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규율의 송시 (3)
소티스 메리골드가 사라져 버렸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레먼은 조금 막막해지고 말았다.
대체 왜? 이번에는 무엇이 소티스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약속된 시간으로부터 한나절이 지나도록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레먼은 페리윙클 마탑에서 나와 왕성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소티스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묻자, 그들은 영 마땅치 않아 하면서도 그녀가 한참 전 알현실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레먼이 알현실에 들어갔을 때, 왕은 특유의 우울한 눈길로 엘디카가 남긴 서적을 훑어보고 있었다.
“새로운 규율이라면 여기 없다.”
마치 그가 자신을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어디로 가셨는지는 아시는군요.”
대답 대신 왕의 푸른 눈동자가 레먼을 응시했다.
“찾지 않는 게 좋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규율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할 힘을 찾으러 떠났다. 오로지 규율만이 해낼 수 있는 위대하고 숭고한 과정이다.”
“아뇨, 이건 우리의 의무를 소티스 님께 떠넘긴 것에 불과합니다.”
레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표정에는 명백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페리윙클 탑의 자료들을 보고도 느끼시는 바가 없습니까? 사소한 상처라며 괄시했던 것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지요. 전하께서는 그들을 더는 외면하지 않기로 하신 것 아닙니까. 베아툼이 마법을 종교처럼 숭배했던 게 어떻게 소티스 님의 의무가 되지요?”
“그래. 이는 우리의 문제였지. 하지만 희생은 필요하다, 페리윙클.”
“그게 소티스 님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규율이니, 혼돈이니, 마법사와 악령술사 같은 건 그저 베아툼에서 몇백 년간 씨름하던 문제였을 뿐이다. 그들의 문제고, 그들의 과업이다.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건 좋지만, 소티스가 희생양이 되는 건 싫었다.
“저는 그분에게 더는 어떤 짐도 얹고 싶지 않습니다…….”
레먼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 세상은 도대체, 소티스 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지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왕이 시든 목소리로 대꾸했다.
“악습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나.”
베아툼의 오래된, 그리고 잔인한 전통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혼돈은 악령술사들의 비호 아래 태어난다. 그 자신이 가장 강력한 악령술사기도 하다. 마법사들이 그러듯 핏줄을 통해 그 능력을 물려받기도 한다. 그리고 대대로 불행한 삶을 산다.
엘디카는 베아툼의 몇몇 이들만이 어렴풋이 알고만 있는 사실을 자신의 책에서 냉철하게 정리했다.
「악령술사들은 깨진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상처는 타인의 영혼을 삼키는 것으로만 치유된다.」
악령술사들의 기억을 읽어 낸 엘디카가 말했다.
「그들은 베아툼의 광증에 희생된 이들이다. 마법사들의 낙원에 집착하는 이 땅의 전통은 ‘마법사가 아닌 자’를 실패로, 저주로 취급했다.」
베아툼은 마법을 숭배했다. 대대로 위대한 마법사가 나라를 다스렸고, 훌륭한 마법사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다. 자질을 가진 아이라면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거두어 보호하는 게 미덕으로 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마법은 철저히 재능의 영역이었다. 그런데도 현재 베아툼에서의 마법사 비율은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은 마법사가 되기 위해 영혼에까지 손을 뻗었다. 마력을 주입하거나 마법에 노출시켜 억지로 뜯어고쳤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이 망가져 갔다. 그 모든 과정을 견뎌 내지 못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가 되지 못한 아이들이 버려지는 일도 더러 생겼다.
레먼은 멘데즈와 베아툼이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악령술사는 마법사가 되는 과정에서 망가진 이들이다. 달리 말하면, 베아툼의 사람들이 마법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었다.
이는 베아툼의 마법지상주의가 낳은 비극이다.
“페리윙클.”
왕이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고 하여 어찌 염치를 모르겠는가? 하지만 소티스 메리골드의 존재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작은 희생으로 거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면, 기꺼이 감내해야 하지 않겠나.”
“악령술사들도 처음에는 그저 희생된 이들이었지요.”
레먼의 뾰족한 말에 푸른 눈동자가 다시금 우울해졌다.
“그래. 나 또한 방법을 찾고 있다.”
“…….”
“……허나 규율은 스스로 고립되기를 선택했지. 그러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왕이 어렴풋이 웃었다.
“비겁한 속죄라 하여도 어쩔 수 없다.”
레먼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저는 그분께 갈 것입니다.”
그는 바쁜 걸음으로 알현실을 나섰다. 왕성에서 나오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어디로 갔을까.
당신은 어째서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홀로 견디는 것이 당신에게는 왜 그리 당연할까.
당신을 지키고 싶은 이 마음은 오만일까?
“소티스 님.”
레먼은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싶었다면, 어디로 갔을까.
