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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93)화 (94/121)

93화. 혼돈을 위하여 (1)

연보랏빛 나비가 유약한 날개를 부지런히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나비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엘디카의 마법으로, 그녀는 제 과거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높이 떠오른 나비가 자신의 삶을 먼발치에서 돌아보고 있었다.

“루드베키아의 꽃말은 ‘영원한 행복’이라는 뜻이에요.”

가장 최근의 기억이었다. 소티스 메리골드가 피니에 로즈우드에게, 자신이 직접 키운 꽃을 선물했다.

“당신은 태양을 닮았어요.”

쿵. 소티스는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왜 몰랐을까.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핀의 얼굴.

“그거 아세요? 저는…… 이 세상에 ‘규율’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소티스 님일 거라 생각했어요.”

죽음을 실감한 듯, 그러나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듯 담담한 목소리. 핀은 오히려 기꺼워 보였다.

언젠가 자신이 죽어야 한다면, 소티스를 위해 죽고 싶다고 각오한 사람처럼.

소티스는 핀을 내려다보았다. 핀의 간절한 눈길을, 어떤 갈망으로 빛나고 있는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래서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볼 수 있었다.

피니에 로즈우드가 고개를 푹 숙이며 속삭였다.

“소티스 님.”

그녀가 애원하듯이, 기도하듯이 말했다.

“저를 죽여 주세요.”

주변이 이지러졌다. 소티스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불안함으로 요동치는 속을 가까스로 달래며 과거를 거슬러 날아갔다.

핀은 에드먼드와 소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 중, 제 황비가 되어 달라며 청하는 에드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티스도 그때 핀의 시선을 느꼈다. 아이도 가진 마당에, 에드먼드가 황비를 들이려 하는 것이 못마땅한 줄 알았다.

하지만 엘디카의 마법은 소티스로 하여금 그녀가 제 과거를 다시 바라보게 했다. 핀의 시선은 정확히 에드먼드에게 향해 있었다. 녹색 눈동자에 숨기지 않은 분노와 경멸이 어려 있었다.

어떻게 자리를 빼앗아 놓은 주제에 또다시 권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게다가 황후도 아니고 황비라니.

[핀.]

소티스는 그녀에게 물었다. 닿지 않을 질문이었다.

[……당신은 폐하를 사랑했나요?]

묻지 않았으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세상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바라볼 수 없다. 철천지원수라면 모를까.

다시 낮과 밤이 지났다. 시간이 거꾸로 되감겼다. 소티스는 마치 그것이 주마등 같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시드는 게 가장 완벽한 운명인 것이 있어요.”

소티스는 정원에 꿇어앉아 있었다. 핀은 무감정한 얼굴로 그 앞에 서 있었으나, 자세히 보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지 헤아리는 듯했다.

전 황후를 박대하는 황비. 정부 출신의 황후. 황제의 사랑을 등에 업고 공녀마저 꿇어앉힌 후작가의 서녀.

핀은 그 수군거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평판을 바닥에 떨어뜨리기 위해. 에드먼드의 명성을 하잘것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왜 몰랐을까.

왜 보지 못했을까.

[핀. 당신은…….]

해 질 무렵의 사막 같은 여인이었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피니에를 보았을 때 느꼈던 첫 감상을 가만히 떠올렸다.

어떤 표정도 없이 황폐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던 여인. 어둠에서 태어난 듯, 빛을 쬐지 못해 시들어 버린 듯 광택이 없던 녹색 눈동자.

그 눈동자는 이따금 빛났다. 소티스를 바라볼 때였다. 그녀는 뜻 모를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마치 소티스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제가 이 여자를 사겠습니다.”

그리고, 가엾은 붉은 머리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소티스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태양에 눈이 멀어 버린 듯한 눈.

피니에 로즈우드는 소티스 메리골드가 베푼 은혜를 모르는 게 아니다. 그녀에게 모를 수도, 외면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나를 위해…… 그랬던 거구나.]

핀은 소티스가 절대로 제 발로 에드먼드를 떠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그라지고 나서도 계속 황후 자리를 지키다가 불명예스럽게 쫓겨나리란 미래를 내다보았다.

그래서 나선 것이다.

“……이것 하나만은 제게 주세요, 폐하.”

핀이 소티스의 뒤에다 대고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소티스가 가장 사랑했던 것. 그러나 소티스에게 가장 독이 되었던 것.

바로 그것을 빼앗아 달아날 생각이었다.

소티스는 홀린 듯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이 나비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늦게 보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렸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외로운 당신을 안아 줄 수 있었을까.

유약하게 움직이는 소티스의 날개가 드디어 핀에게 닿았다. 그러자 화면이 크게 이지러지며, 마치 소티스의 영혼이 핀에게 스며든 듯 시야가 바뀌었다.

“……소티스 님.”

