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규율의 송시 (4)
레먼 페리윙클은 잊힌 기억의 마탑을 싫어했다.
딱히 그 마탑의 소속 마법사들과 문제가 있었다거나, 그들의 마법적인 가치관을 싫어해서는 아니었다. 대대로 기억 마법을 연구하는 이들은 동료 마법사들에게 꺼림칙한 시선을 받곤 했다. 감추고 싶은 과거를 들추는 것을 반기지 않는 마법사들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의 기억이 조작될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레먼은 스승인 엘디카 덕에 그런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가 기억의 마탑을 싫어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마지막이 비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혼돈으로 인해 모조리 파괴되어 폐허가 된 마탑은 제 마음의 가장 약하고 어두운 부분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혼돈은 왜 세상을 망가뜨리고, 악령술사들은 왜 혼돈을 찾아 헤맬까.
이유가 궁금했지만 탐구하려다 그만두었다. 레먼은 그들의 불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동질감을 느끼기는 했다. 마법 때문에 저주로 취급당해서 멘데즈에서 쫓겨난 레먼과, 마법이 발현되지 않거나 영혼이 깨져 파괴적인 힘을 가진 아이들이 멘데즈로 쫓겨난 것은 그리 다른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모두가 불행 앞에서 악해지는 건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소티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건 제 의무예요.”
소티스는 자신이 넓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족함 없이 자랐으니, 부족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그녀는 불행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적대감을 보일 때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레먼과 엘디카에게는 없었던 부분이었다.
“베아툼의 마법사는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힘에는 그에 맞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지요.”
그건 레먼이 소티스에게 했던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레먼의 긍지는 말뿐이었다. 그는 악령술사들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이유를 진심으로, 치열하게, 온 힘을 다해 고민해 보지 않았다. 딱히 이해해 보려고도 애쓰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쓸고 지나간 폐허를 보며 분노하고 복수를 다짐했을 뿐이었다.
알고 있다. 모두가 소티스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특별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때때로 그녀의 선택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신의 것에 더욱 가까웠다. 그녀의 훌륭함은 결벽적이었고, 그래서 비인간적이고 이상적으로 느껴질 때마저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거겠죠.”
레먼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외롭게 서 있는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알겠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규율이 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다. 마법적인 능력으로서는 어떤 규율보다도 하찮을지도 모르나, 그녀의 영혼은 규율의 본질에 걸맞았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소티스는 매 순간 진심이었고 누구보다 절실했다.
그러니까 더욱 외면할 수 없는 거다.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돕고 싶었다. 그 외로운 길에 사랑하는 여인이 홀로 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평생 당신의 반의반조차도 흉내 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옳은 길과 그른 길 중 옳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뭐든지 혼자 견디지 마세요.”
레먼이 슬프게 중얼거렸다.
“왜 당신에게는 모든 걸 혼자 참아 내는 게 당연한 걸까요?”
이해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속이 쓰렸다.
이제 힘든 순간이 오면 몸을 웅크리는 게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았으면 했다.
곁에 있을 테니까. 언제든 손을 내밀 테니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소티스 님.”
레먼은 한없이 높은 곳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두 개, 세 개씩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길 시간도 없이 숨 가쁘게 달리고 또 달렸다.
소티스 님, 소티스 님, 소티스 님.
단 하나만의 목표를 위해 달려가던 그의 귓가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물건이 날아가 벽에 부딪혀 박살 난 듯했다.
그 사이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이어졌다.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를 따라 레먼이 달려갔다.
소티스는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레먼이 다가가도 반응하지 않았다. 물빛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고운 눈썹은 일그러져 있었다.
몇 개의 주문을 외워 주변의 물건들을 치워 낸 레먼은 그녀의 마른 몸을 얼른 끌어안았다.
“혼자 계시지 마세요.”
그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저를 믿어 주세요. 제게 당신을 지킬 자격을 주세요.”
소티스가 그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게 정말로 그녀가 기뻐할 만한 선택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레먼은 그녀의 곁을 지켰다.
