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혼돈을 위하여 (2)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면, 그건 아마 헤어지자는 말일 것이다.
한 문장으로 사람의 가슴이 이렇게 아릴 수 있다니. 레먼은 그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소티스 님.”
레먼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소티스의 얼굴을 매만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녀는 제가 도착하기도 전부터 울고 있었다. 속눈썹과 뺨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연보랏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헝클어진 채 붙어 있었다.
당신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어떤 고통 속에서 우리의 이별을 계시처럼 떠올린 것일까.
나쁜 생각을 할 때면, 슬픈 결정을 내릴 때면 그 고운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
“그렇게 할게요.”
레먼은 아주 당연한 일을 하듯 소티스의 결정에 따랐다.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 결정이 기꺼워서도 아니었다. 다만 제가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굴종인 것처럼, 그저 그녀의 결정에 어떤 반기도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슬픔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정말로 슬픈 건 헤어지는 게 아니다. 그 모진 결정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단 것이 아픈 게 아니다. 그 말에 거역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운 게 아니다.
정말로 슬픈 건.
“헤어질게요. 헤어져요, 소티스 님. 그러니까…….”
레먼이 이마를 맞대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울지 마세요.”
그 결정으로 인해 가장 슬퍼하는 게 바로 소티스라는 사실이었다.
“레먼,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당신의 도움 없이, 저 스스로 해내고 싶은 일이에요. 언제까지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만 성공할 수 있는 삶은 싫어요.”
그녀가 고장 난 인형처럼 두서없이 말했다.
“저는요, 혼돈을 살려야만 해요. 핀은 저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네.”
“이 싸움은 위험해요.”
“그렇겠군요.”
“저는 당신에게서 사랑하는 것을 빼앗고 싶지 않아요.”
“고마워요.”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져야 해요.”
“알겠습니다.”
소티스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어서, 거의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레먼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으로도 괴로운 것을, 수없이 반복해 긍정하며 그녀의 이별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마른 몸을 번쩍 안아 들어 의자에 앉히고,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듯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핀 님께서 혼돈이신 거죠?”
“핀은…….”
소티스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혼돈이 아니에요.”
“…….”
“아직 제가 완전한 규율이 아니듯, 핀 역시 그래요. 혼돈이 되어 세상을 망가뜨렸던 건 그 사람의 어머니예요. 세상을 망가뜨리기 위해 딸을 불행하게 만들었죠.”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레먼의 일그러진 미소를 가만히 담았다.
“핀을 해치라고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 요구만큼은 들어 드릴 수 없어요. 제게서 에드먼드 폐하를 떼어 내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건 사람이에요.”
“……네, 그렇게 말하지 않을게요.”
“알아요. 그냥 제가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서 멋대로 움직이는 거라는 사실을요. 이기적이죠?”
“뭐 어때요.”
레먼이 손등으로 소티스의 뺨을 문지르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기심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사람을 구하는 게 백 배 더 낫습니다.”
“위선이잖아요.”
“아무리 위선이 나쁘다 한들 악보다 나쁠 수 없어요. 그리고 소티스 님이 하셨던 모든 행동은…… 위선이 아니라 노력이라고 해야겠지요.”
레먼은 충동적으로 소티스의 뺨에 입술을 누르려다가 꾹 참았다.
아무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라지만, 소티스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그런 그녀의 뜻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차분하게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두 번째 각성이 있었던 거죠?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
소티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하기 시작했다.
“혼돈과 규율의 싸움은 그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혼돈은 악령술사의 소원이 모인 결정체였고, 규율은 베아툼의 가장 위대하고 바른 마법사들이었죠. 이 오래된 전쟁은…… 베아툼의 마법사들과 악령술사들의 해묵은 원한에서 비롯된 거겠죠?”
“……그렇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레먼은 인상을 찡그렸다. 슬픔을 억지로 참기 위함이었다.
“저를…… 이 전쟁에서 빼내려고 하시는군요.”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잃고 무너지지 않았으면 해요. 제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모든 규율은 혼돈과 대적하다가 죽었다. 소티스의 운명이 과연 그 훌륭한 마법사들과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만일 그러다가 제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그건 레먼에게 너무 비정한 일이 아닐까.
“저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는데도요.”
그가 참지 못하고 애걸하듯이 말했다.
“좋아요. 차라리 저를 이용이라도 해 주세요. 제가 아는 것을 뭐든지 알려 드릴 테니…… 다치지, 말고…… 돌아와 주세요.”
레먼은 자신이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소티스 님께서 핀 님과 담판을 짓는 동안, 제가 악령술사들과 싸우겠습니다.”
“……좋아요.”