어두운 방에 홀로 앉은 핀이 말하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당신을 불행하게만 만들어.”

[핀.]

“왜? 살며 당신 같은 여인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텐데. 당신 같은 태양은 어디에도 없을 텐데. 그 멍청한 남자에게는 안목이라는 게 없나? 왜 당신을 무안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하지?”

핀의 목소리는 깊은 분노와 배신감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마른 어깨를 끌어안으며 읊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지.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니까. 타인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타인에게 헌신하는 것으로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제 발로 다 포기하고 떠나라고 하겠어.”

[…….]

“그러니까,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건…….”

태양에 눈먼 여인이 속삭였다.

“내게 줘. 쓰레기 같은 것들은 전부. 그런 것들은 내게 전부 다 빼앗기고, 진짜 행복을 찾아 떠났으면 해. 이 황성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 이런 곳에서 시들지 마.”

처음에는 이렇게 쫓아내는 게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먼 페리윙클이 나타났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다르겠지. 그는 자격지심에 찌들어 소티스를 밀어내기만 하는 멍청한 에드먼드와는 달랐다. 적어도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고, 다정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소티스를 누구보다도 사랑할,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소티스 님. 저는 태어나 겪은 것이 불행밖에 없어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없어요. 이곳으로 이끌어 주셨으니, 여기에서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아니야.]

소티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젓고 싶었다.

이용하려고 데려온 여인이 아니었다.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다.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싶어서, 눈앞에 두고 안심하고 싶어서 데려왔을 뿐인데…….

“저는 소티스 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왜 제가 당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걸 몰라주시는 건가요?]

“때로는…….”

핀이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시드는 게 가장 완벽한 운명인 게 있어요.”

소티스는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불행은 자라서 혼돈이 된다. 그녀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핀으로서는 모든 불행을 전부 집어삼킨 뒤 사라져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시들어 사라지는 것만이 완벽한 결말이라 믿고 있을 테니까.

[왜, 이해해 달라고 말하지도 않고서…….]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인이 걷고 있었다. 불행을 빚어 만든 여인이라 손가락질당한, 혼돈이 될 운명을 타고난 불행이 나아가고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저무는 곳으로. 초라한 곳에서 화려한 곳으로.

태양을 위하여.

그녀의 삶을 구해 낸,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태양의 여인을 위하여.

[핀. 핀, 피니에…….]

소티스가 고개를 내렸다. 정확히 말하면 고개를 숙인 핀을 따라 그녀의 시야를 빌려 보았다는 쪽에 가까웠다.

되감았던 시간은 다시 돌아왔다. 핀은 소티스가 떠난 황성에, 그림처럼 완벽하고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 별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깊은 밤, 어디론가 도망치기로 작정한 듯 가방을 챙긴 그녀는 자신의 납작한 배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납작한 배.

[아이가…… 없었어?]

임신조차도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의사를 속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소티스가 지어 주었던 약을 먹고 하혈한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소티스는 충격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의사를 매수했구나.]

분명, 핀을 위해 새로 데려온 의사라고 했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끌어들여 에드먼드를 속이는 데 이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하혈이 아니라, 몸이 좋아져서 월경을 새로이 한 것이라면…….]

마리아네스가 데려온 기력술사들은, 핀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었다. 핀은 소티스가 지어 준 약을 먹고 오히려 몸이 좋아졌다고 했고, 이후에도 거동을 불편해하는 일 없이 연회에도 잘만 참여했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이제야 하나로 뭉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티스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런데 제가 어떻게 당신을 죽일 수 있겠어요…….]

이 반쪽짜리 구원조차도, 저를 시궁창에서 끌어올린 유일한 선의라며 목숨을 바치는 그녀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소티스 님.”

핀은 그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인 양 조용히 불렀다.

“소티스 님.”

[…….]

“사라지지 마세요.”

[…….]

“사라지는 건 저였어야 해요.”

소티스는 문득 생각했다.

세간에서 붉은 머리의 사람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했던가? 물론 차별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보라고. 이렇게, 불꽃처럼 찬란하고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다고. 더는 그럴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타오르는 영혼을 본 일이 있냐고.

자신마저 속인 것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저 서글펐다. 은인에게조차도 거짓말을 해야 했던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기댈 곳 없이 외로웠을까. 저 자신의 삶마저 도구로 사용해 가며 전소하는 이에게 따뜻한 포옹 한번 해 주지 못했던 것이.

사라져서는 안 돼.

그녀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두 사람 다 사라지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가 있다면, 그 방향으로 두 사람을 이끌 힘이 존재한다면.

그게 진짜 ‘마법’은 아닐까.

그렇다면, 소티스 메리골드는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

“…….”

소티스는 눈을 떴다.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눈앞에 그토록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슬픈 호박색 눈동자가 제 얼굴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티스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레먼.”

“…….”

“……우리, 헤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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