한 번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그녀의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
이걸 순수한 의미의 희생이자 이타심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아니, 아닐 것이다.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소티스가 말했다. 그간 행적을 돌아본다면 사뭇 어색하게마저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소티스는 자신을 버려 가면서까지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챙기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타인을 위해 살아가고 싶었다. 현명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똑똑해야 했고, 상냥해야 했고, 기꺼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건 누구도 긍정하지 않았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못 이긴 척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타인의 평가를 빌리는, 세상에서 가장 수동적인 이기심이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하면 자신의 유약함을 조금 참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라를 알뜰살뜰 돌보는 황후라면, 황제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해도 황성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상냥하게 웃는 사람의 얼굴에는 모진 소리를 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냥,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을 긍정하고 싶어서.
“핀을 구한 건…… 오로지 제 만족감을 위해서였어요. 사실 황성에 데려온 게 정말로 핀을 위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황비가 된 이후로 그 사람의 눈은 점점 더 공허해졌고 차가워졌으니까요.”
정말 그녀를 위한다면 황성에 데려오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정착시키고 일거리를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소티스는 그러지 않았다. 다른 방법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그저 황성에 데려가 달라 청했다.
직접 구한 이를 곁에 두고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자신이 그녀를 구했다는 사실을 내내 기억하며, 제 선택이 옳았다 인정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냥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제 삶 하나 구하지 못해 절망하던 것을, 불쌍한 누군가를 구해 낸 것으로 만족하기 위해서.
비겁했다. 소티스는 이제야 그 사실을 후회했다. 왜 한 번도 묻지 않았을까? 당신은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무엇을 하고 싶냐고.
정말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고.
그걸 물어봤다면, 어쩌면 우리가 달라졌을까.
“그러니까, 책임을 질게요.”
이번에는 정말로, 피니에 로즈우드를 위해서.
외로웠던 그녀를 위해 진심으로 손을 뻗는 것이다.
그것으로 이 해묵은 미련을 털어 내고, 두 사람 모두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알아요. 이것도 제 독선이고, 저 자신만의 도덕심을 위해서라는 것을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핀에게…… 진짜 선택지를 주고 싶어요.”
“진짜 선택지라고.”
목소리들이 웅성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여자는 그대에게 은혜를 갚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 이미 몇 번이고 당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녀의 영혼 안에서 요동치는 목소리 중, 단 한 명만이 조용했다.
소티스는 그 사람을 불렀다.
“엘디카 님.”
“…….”
“엘디카 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피니에 로즈우드가 끝내 제가 베푼 것을 알지 못할 거라고요.”
그러자 엘디카가 대답했다.
“아뇨.”
“…….”
“하지만, 다른 규율들께서 왜 만류하는지도 압니다. 왜 혼돈과 규율이 이렇게 오래도록 싸웠는지 물으셨지요.”
“네.”
“악령술사들과 베아툼의 관계는 너무 오래도록 어긋나서,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그것을 바로잡는 건 불가능하지요. 피니에 로즈우드는 이미 혼돈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혼돈은 거짓말로 세상을 현혹하고, 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그녀는 세상에 거짓말을 했고, 악령술사들을 제게로 끌어당길 것입니다.”
“…….”
“마음이 바뀐다면, 혼돈은 당신과 대적할 것입니다. 그건 위험한 일이에요.”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요.”
소티스가 간절하게 말하자, 엘디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당신이 선택한 길이군요. 알겠습니다. 혼돈을 진정으로 굴복시키면 이 오래된 싸움이 끝날 거라 말한 것은 나였으니, 도와야지요.”
“……고맙습니다.”
“일지에 적었다시피, 나는 선대 혼돈의 기억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실패였고, 분노로 미쳐 날뛴 혼돈의 힘이 수많은 마법사의 목숨을 거두어 갔지요.”
“저는…….”
소티스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피니에 로즈우드의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해 보고 싶어요.”
그러자 허공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푸른 눈의 엘디카는 가만히 웃으며 소티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본인의 과거를 이해하는 것이 순서겠군요.”
“제 과거는 왜…….”
엘디카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직접 볼 것이니, 어떤 설명도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가장 위대했던 마법사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소티스의 전신을 감쌌다.
곧 정적이 파도처럼 다가와 소티스의 영혼을 뒤덮었다.
너무도 이상한 감각이었다.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고통도, 머릿속에 범람하던 지식도, 목소리도,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연보랏빛 나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아득할 정도로 긴 새하얀 길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