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규율의 송시 (2)
「나는 언제나 완전무결한 죽음을 꿈꾸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게는 사랑하는 것이,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내 나는 실패를 핑계 삼아 이 세계에서 내 존재를 전소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남겨 두고 갈 이들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것은 규율의 송시였다. 작은 수첩 안에는 엘디카가 사랑한 모든 것, 놓쳐 버린 모든 것, 그리고 끝내 이해할 수 없어 반목하게 되었던 것에 대한 찬가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소티스는 낡은 종이의 표면을 조심스레 쓸어 보았다. 꾹꾹 눌러쓴 가지런한 글씨가 손가락 끝에 걸리며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선사하는 듯했다.
엘디카 페리윙클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훌륭한 학자였지만 오만했던 여인. 불행을 이해하지 못해 혼돈과 대립하면서도, 자신의 죽음보다 그 뒤에 남겨질 이들을 더 염려하던 이.
엘디카의 마지막 수기에는 패배를 예감한 직후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당시 아직 어렸던 퀘렐라와 레먼을 살리기 위해 엘디카를 비롯한 다른 마법사들이 기꺼이 희생한 일, 그리고 그들이 올바른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알베스가 보호자 자격으로 남게 된 전말마저 담겨 있었다.
그건, 남겨진 이들에게 비정하게마저 느껴질 만큼 완벽하고 철저한 죽음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세간의 질책이 쏟아질 것이 두렵다. 하지만 퀘렐라와 레먼에게는 마법사로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이들의 가능성을 꺾고 싶지 않았다. 두 아이가 상실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고 만끽하기만을 바랐다.」
엘디카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퀘렐라는 스무 살의 나이로 그 근방에서 가장 실적 좋은 스카우터이자 뛰어난 감정 마법사가 되었다. 남들보다 마법적인 성장이 한참 더뎠던 레먼은 영안을 깨우쳤고, 이제는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이자 베아툼의 대마법사가 되었다.
엘디카는 작은 왕국의 마법사로 살아가는 일에 어떤 한계나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소티스는 수첩에 빼곡하게 들어찬 이야기를 읽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기만을 바랐겠지만…….
「하지만, 무엇을 택하더라도 그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으리. 부디 행복해 다오. 어디서든, 어떻게든.」
소티스는 절박해 보일 정도의 진심이 배어나는 문장을 가만히 보았다.
그렇게 물 흐르듯 이어지던 수기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리고, 규율이여.」
이윽고 마지막 기록이었다. 엘디카의 마지막 당부가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에 맺혔다.
「이 고된 숙명을 짊어질, 고결한 죽음을 꿈꾸는 ‘가장 바른 것’이여. 그대를 위해 내가 이룬 모든 것을 내어놓고 떠난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 자신의 마법으로 작은 불꽃 하나 피우지 못한다고 하여 염려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진짜 마법은 그런 게 아니니까.」
소티스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지막 장을 펼쳤다.
툭, 작은 책갈피 하나가 탁자 위로 떨어졌다. 무척 낡아 양피지 끄트머리가 누렇게 변색된 물건이었다.
「이 전쟁을 끝낼, 진짜 마법을 위하여.」
편두통 때문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소티스는 수첩을 덮었다. 엘디카가 남긴 모든 낱말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맴도는 듯했다.
그중 가장 선명하게 남은 표현은 마지막 전언이었다.
‘진짜 마법’이란 무엇일까? 위대한 마법? 정교한 마법? 아니면 유서 깊은 마법?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만한 기준은 과연 어디에 두어야 할까?
오래도록,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법한 문제였다.
***
“기억은 이해의 초석이지. 이 사실을 모르던 건 아니었지만…….”
왕의 푸른 눈동자가 우울하게 빛났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의 문양을 들여다보던 소티스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엘디카 님의 비전이 전하께 도움이 되었나요?”
“물론이다. 과분할 정도였지. 조영 마법의 뿌리는 기억 마법에 있다. 사람과 사물에 깃든 기억을 꺼내 보는 것이 조영이니까.”
며칠 전, 소티스 일행은 당장 쓸 만한 몇 가지를 제외한 엘디카의 기록들을 왕실에 헌정했다. 가장 위대했던 마법사의 업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더욱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소티스는 베아툼의 국왕에게 엘디카의 수첩에 끼워져 있던 책갈피의 기억을 읽어 내 달라고 청했다. 책갈피의 뒤편에 그려진 추상적인 문양이 악령술사를 상징하는 표식이라는 것을 듣자, 이 물건이 혼돈의 소지품일 거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왕은 기억 마법이 상세하게 연구된 비전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흔쾌히 수락했다.
“전하께서는 베아툼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조영 마법을 구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억 마법도 다루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 말은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왕은 수조에 양손을 대고 복잡한 고대어 문장을 외웠다. 같은 문장을 네 번쯤 반복했을 때, 드디어 그의 손끝에서 녹색 빛이 터져 나오며 수조를 물들였다.