이내 그의 발이 새하얀 포석을 밟으며 나아갔다. 곧게 나아가는 걸음은 포석이 깔리지 않은, 고운 흙바닥을 디뎠다.
그가 오른 길에는 이따금 색이 바랜 돌 조각이 신발에 밟혔는데, 아주 오래전에는 페리윙클 마탑이나 알베스 마탑으로 향하는 길처럼 상징적인 포석이 깔려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였다.
잊힌 기억의 탑.
주인 없이 버려진 마탑은 세월의 흐름에 천천히 깎여 나갈 뿐이었다.
숨고 싶다면 그곳만큼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
소티스는 전신을 태워 버릴 것 같은 열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자신의 뇌리에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낯선 이의 목소리, 어떤 장면, 고대어로 된 문장, 추상적인 음률 같은 것이 뒤죽박죽 섞이며 팽창하고 있었다.
이대로 미쳐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규율들이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을 그대에게 남긴다.”
“가장 바른 것은, 가장 훌륭한 것 위에서 찾은 균형이리라.”
“그대는 적어도 혼돈의 숨통을 끊을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소티스는 그들의 말을 힘껏 부정하고 싶었다.
단순히 혼돈을 죽이는 것으로 이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긴 역사 속에서 소티스가 유일한 규율이 아니었고, 핀이 유일한 혼돈이 아니었으니까.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이 힘을, 선대의 규율들이 이룬 것을 단순히 피니에 로즈우드를 죽이는 데 쓰고 싶지 않았다.
“저는…… 혼돈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누군가 노기 가득한 음성으로 외쳤다.
“오만한 소리!”
“혼돈을 죽이지 않으면 세상을 통째로 망하게 할 셈이냐!”
“……새로운 규율이여, 그대는 심약하구나.”
“혼돈은 언젠가 반드시 악령술사들과 접촉한다. 그들의 불행은 복수심을 심어 주었고, 힘을 손에 쥔 이는 세계를 파멸로 이끌겠지.”
“알고 있나? 그대가 몸을 숨긴, 이 잊힌 기억의 마탑은 혼돈과의 전쟁으로 파괴된 곳이다. 이곳에 있던 모든 생물은 개미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처참하게 죽었고, 영혼은 모조리 파괴되어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조차 못했다. 우리는 죽어서도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됐지.”
“혼돈이 자라기 전에 먼저 제거해야 한다. 최초의 혼돈, 그것의 이름은 핀이었다. 돌고 돌아 다시 태어난 마녀를 죽여야 해.”
소티스가 괴로움을 삼키며 항변했다.
“아닐 수도 있어요.”
“어리석은 후손아, 역사가 모든 것을 증명할진대.”
“이름이 같아서요? 같은 운명을 타고나서요?”
그녀가 이어 말했다.
“아직 핀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멘데즈의 영혼들을 현혹했던 사람은 선대 혼돈이고, 핀의 어머니겠지요. 그것까진 알겠어요. 그래도, 그 죄를 딸에게 묻는 건 가혹해요.”
멘데즈에서 영혼들에 문제가 일어났었다. 소티스는 이미 빈민가에서 사라질 뻔했던 영혼들을 만났고, 생령이 되어 분리된 애나를 구하기도 했다.
혼돈은 사람들의 불행을 파고든다. 그 영혼에게 미움과 절망을 가르치고, 비탄을 잡아먹으며 즐거워한다. 악한 본성으로 세상을 깨뜨리며, 그 사실로 만족을 얻어 내는 존재다.
하지만 그게 핀을 지금 당장 죽여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소티스에게는 그랬다. 비록 핀이 소티스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지만, 그것이 혼돈이어서는 아니지 않은가.
마녀. 마녀라는 말은 정말 잔인하다. 단순히 그 호칭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그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여자가 되어 버린다. 누구도 그 호칭 앞에 돌을 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종내에는 그녀를 불에 태워야 만족하겠지.
“알아요, 안일한 말이라는 걸요. 그래도, 핀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구한 사람이었어요…….”
소티스는 고민하다가 질문했다.
“왜 그랬나요?”
고통을 삼키는 그녀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원리와 법칙, 그리고 아득하게마저 느껴지는 진리와 지식이 머릿속에서 범람하다 못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소티스는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왜 악령술사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베아툼을 공격했나요? 그들의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악령술사와 혼돈이 베아툼이 아니라 멘데즈로 터전을 옮기게 된 건 단순한 우연인가요?”
이윽고, 새로운 규율이 간절하게 다시 물었다.
“이 많은 지식과 진리 중, 핀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로 하나도 없을까요?”
그러자 어떤 규율이 깐깐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건 마녀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마녀를 구하고 싶다는 그대의 개인적인 만족감 때문인가?”
예리한 지적이었다. 소티스가 천천히 대답했다.
“제 만족감 때문이에요.”
그녀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이기적이었고 자멸적이었다.
소티스는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모순 속에서 만족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리하여, 마지막 규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