두 사람은 먹먹한 표정으로 서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어 상대의 뺨을 쓰다듬고 이마를 맞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소티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레먼의 뺨을 쓸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눈속임 같은 이별이라도 좋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다치지 않도록 헤어지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오로지 당신을 위해 살게요.”
소티스가 다짐하듯이 말했다.
“약속해요.”
“…….”
레먼은 슬픈 눈으로 소티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애걸하듯이 글썽였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내 눈물을 삼킨 목소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궁금하신 것을 물어보십시오.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으로서, 규율을 위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악령술사들과 베아툼이 대립하는 이유를 알려 주세요.”
악령술사는 누구고, 왜 사람들을 해치며, 그들은 이 왕국과 세상에 어떤 증오심을 품고 있는지.
상대를 알고 이해한다면 그 사람의 전의를 누그러뜨리거나, 혹은 맞서 싸우거나, 아니라면 더욱 효율적으로 도망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싸운다는 것은 그저 어둠 속에서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레먼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성에서 이곳으로 왔을 때,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너무도 늦게 알려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베아툼의 치부라고 해서 쉬쉬할 문제가 아니다. 이 비좁고 병든 왕국의 문제를 이제는 해결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니까…….
“제가 알려 드릴게요.”
뒤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티스와 레먼이 눈물을 다 닦지도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저만큼 그걸 잘 아는 사람은 없거든요.”
짧게 친,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머리카락. 사납게 보일 정도로 치켜뜬 검은 눈동자. 그리고 차가운 무표정까지.
퀘렐라 에니드가 문가에 기대선 채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편지를 꺼내 들어 보였다.
“퀘렐라 님.”
“두 분께서 여기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일단 이야기하기 전에…… 페리윙클 마탑주께서는 지금 바로 왕성으로 돌아가 보셔야겠습니다. 중요한 국제 안건이 도착했거든요.”
소티스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무리한 탓에 몸이 휘청거렸으나, 의자를 짚고 서서 억지로 견뎠다.
퀘렐라가 깐깐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티스 님께서는 몸이 괜찮아지신 뒤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규율의 각성은 만만하게 보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휴식을 권하셨고요.”
레먼은 소티스의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주춤거렸다.
“……무슨 일이죠?”
“가시면 알 겁니다.”
퀘렐라가 딱 잘라 말했다.
“원로회의 모든 마법사가 모였습니다. 속히 출발하시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퀘렐라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분명히 시급한 일일 터였다. 레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소티스를 위해 살고 싶다면, 이따금 품에서 놓아줄 줄도 알아야 했다. 그녀의 힘을 믿고 기다려야 할 때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티스 님께서는…….”
레먼과 비슷한 생각을 한 소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함께 헤쳐 나가는 건 좋지만, 뭐든지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에 관련된 일이지 않은가. 제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저는 몸을 좀 더 추스른 뒤에 왕성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서 만나요.”
레먼은 바로 떠나는 대신 소티스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소티스 님.”
“알겠어요.”
소티스는 탑 바깥으로 난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레먼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규율은 베아툼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들 사이에서 나오곤 했어요. 가장 위대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바른 길로 갈 수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죠.”
퀘렐라의 말에 소티스가 조용히 답했다.
“그리고 혼돈은 악령술사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슬픈 사람이었겠네요. 가장 강한 복수심으로, 자신의 영혼마저도 그릇으로 내어 삿된 힘을 품는 자가 혼돈이 되는 거겠고요.”
“맞아요. 달리 말하면, 마법사들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가 규율이며 악령술사들이 가진 강한 지독한 무기가 혼돈인 거예요.”
“…….”
“두 무리가 왜 싸우냐고요? 이유는 간단해요. 마법사들은 그들의 이상적인 왕국인 베아툼을 지키고 싶어 하고, 악령술사들은 불행한 삶으로 추방시킨 베아툼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니까요.”
퀘렐라가 소티스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붉은 머리카락에 무감한 눈동자는, 어딘가 핀을 닮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얇은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이번 대의 혼돈은 조금 다르군요. 당신이 독특한 규율이었던 것과 비슷해요.”
“……무슨 뜻이죠?”
퀘렐라는 서신을 들어 보였다. 베아툼 왕실의 인장이 찍힌 문서로, 레먼이 급히 불려가는 이유인 ‘국제 안건’의 내용이 적힌 서신이기도 했다.
“혼돈이 규율을 위해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어요.”
“…….”
“멘데즈 황국의 황비, 피니에 로즈우드가 도망쳤다는 황실의 보고서입니다. 아기를 가진 게 거짓말이었다더군요. 처음부터 작정하고 속인 거였어요.”
피니에 로즈우드는 기꺼이 ‘혼돈’이 되었다.
자신의 은인을 슬프게 했던 모든 것을 혼돈 속에서 망가뜨리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