“내 마법에는 몇 가지 제약이 있었지. 우선, 너무 오래된 기억은 불러오지 못했다. 시간을 거스르는 데는 시간이 적잖이 들기 때문에, 과거를 되짚다 보면 길을 잃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기 일쑤였거든.”
“그리고요?”
“현재에 큰 영향을 주는 과거의 파편만을 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영은 현재에서 비롯된 힘이었지. 기억은 온전히 과거를 가져오는 힘이고.”
소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의 창백한 손바닥에 책갈피를 얹어 주었다.
“대대로 ‘규율’은 모든 마법의 뿌리이자 본질에 해당하는 마법들을 계승한다.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해지는 것들이지. 아마 각성하고 나게 되면, 그대 또한 이 마법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대답 대신 가만히 미소 지어 보였다.
왕은 엘디카의 마법에 비하면 제 마법은 보잘것없으며, 자신이 삼백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도 그녀가 다다랐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라 하였지만…… 소티스가 보기에는 지금 구사하고 있는 조영 마법도 충분히 대단해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 책갈피를 단단히 쥐고, 다른 손으로는 수조에 느리게 대어 보았다. 그러자 왕의 전신이 옅은 금빛으로 빛나며 투명한 물에 어떤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수조 안에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비쳤을 때, 소티스는 그녀가 피니에 로즈우드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달랐다. 그녀는 핀을 무척 닮았으나, 그보다는 나이가 좀 더 들고 예민해 보였다. 게다가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찢어지고 해진 탓에 거의 넝마처럼 보이는 아기 강보를 구명줄처럼 꼭 쥐고 있었다.
[우리는 저주받은 게 아니야!]
여인의 노성에 깜짝 놀란 소티스가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자신뿐이었던 모양이었다. 왕은 수조에 더 바짝 붙어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여인의 입 모양을 읽어 내기 위함인 듯했다.
[우리의 존재는 너희의 욕망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쫓겨난 처지에 원망한다면, 반대로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죄책감 또한 가져야 하는 것이 옳다. 이 작은 땅덩이에서 명성을 논하다니! 죄책감 없는 명예야말로 오만이자 독선에 불과할 텐데도!]
여인은 작은 동굴의 안으로 들어갔다. 짐승의 뼈와 피, 몇 권의 책과 다 녹아 가는 양초 사이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네게 태초의 혼돈이 가졌던 이름을 주마. 너를 그릇 삼아 운명의 힘이 내려오리라. 이 세상의 비겁한 도덕을 심판하거라. 아니, 모두 전복시켜 버리거라.]
여인의 녹색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기억하거라, 아가야. 불행은 자라서 혼돈이 된다. 혼돈은 불행을 낳는다. 우리는 죽되 죽지 않는다. 썩어 빠진 베아툼에서 시작된 불길은 대륙을 모두 살라 먹을 것이다. 그들의 오만을 모두 으스러뜨리거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그 동굴에는 신발 하나 신지 못한 어린아이가 홀로 앉아 있었다. 어깨 너머까지 기른 붉은 머리카락은 무척 아름다웠다. 상처와 흙, 먼지로도 그 아름다움을 다 가릴 수 없을 만큼이었다.
그러나 희디흰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빚은 인형처럼 보였다.
[그래서 제가 불행하도록 버려두셨나요? 어머니.]
핀이구나. 소티스는 홀린 듯 앞으로 나섰다.
사진으로도 본 적 없었던 모습이건만,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핀을 보기만 했을 뿐인데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누구도 돕지 않는 불행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수조 속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인이 걷고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저무는 곳으로. 초라한 곳에서 화려한 곳으로.
걷고, 다시 걷고, 또 걷고 있었다.
봄이 저물고, 여름이 피어나고, 가을이 익어가며, 겨울이 송이송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핀은 홀로 걷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공허하게 비어 있었으며 그림자가 죽음처럼 길고 검게 드리웠다.
여전히 핀은 홀로 있었다.
그리고, 그때 수조 속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무감정한 녹색 눈동자가 두꺼운 유리벽 너머 소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
찌르는 두통과 함께 피니에 로즈우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최초의 혼돈은 핀, 이라 불렸어요.]
소티스가 헝클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제게만 들리는 목소리. 눈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커져 가는 두통의 존재. 울렁거리는 듯한 이 기분까지.
“이 근방에…… 쓰지 않는 탑 같은 게 없나요?”
“있다. 하지만 길이 지워져서, 잘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알려 주세요.”
수조 속의 기억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듯해서, 소티스는 수조 안으로 손을 넣어 핀의 차갑고 마른 손을 쥐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규율은 세 번의 각성을 통해 가장 바른 존재로 거듭나지.”
왕이 말했다.
“첫 번째 각성에서는 위대한 것을 담을 그릇을 만들고, 두 번째 각성에서는 강한 힘을 전수받는다. 그리고 세 번째 각성을 통해 세상을 바꾸지.”
소티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왕을 보았다. 그는 흩어지는 핀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곱씹듯이 하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곤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고통 속에서 그대가 찾는 것을 손에 넣기를 바라겠다.”
기분 탓이었을까?
그는 소티스에게, 혹은 이미 사라져 버린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