게 된다면, 그 새로운 가치에 의해 밀려나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겨나고 만다. 하물며 어떤 재능의 영역이라면 더욱더 그 결과가 극명하게 갈리고 말 것이다.
누구든 마법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 모두가 마법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마법사가 될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소티스가 천천히 눈을 감자, 퀘렐라가 그녀의 생각을 도왔다.
“베아툼의 일부 마법사들은, 타인의 마력에 간섭해서 마법사를 만들어 냅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네. 아주 작은 마법이나마 쓸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일반인과 그리 다를 것이 없어서, 그들에게 남는 건 그저 소속감뿐이겠지만요.”
하지만 그 소속감을 감히 하찮다고 비웃을 수 없었다. 마법이 베아툼에서 가지는 가치를 생각한다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목표이자 유일한 희망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통해서 마법사가 되지 못한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자질 없는 아이들…….”
퀘렐라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차가운 분노가 낡은 방 안에 조용히 울렸다.
“그런 아이들이 바로, 타국으로 쫓겨납니다. 이 나라에서는 그들을 환영하지 않으니까요.”
잔인한 현실이었다.
멘데즈에서는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발현되기 전, 이상 증상이 생겨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버린다. 하지만 반대로 베아툼에서는 마법사가 되지 못한 아이들을 낙오자로 낙인찍어 ‘방출’시킨다.
제 삶을 채 살아 보지도 못한 아이들의 미래를 왜 타인이 그렇게 쉽게 재단하고 버린단 말인가. 무엇이 될지도 모를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품어 주지는 못할망정.
“저는 스카우터예요, 소티스.”
퀘렐라는 의자 위에 두 다리를 올려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몸을 웅크렸다.
“국경을 다니며 많은 아이를 보았죠. 이유는 달랐지만, 버려지는 아이들의 얼굴은 똑같았어요. 그 애들이 지닌 괴로움이 뭔지 알아요. 저 또한 약하다는 이유로, 어리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아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남겨졌으니까요.”
“…….”
“저는 그런 아이들을 구하고 싶어서 스카우터가 되었어요. 설령 그로 인해 아이들의 삶을 지옥으로 처넣은 이들을 평생 원망하게 되더라도.”
퀘렐라, 원망하는 여인.
그녀는 누군가를 원망할 숙명을 타고난 동시에, 그 원망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여 누군가의 인생을 불행에서 빼내는 데 쓰고 있었다.
“저는 아이들에게 알맞은 자리를 찾아 주기 위해 애썼어요. 참 신기하지 않나요? 국경 하나만 넘어가면 그렇게 쫓겨나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받아 준다는 게.”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소티스는 숙연한 얼굴로 침묵할 뿐이었다. 그저 치열했을 타인의 삶을 힘겹게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틈에서 생겨난 게 악령술사예요.”
예상할 수 있는 슬픔이었다. 소티스는 현명했고, 퀘렐라의 이야기를 반도 듣기 전에 악령술사가 어떻게 태어났으며 왜 베아툼의 마법사들을 미워하게 되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악령술사들의 처지는 그냥 버려지는 아이들보다도 나빠요. 억지로 마력을 받아들이다가 그릇 자체가 망가지거나 비틀리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그릇된 방식으로 발현되며…… 본인의 영혼 또한 상하게 됩니다. 영혼이 가진 본연의 힘을 끌어다가 쓰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
소티스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베아툼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제게는 말할 자격이 없었다.
그녀의 감정을 전달받은 퀘렐라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마법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사람들이에요. 베아툼이 낳은 비극이자, 이 나라가 꿈꾸는 낙원을 위해 희생시킨 이들이기도 하지요.”
“그럼 악령술사들은 혼돈을 통해…… 그 낙원을 부수려는 거겠군요.”
“그들은 광신도와 같아요.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 같은 건 아까워하지 않을 겁니다. 왜 아깝겠어요. 어차피 죽음이 예정된 삶을 살고 있고, 죽음보다 더한 불행 속에 내던져진 이들이 대부분일 테니까요.”
악령술사들은 혼돈과 접촉하여 자신들이 가진 마력을 모두 건네주고, 베아툼과 대적하려 할 것이다. 설령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망가져 다시는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음 생조차 약속받지 못한 채 영원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핀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을 이용할 것이다.
악령술사들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 혼돈이 된 뒤.
「나는 이제 ‘마녀’가 되는 일이 두렵지 않다.」
소티스는 피니에가 남긴 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을 모두 빼앗아 함께 가라앉아 버리려는 마음인 것이다.
보은하기 위해서.
“신기해요.”
퀘렐라가 가만히 말했다.
“서로를 죽이려 애쓰는 규율과 혼돈을 보았던 제게, 두 사람은 너무 신기하고 이상해요.”
“……그러게요.”
“어쨌든, 스카우터로서 제가 할 일은 하나예요.”
붉은 머리의 여인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국경을 헤매는 불행한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마법이 없다는 이유로 멘데즈로 쫓겨나는 아이도, 마법을 가졌다는 이유로 베아툼으로 쫓겨나는 아이도 없어지는 날까지.”
“……저는, 핀을 구하고 악령술사들이 더는 나쁜 의도로 세상을 망치지 않도록 막을 거예요.”
“신기하네요. 우리는 다른 목표로 움직이고 있는데, 결국 같은 일을 해낼 거라는 게요.”
퀘렐라가 조용히 덧붙였다.
“해 보자고요. 세상이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